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노 고원의 끝자락에서 가라쿠니다케로 향하는 길목. 왼쪽에 고위험지역이어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은 울타리가 보인다. 사진 출처: 663highland의 작품. Wikimedia Commons Creative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bino_Plateau03n4592.jpg
에비노 고원의 끝자락에서 가라쿠니다케로 향하는 길목. 왼쪽에 고위험지역이어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은 울타리가 보인다. 사진 출처: 663highland의 작품. Wikimedia Commons Creative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bino_Plateau03n4592.jpg

‘왜’의 침략 얘기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꽤 익숙한 주제다. 주로 남쪽 해안 지방에서 있었던 소소한 노략질에서 임진왜란 같은 대규모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와는 성격이 다른 관계 맺음은 없었을까?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침공해 들어갔다든지, 혹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과 일본 열도에 살던 사람들이 한 편이 되어 누군가와 싸웠다든지 말이다.

이 시리즈를 통해서 보아온 것처럼, 가락국의 흔적은 규슈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 도처에 남아 있다. ‘가락국’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 연결고리만을 숨긴 채 말이다. 그 흔적 중에는 분명 가락국 사람들이 일본에 들어왔는데, 여러 방면에서 월등 우세한 파워에 원주민들이 압도당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가락국 군사들이 일본을 성공적으로 침략하고 제압했던 사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건에 대한 뚜렷한 증언이 남아 있다. 1920년 대 후반, 한국민속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손진태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역작‘조선민담집’에 실린 얘기다.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한반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마을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그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언제인지 모를 까마득한 옛날, 한국군이 대거 일본을 정벌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군은 일본의 ‘에비야’라는 들판에서 왜군과 싸워 대패해서, 싸우러 간 병사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후 ‘에비야’라는 말은 한국사람에게 듣기만 해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무서운 말이 됐고, 지금까지도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말로 쓰이고 있다.”

생소한 내용이다. 옛날 이야기니까, 사람들이 상상해서 만든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런데 최근에는 민담이 단순히 옛날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시각이 두드러지고 있다. 20세기 고전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죠프리 커크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수가 “신화나 민담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집단기억”이라고 말한 이래, 민담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역사기록과는 또 다른 성격의 역사적 증언이 될 수 있다는 학계의 목소리가 켜지고 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실제 있었지만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공식 역사에 담기지 못한 사건을 전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어로 쓰여 일본에서 출판됐던 이 조선민담집에 기록된 에비야(エビヤ)라는 지명은 어디쯤일까?’‘이 일은 언제 있었던 것이며,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와 싸운 것일까?’

현재 일본에 에비야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들판은 없다. 비슷한 지명으로는 지난 기사에 나왔던 가라쿠니다케 앞의 고원 평야지대인 ‘에비노’가 있다. 이 에비노가 에비야일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평야를 나타내는 한자인 ‘야(野)’자를 일본어로는 ‘노’라고 읽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한자를 사용하던 시대에 ‘에비’라는 일본 고유의 지명에 ‘들 야(野)’자를 붙여 표기했다면, 일본인은 에비노라고 읽고 한국인은 에비야로 읽었을 테다.

에비노 고원의 두 얼굴. (왼쪽) 야쯔시로 방면에서 바라다 본 에비노 고원과 가라쿠니다케. 산기슭에 자리한 평화로운 들판으로 보인다. 사진 출처: STA3816의 작품. Wikimedia Commons Creative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bino_Plateau03n4592.jpg  (오른쪽) 가라쿠니다케 방면에서 내려다 본 에비노 고원. 험악한 화산지형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중앙의 흰 부분은 분출된 유황이 쌓인 곳이며 그 바로 뒤에 큰 화구호가 보인다. 사진 파일 제작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화면 안에도 화구호가 몇 개나 된다고 한다. 사진 출처: Tsuda의 작품. Flickr Creative License 이미지. https://www.flickr.com/photos/tsuda/8337231944
에비노 고원의 두 얼굴. (왼쪽) 야쯔시로 방면에서 바라다 본 에비노 고원과 가라쿠니다케. 산기슭에 자리한 평화로운 들판으로 보인다. 사진 출처: STA3816의 작품. Wikimedia Commons Creative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bino_Plateau03n4592.jpg (오른쪽) 가라쿠니다케 방면에서 내려다 본 에비노 고원. 험악한 화산지형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중앙의 흰 부분은 분출된 유황이 쌓인 곳이며 그 바로 뒤에 큰 화구호가 보인다. 사진 파일 제작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화면 안에도 화구호가 몇 개나 된다고 한다. 사진 출처: Tsuda의 작품. Flickr Creative License 이미지. https://www.flickr.com/photos/tsuda/8337231944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이 일대에서 가야의 흔적을 찾았던 이종기가 이 부분도 확인해주고 있다. 야쯔시로에서 자동차로 두어 시간이면 에비노 고원에 도착한다. 표준고도 1200미터, 곳곳에 유황 냄새 풍기는 화산 증기를 뿜어대고 있는 위험한 지형의 땅이다. 이종기는 처음 접하는 화산지형의 경관에 ‘조선민담집’에서 봤던 ‘에비야 벌판 전투’ 이야기를 떠올린다.

