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서 포즈를 취한 쑤즈량 관장.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서 포즈를 취한 쑤즈량 관장.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5월 19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 참석차 방한한 쑤즈량(蘇智良) 상하이사범대 교수는 중국에서 손꼽히는 위안부 연구의 일인자다. 중국 위안부문제 연구센터의 초대 주임(센터장)으로, 중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의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발견됐다. 그가 밝혀낸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만 166곳에 달한다.

쑤즈량 교수는 지난해 12월 개관한 난징(南京) 리지샹(利濟巷)의 위안부기념관을 만드는 데도 공을 세웠다. 난징 리지샹 위안부기념관은 일본군 위안소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난징 리지샹의 옛 위안소 자리에 만든 위안부기념관이다. 중국 최초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위안부기념관으로, 연면적 3000㎡의 2층짜리 건물에 1600여점의 위안부 관련 사진과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쑤즈량 교수는 리지샹 위안부기념관 개관과 함께 초대 관장을 맡아 왔다.

쑤 교수에 따르면, 난징은 중일전쟁의 참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은 항일전쟁의 중심지였다.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난징에서 전무후무한 대학살을 자행했다. 중국 측은 “30만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일본군이 주둔한 터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음은 불문가지. 지금 위안부기념관이 있는 리지샹은 장제스의 집무실이 있던 ‘난징총통부’ 바로 앞이다. 지금도 난징 시내의 가장 중심부에 해당한다.

쑤 교수는 이곳 위안소의 존재를 밝혀낸 인물이다. 쑤 교수가 난징의 리지샹 위안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98년이다. 2층짜리 8개동의 위안소가 한곳에 모여 있는 거대 위안소였다. 리지샹 위안부기념관을 설립하기까지는 북한 출신의 위안부 박영심 할머니의 역할이 컸다. 2006년 작고한 박영심 할머니는 임신한 위안부 포로 사진의 주인공. 박영심 할머니는 2003년 난징을 방문해 자신이 처음 끌려간 리지샹 2호 ‘동운(東雲)위안소’의 19번방을 비롯해 관련 사실을 생생히 증언했다. 쑤즈량 교수는 “리지샹 위안소에는 대부분 식민지 조선의 위안부들이 있었다”며 “일본군은 적국인 중국인 위안부들은 안전문제 등을 염려해 주로 외곽에 배치했다”고 말했다.

이후 쑤 교수는 난징시 정부와 무려 11년간의 담판을 벌여서 1억위안(약 180억원)의 투자를 이끌어냈다. 개발가치가 높은 시내 한가운데의 낡은 위안소 건물을 방치해 개발이익을 포기할 지방정부는 드물다. 기존 입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하지만 난징시 정부는 11년간 이어진 쑤즈량 교수의 끈질긴 설득에 2014년 11월, 리지샹 위안소를 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다. 그리고 2015년 12월 일본군의 위안부 개입을 생생히 증언하는 아시아 최대의 위안부기념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리지샹 위안부기념관은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결정적 증거들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몇몇 유물은 일본군 개입에 대한 증거로서 그 가치가 높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일본군이 위안부들에게 소독제로 보급한 ‘과망간산칼륨’. 쑤 교수는 “물에 몇 방울 타면 붉게 변하는 과망간산칼륨은 성병 예방 등을 위해 살균제로 사용한 약품”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일본군 군의관들이 위안부들을 진료할 때 사용한 ‘내진 도구’를 비롯 ‘돌격일번(突擊一番)’이라고 적힌 콘돔, ‘성비고(星秘膏)’란 성병 예방용 연고도 전시물로 소장 중이다. 쑤즈량 관장은 “콘돔은 당시 일본군의 전략 물자”로 “성병(性病) 예방을 통해 일본군의 전투력 약화를 막기 위한 물건”이라고 했다. 모두 일본군 위안부에 조직적으로 관여했음을 생생히 증언하는 증거다.

쑤 교수는 “위안소 운영에 일본군이 관여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했다. 위안소의 소유 형태로 보면 일본군 직영, 일본인, 한인, 중국인에 의해 운영됐지만, 사실상 일본군의 직접 관리감독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군이 퇴역 군인에게 사업밑천과 건물을 빌려주고 위안소 운영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매주 정기적으로 위안부의 성병 검사까지 실시했다. 그는 “일반적인 기생집과 다른 것은 일본 군인과 일본인만 출입이 가능했다는 점”이란 말도 덧붙였다.

돌격일번 콘돔과 성비고 연고.
돌격일번 콘돔과 성비고 연고.

난징서만 위안소 50곳 발견

원래 쑤 교수의 전공은 중국 근현대사다. 그가 펴낸 책도 ‘상하이 흑사회(黑社會·조직폭력) 연구’ ‘중국 독품(毒品·마약)론’ 등이다. 위안부에 본격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1991년 도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부터다. 한 일본인 학자가 “일본군 첫 위안소가 상하이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느냐”고 그에게 물어본 것. 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못했다. 그 후 쑤 교수는 무서운 집념으로 위안부 연구와 위안소를 찾아내는 데 진력했다. 그 결과 쑤 교수가 상하이에서 찾아낸 위안소만 166곳이다. 난징에서도 모두 50곳의 위안소를 찾아냈다. 쑤 교수는 “한 위안소의 방에는 일본 후지산의 목제 조각도 있었다”고 했다.

사실 위안부 문제는 중국에서 그리 인기 있는 연구주제가 아니다. 일례로 한국의 위안부 생존자는 모두 42명인 데 반해, 중국의 위안부 생존자는 21명에 불과하다. 중국의 전체 인구를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쑤즈량 교수는 “그만큼 위안부에 대한 조사가 덜 됐다는 것”이라며 “전체 중국인 위안부 규모와 위안소 현황도 아직 정확한 통계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먹고살 만해진 지금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상태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 이슈가 되자, 중국에서는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클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생존 위안부 할머니를 지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한·중 양국 간 연대 움직임도 활발하다. 위안부를 주제로 한 한국 영화 ‘귀향’의 중국 수출 논의와 함께, 한·중 합작으로 민간 복지기금을 만들어 생존 중국 위안부 할머니의 생활비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현재 한국계 화장품 유통기업인 ‘e메이상청’을 비롯해 칭화대 제1부속병원 등이 참여의사를 밝힌 상태다. 복지기금은 쑤즈량 교수의 관리하에 운영될 예정이다. 쑤 교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 참여하는 등 선봉에 서 있었다. 쑤즈량 교수는 “중국 정부는 그간 중·일 우호를 고려해 위안부 문제해결에 소극적이었다”며 “지금은 난징시 정부가 위안부기념관을 설립하는 등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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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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