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서태후

“박근혜는 자희(慈禧)태후(서태후·西太后) 사망 이후 104년 만에 동아시아에 처음으로 여성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2011년 말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자 중국의 한 인터넷 매체가 이런 글을 올렸다. 통칭 ‘서태후’로 불리던 청나라 자희태후는 청나라 말기를 마음대로 농단(壟斷)하다가 1908년에 사망했다.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해 기초가 흔들리던 청나라는 서태후가 죽은 지 3년 만인 1911년에 왕조의 멸망을 맞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74세에 병사한 서태후가 이런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차후로는 여인이 국정(國政)에 간여하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라. 이는 우리 청조(淸朝)의 가법(家法)에도 어긋나는 일이니 엄격한 제한을 가하여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도록 하라.”

서태후가 자금성(紫禁城)에 들어간 것은 17세 때이던 1852년이었다. 서태후는 함풍제(咸豊帝)의 비빈(妃嬪)으로 자금성에 들어간 지 4년 만인 1856년 함풍제의 장남인 애신각라 재순(愛新角羅 載淳)이라는 아들을 낳아 동치제(同治帝)의 생모가 됐다. 만주족이 세운 청조의 황제들은 모두 ‘금(金)’이라는 뜻을 지닌 ‘애신각라’라는 성을 갖고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지 5년 만인 1861년 함풍제가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 자희(慈禧)’라고 불린다. 청조의 황실에서 첫째 태후는 자금성의 동쪽에 거주하기 때문에 ‘동태후’, 둘째 태후는 서쪽에 거주하기 때문에 ‘서태후’라고 불렸다.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얼마 후 서태후는 동태후이던 자안(慈安)태후와 힘을 합해 8명의 고명대신들을 주살하고 자안태후와 함께 이른바 ‘이궁수렴(二宮垂簾)’ 체제를 형성한다.

1875년 불과 열아홉 살의 동치제가 세상을 뜨자 서태후와 동태후의 양궁(兩宮) 수렴청정 체제는 동치제의 조카를 내세워 함풍제의 뒤를 잇게 하고, 연호를 광서(光緖)라고 칭한다. 동서 양 태후의 수렴청정 시대는 1881년 동태후 자안(慈安)이 세상을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청나라 천하는 서태후 한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서태후는 8년 뒤인 1889년 짐짓 정권을 광서제(光緖帝)의 손에 쥐여주는 척하기 위해 베이징 한가운데의 자금성을 떠나 베이징 북서쪽의 이화원(頤和園)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러나 이화원 거주 9년 만인 1898년 청나라를 개혁하려던 개혁운동가들이 자신에 대한 살해음모를 모의한 사실이 발각되자 이른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켜 개혁세력을 숙청하고 1900년 다시 광서제에 대한 수렴청정을 실시한다. 그러다가 1908년 광서제가 죽자 서태후는 불과 세 살의 애신각라 부의(溥儀)를 황제로 내세우고 또다시 수렴청정을 하려 했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은 법. 세 살짜리 부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바로 다음 날 오후 5시 서태후는 권력과 부를 내려놓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 살짜리 푸이가 지탱하고 있던 청왕조는 1911년 쑨원(孫文)이 이끄는 개혁세력에 무너져 1644년부터 267년간 지속되던 왕조의 문을 닫았다.

남편인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1861년 이후 1908년 사망할 때까지 37년간 청 황실을 좌지우지하다가 마침내 청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서태후의 통치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자금성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함풍제의 아들을 낳아 다음 황제의 생모가 된 서태후는 남편 함풍제가 병약하여 당시의 내우외환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자신의 뛰어난 붓글씨 솜씨로 함풍제가 구술하는 교지를 대필하고 옥새 인장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함풍제는 얼마 안 가서 아예 서태후에게 당시 국정에 대한 견해를 발표할 수 있도록 윤허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1860년 청 황실은 베이징을 침공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을 피해 만주족의 본거지인 열하(熱河 ·지금의 청더承德)로 몸을 피했다. 함풍제는 1861년 8월 피란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함풍제는 숨을 거두기 전에 동치제의 배다른 아들들 8명에게 동치제를 보좌하도록 하면서, 이들과 서태후를 상호 견제하기 위해 황제의 옥새를 똑같이 2개를 만들어주는 실수를 범했다. 이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은 물론이요, 동태후와 힘을 합해 동치제의 배다른 아들들 세력을 거세한 서태후는 동태후와 이른바 ‘양궁 수렴청정’ 체제를 구축한다.

나중에 혼자 수렴청정을 하는 복을 누린 서태후는 자신이 황제의 권력에 관심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걸핏하면 “이화원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말했다. 해군 전함을 사서 일본과 서양세력에 대비해야 할 예산을 빼돌려 베이징 북서쪽에 지금의 이화원을 만들어 놓았다. 이화원의 거대한 호수는 인공으로 판 것이며, 판 흙을 뒤편에 쌓아올려 산을 만들어 놓았다.

서태후는 결국 60세 생일 다음해인 1895년 청일전쟁에 임하던 청의 북양(北洋)함대가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의 류궁다오(劉公島) 해군기지에서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는 꼴을 보게 됐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류궁다오의 해군기지 기념관에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과 일본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종전협정인 시모노세키조약에 도장을 찍는 모습의 밀랍인형들이 전시돼 있다.

중국공산당의 세상인 지금 이화원을 구경하면 중국인 안내원들은 침을 튀겨가며 서태후의 죄상을 낱낱이 설명해준다. “서태후는 매일 밤 환관 옷을 입은 남자들을 이화원 안으로 끌어들여 환락의 밤을 보내고는 다음 날 아침 자신의 머리를 빗기게 하고 손에 머리카락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남자들의 목을 잘랐다. 그 사실을 안 어느 남자가 서태후의 머리를 빗으면서 머리카락을 재빨리 소매 안쪽에 감춰 목숨을 건졌는데, 그 가짜 환관이 나중에 프랑스 발전기를 이화원에 설치하고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오색등을 설치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떼먹었다.”

2011년 박근혜 후보 당선 때 중국 사람들이 강조한 ‘서태후 이후 104년 만에 처음으로 동아시아의 여성 지도자가 된다’는 말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서태후의 저주’였던 셈이다. 박근혜의 실패 때문에 또다시 앞으로 100년 넘게 동아시아에서는 여성 권력자가 탄생하는 일은 없게 될까.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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