“까마득한 먼 옛날, 일본 땅에 쳐들어갔다가 참패 당했다는 한국 군사는 가락국 사람들이었겠구나!”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서 전투의 승리를 거둔 사례는 세계사에 수많은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소설 ‘삼국지’에서 조조의 군사를 유인, 협곡의 함정에 빠트렸던 제갈공명의 전략부터 지형지세를 잘 이용해 나폴레옹군의 공격을 버텨내고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했던 웰링턴 장군의 워털루 전투에 이르기까지.

(왼쪽) 천문도를 펼쳐놓고 작전을 상의하는 제갈량과 유비의 이미지. 천문과 지리를 숙지하는 것은 고대사회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일로 간주되어 왔다. 사진 출처: Kanegen의 작품. Flickr creative License 이미지. https://www.flickr.com/photos/kanegen/2904241075   (오른쪽) 지쳐가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웰링턴 장군. 그는 전력이 불리한 상황에서 지형을 잘 이용, 지구전을 통해 승리하면서 나폴레옹의 파워에 마지막 일격을 날렸던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 출처: 퍼블릭 도메인
(왼쪽) 천문도를 펼쳐놓고 작전을 상의하는 제갈량과 유비의 이미지. 천문과 지리를 숙지하는 것은 고대사회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일로 간주되어 왔다. 사진 출처: Kanegen의 작품. Flickr creative License 이미지. https://www.flickr.com/photos/kanegen/2904241075 (오른쪽) 지쳐가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웰링턴 장군. 그는 전력이 불리한 상황에서 지형을 잘 이용, 지구전을 통해 승리하면서 나폴레옹의 파워에 마지막 일격을 날렸던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 출처: 퍼블릭 도메인

에비노 고원은 충분히 그런 에피소드를 낳을 만한 지형을 갖추고 있다. 규슈 서북쪽 평야지대에서 활화산인 기리시마 연산지대에 사이에 위치한 고지 평원. 좀 떨어져서 보면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황 증기를 뿜으며, 땅이 푹푹 꺼져 들어가는 사이노가와라 협곡 같은 지형이 군데군데 숨어 있는 곳이다. 가라쿠니다케는 그 고원 끝 병풍 같이 둘러선 산지에서 가장 정상에 위치한 요새와도 같다.

가락국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와 평야지대를 장악했다면,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가라쿠니다케 쪽으로 도피했을 것이다. 활화산 지형이라 해서 늘 대규모 폭발이 있는 건 아니니까, 현지 사람들은 안전한 곳을 골라 산으로 오르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가락국 사람들은 구마가와 강을 타고 에비노 고원 앞까지 와서는 더 이상 진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코 앞에 있지만 점령이 안 되는 높은 화산봉우리를 가락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래 봤자 저것도 가락국산이다.” 이런 말을 내뱉고 싶은 마음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해서 곳곳에 가락국 영토가 있는 땅에서 유독 이 봉우리가 ‘가락국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을 거라는 추정도 해볼만 하다.

그런 세월 속에서 가락국 사람들은 전력을 모아 이들 산에 숨은 집단을 소탕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시점이 오게 됐을 것이다. 원주민 게릴라들도 회심의 일전을 각오하고 산에서 내려와 에비노 고원 입구에서 가락국 병사를 마주했을 것이다. 너른 평원에서 대격돌이 벌어졌을 것이다.

지형을 잘 아는 원주민 병사들은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을 테다. 전투에 진지하게 임하는 척하다가 퇴각하면서 가락국 병사들을 유인했을 것이다. 한참 맞붙어 싸우다가 한쪽이 밀리기 시작하면, 상대방은 신이 나서 앞 뒤 안 보고 그 뒤를 쫓게 마련이다. 그렇게 전선은 점점 에비노 고원에서도 위험한 지형이 있는 위쪽으로 이동해갔을 것이고, 어느 순간 지형을 잘 모르는 쪽이 결정적으로 함정에 빠지게 됐을 것이다.

물론 이 한 건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해서, 그 때문에 가락국 국세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락국을 위시한 전기 가야동맹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해양대국이었고, 야쯔시로를 비롯한 구마모토 일대의 원주민들과는 전력면에서 비교가 될 정도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전통사회의 전쟁에서는 군사의 사기가 아주 중요하다. 생각지도 않게 큰 타격을 입은 편은 그로 인해 상당히 기세가 꺾이게 된다. 한편 불리한 전력으로 큰 승리를 거둔 집단은 의기양양하게 그 스토리를 후손에게 대대로 들려주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 스토리를 내놓고 전해주기는 싫은 마음이 있었다면? 즉 그렇게 외부인들이 자기 땅 깊숙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집단기억 속에서 지우기를 원했다면?

그 부분의 기억은 변형돼서 전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규슈 산에서 사는 원숭이가 강가에서 원주민들에게 해를 끼치던 가랏빠를 물리치는 스토리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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