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 27일 한국외대생 임수경(가운데 한복 입은 여성)과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기 직전의 모습. ‘임수경 밀입북’은 대학가 주사파의 기획으로 이뤄졌다. ⓒphoto 조선일보
1989년 7월 27일 한국외대생 임수경(가운데 한복 입은 여성)과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기 직전의 모습. ‘임수경 밀입북’은 대학가 주사파의 기획으로 이뤄졌다. ⓒphoto 조선일보

2016년 12월 20일 박정희 대통령기념재단 앞에서 좌파단체의 시위와 협박이 있었다. 이들은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의 폐쇄를 요구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본 육사 출신의 친일파이며, 이 기념관은 친일파 박정희를 미화하고 있다며 서울시는 이곳을 없애버리고 시민을 위한 개방공간으로 만들라”고 요구했다. 좌익들이 세칭 촛불민심에 편승해 드디어 박정희 대통령을 정조준하기 시작한 것이다.

좌파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을 들여 초호화판 기념관과 시설을 짓고 일대를 민주화의 성지로 만들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끼친 공헌은 김대중과는 비교조차 어렵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가해지는 이들의 무례함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던 숙명과도 같았던 우리 민족의 절대적 가난을 우리 운명 속에서 지우고자 평생을 노력한 사람이 박정희다. 그는 마침내 역사의 제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산화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은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토록 수모를 당하고 있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 지하서클에서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물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국민윤리 교과를 통해서다. 박정희의 유신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 대한민국을 보호하고 산업을 발전시킬 최선의 방법으로 배웠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만능이 아니며 한국적 방식으로 소화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고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photo 조선일보
고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photo 조선일보

“대학에서 배운 박정희는 민중의 敵”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마주한 박정희 대통령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일제강점기 때 그는 일본군 육사에 들어가 일본 관동군으로서 독립군을 탄압하는 일본의 앞잡이였다. 광복 후 혼란한 틈을 타서 슬며시 공산주의자들에 가담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자신과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을 모두 죽게 만들고 자신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4·19혁명 직후 정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정당성이 없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의지하여 국민을 탄압하던 독재자였다. 일제의 앞잡이가 이제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도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발전을 왜곡시키고 미국과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수탈을 원활하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그 주인만 바뀐 미국의 식민지였다. 미국의 대한민국 식민지화의 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가 이룩한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은 외국의 자본과 이에 결탁한 소수의 재벌들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가는 소수 착취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대다수 민중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결국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노예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 운명이었다. 이것이 내가 대학에 들어가 지하서클에서 배운 박정희였다. 대학에서 다시 마주한 박정희는 민중의 적이었다.

대학에서 새로운 사상과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와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나라였다. 민중을 수탈하는 자본주의와 달리 민중이 주인 되는 나라였다. 착취와 수탈이 없고, 능력껏 일하고 자신이 필요한 만큼 가지는 유토피아였다. 그즈음 북한과 그 지도자 김일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어린 나이에 항일운동에 나서 항일투쟁을 지도한 절세의 영웅이었다. 중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해서 후일 조선 공산당의 효시가 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 박정희와 근본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책에서 배운 것이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이 무너졌다. 그것도 외부의 침략이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낙원에 살던 사람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낙원을 무너뜨린 것이다. 현실 공산주의 나라는 책에서 보던 그런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모든 공산주의 혁명에서 반대파들에 대해 대규모 살육이 진행되었다. 그것도 한 번에 수천만 명씩 그 규모의 엄청남과 방법의 잔인함에 몸서리쳤다. 민중이 주인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당 지도자들에게만 천국인 나라였다.

북한에 대해서도 그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탈북자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결정타는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황장엽 선생이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온 것이다. 황장엽과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북한은 ‘악(惡)의 나라’였다. 300만을 굶주려 죽게 만들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그토록 소리 높여 외치던 인류의 낙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은 어디로 가고 최악의 독재자가 그 자리에 있단 말인가. 내가 이제까지 알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었다. 나는 그들의 선전을 사실로 받아들인 지적 저능아였다. 거짓을 사실로 알고 이를 소리 높이 외친 판단능력이 상실된 문제아였던 것이다.

다시 원점에서 검토해야 했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확신했던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만난 것은 그때였다. 그에 대한 것을 다시 보아야만 했다. 다시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선 그가 이룩한 산업혁명을 다시 보았다. 분명히 사회주의를 동경하던 당시 책들과 선배들의 판단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수탈에 망해 있어야 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가 이룩한 터전 위에 대한민국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진입해 있었다. 모든 제3세계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대한민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립한 제3세계 나라 가운데 산업혁명을 이룩한 거의 유일한 성공 사례가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이었다.

민중들의 삶은 최악의 나락으로 빠질 것이라는 예언은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 대한민국 산업혁명 가운데 성실히 일한 근로자들이 성공하여 중산층으로 도약한 사례들은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도처에 성공 사례들이 넘쳐난다. 누가 박정희를 비난하는가? 그가 이룩한 눈부신 대한민국을 누가 저주하는가? 당신들의 눈에는 대한민국을 향한 세계인의 찬사가 들리지 않는가?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을 숙명처럼 여겼던 우리 민족에게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세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시대적 사명을 안고 그의 길을 간 선구자였다. 그의 영전에 죄인의 심정으로 삼가 머리를 조아린다.

이동호 미래한국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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