내년 초 일본 인근 해역에 파견될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항모. ⓒphoto 뉴시스
내년 초 일본 인근 해역에 파견될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항모. ⓒphoto 뉴시스

2017년 8월 일본을 방문한 테리사 메이 당시 영국 총리가 해상자위대를 찾았다. 메이는 최신예 헬기 항모인 이즈모함에도 올랐다. 그녀를 영접한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방위상은 “지금의 이즈모함은 러일전쟁 때 일본제국 해군의 기함(旗艦)으로 러시아 함대를 격파했던 군함과 이름이 같다”고 했다. 방위상은 “러일전쟁 당시 영국이 제조해준 이즈모함 덕분에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현재 이즈모함은 F-35B 스텔스 수직이착륙기를 탑재하기 위해 경항모로 개조 중이다.

그러자 메이 총리는 “일본과 영국은 오랜 협력 관계에 있는 나라였으며, 방위 문제에 관해서도 두 나라는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화답했다. 메이 총리는 방일 기간 중 아베 총리와 함께 ‘안전보장 협력에 관한 영·일 공동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성명문에서 양국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가장 긴밀한 안보 협력 파트너로서 ‘법칙에 기반을 둔 국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도력을 발휘하자”고 합의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오노데라 방위상이 영국 남부 포츠머스 해군기지를 찾아 영국 신형 항모인 퀸 엘리자베스함에 올랐다. 당시 퀸 엘리자베스함은 1주일 전에 취역한 최신 함정이었다. 오노데라는 퀸 엘리자베스에 승선한 최초의 장관급 외국인이 됐다. 퀸 엘리자베스를 시찰한 뒤 오노데라는 “퀸 엘리자베스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전개될 경우 이즈모함과 연합훈련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 같은 3년 전의 오노데라 제안이 현실이 될 전망이다. 퀸 엘리자베스 항모가 실제로 내년 중 일본 인근 해역에 파견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지난 12월 5일 “영국 해군이 이르면 내년 초 일본 인근 해역에 최신예 항공모함인 퀸 엘리자베스가 포함된 항모 전단을 파견할 예정”이라고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항모 전단은 일본 난세이(南西)제도 주변을 포함한 서태평양에서 미군 및 일본 자위대와 연합훈련을 실시할 것이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영국 해군은 파견기간 중 일본 아이치현에 위치한 미쓰비시중공업에서 함재기인 F-35B 정비도 실시할 계획이다. 주한 영국대사관 공보 관계자는 “보리스 존슨 총리가 퀸 엘리자베스 항모 전단의 내년도 첫 작전배치 계획을 승인했다”며 “항모 전단은 지중해와 인도양, 동아시아를 가게 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군의 한 정통한 소식통은 “영국 항모 전단은 내년에 지중해와 인도양을 거쳐 아시아로 이동하게 된다”며 “퀸 엘리자베스 항모 전단의 아시아 출동 시기는 내년 초가 아니라 내년 하반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영국 항모 전단이 주일미군 기지인 유엔사 후방기지들로부터 보급을 받게 되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영국은 6·25전쟁 참전 16개국 중 하나로 유엔군사령부 회원국이다. 주일미군 기지 중 7곳은 한반도 유사시 미군 등 유엔사 회원국의 병력과 장비가 한반도로 투입되는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다. 요코스카 해군기지, 사세보 해군기지,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퀸 엘리자베스 항모 전단도 이들 기지로부터 보급 등 지원을 받을 수 있다.

2017년에 취역한 퀸 엘리자베스함은 영국 해군 사상 최대급 함정으로 배수량은 6만5000t, 길이는 280m에 달한다. F-35B 스텔스 수직이착륙기를 비롯, 각종 헬기 등 40여대의 함재기를 탑재한다. 전시에는 최대 60대의 각종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해군은 퀸 엘리자베스함과 프린스 오브 웨일스함 등 같은 형의 항모 2척을 보유 중이다.

영국의 항모 전단이 서태평양, 특히 동북아 인근에서 장기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영국은 왜 많은 돈을 들여 항모 전단을 아시아까지 출동시킬까? 전문가들은 우선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가 진행됨에 따라 유럽에서 한 발짝 발을 뺀 영국이 미국과의 특수관계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러시아·중국의 도전을 억제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적극 동참하게 됐다는 것이다. 영국 해군은 남중국해에서 미국의 ‘항행의 자유’ 작전에도 참여하고 있다.

‘제2의 영·일동맹’ 예고

2018~2020년 함정 5척을 아시아로 보내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폈다. 영국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9단선) 주장을 일축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영국이 일본과 적극적인 관계 증진을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이춘근 박사는 언론 기고문을 통해 “세계 정치의 변화는 영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제2의 영·일동맹’을 요구하고 있다”며 “마치 118년 전인 1902년 영국이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제어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었던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형국”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은 국제 정세 변화에 맞춰 이미 캐머런 내각 당시인 2015년 발표된 ‘국가 안전보장 전략’에서 해양국가와의 유대, 특히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강조하고 있었다고 이 박사는 지적했다. 2015년 11월 발표된 영국 ‘국가 안전보장 전략’ 보고서는 “영국은 (영국의) 가장 가까운 안보 파트너인 일본과의 방위·정치·외교적 협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으며, 일본의 세계적 역할 확대를 적극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이 보고서는 또 “영국은 확대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임 이사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노력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967년 수에즈운하 동쪽 지역에서 완전 철수했던 영국은 50여년 만에 다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깊은 관심을 갖는 외교정책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에선 이런 영국의 아시아 진출 전략을 ‘입아(入亞) 전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100여년 전 일본이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국가가 되겠다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 전략’을 추진했던 것에 빗댄 말이다.

이 박사는 일본 역시 영국과의 ‘제2 영·일동맹’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많다고 지적한다. 중국이라는 대륙세력의 팽창과, 재기를 노리는 러시아의 공세적 대외정책이 일본에는 가장 큰 근심거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유무역 체제의 세계적 확대, 미·일 안보 체제의 영속성을 담보하는 안전장치, 무기·군사기술 공동개발 등을 위해서라도 영국과의 동맹관계 형성이 필요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내년 영국 항모 전단의 아시아 파견은 중국의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퀸 엘리자베스 항모 전단이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를 방문할지도 관심사다. 영국은 우리 정부와 군이 적극 추진 중인 경항모 사업에도 높은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은 “영국은 우리나라 경항모가 3만~4만t급이 아니라 이보다 큰 퀸 엘리자베스급(6만5000t급)으로 더 커지기를 기대하며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며 “그런 맥락에서 퀸 엘리자베스 항모의 한국 방문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유용원 조선일보 논설위원·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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