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왼쪽)과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트럼프는 “닉슨이 내가 대선에 출마하기를 원했다”며 1987년 닉슨한테 받은 편지를 소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왼쪽)과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트럼프는 “닉슨이 내가 대선에 출마하기를 원했다”며 1987년 닉슨한테 받은 편지를 소개했다.

“난 프로그램을 보지 않았지만 아내가 당신이 필 도나휴 쇼에서 정말 잘했다고 얘기하더군요. 알다시피 아내는 정치 전문가입니다. 당신이 언제든 공직에 출마하기로 결정만 하면 승리할 것입니다.”

리처드 닉슨(1913~1994) 전 미국 대통령이 1987년 12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이다. 당시 닉슨 전 대통령은 아내 팻 여사가 토크쇼 ‘필 도나휴 쇼’에 출연한 부동산 사업가이던 트럼프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면서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써서 트럼프에게 보냈다.

트럼프는 2015년 11월 폭스 뉴스와 인터뷰하면서 닉슨 전 대통령의 편지를 들고나와 그 내용을 소개했다. 트럼프는 “닉슨 전 대통령이 내가 대선에 출마하길 원했다”면서 “백악관에 들어가면 집무실에 편지를 전시해 놓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닉슨 대통령은 1974년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의회로부터 탄핵되기 전 대통령직을 자진 사퇴했다. 비록 불명예 퇴진이기는 했지만 닉슨은 정치인으로서 안목이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트럼프는 당시 인연으로 닉슨 일가와 가까운 사이다. 트럼프는 닉슨 전 대통령의 외손자 크리스토퍼 닉슨 콕스를 중국 주재 미국대사로 고려하기도 했었다. 닉슨 대통령의 고문을 지낸 공화당 선거전략가 로저 스톤도 트럼프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고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흔히 닉슨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옛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수교의 발판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닉슨은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으로선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전격 방문했다.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 당시 국민당을 지원했고 한국전쟁 때는 중국의 맞상대였던 미국의 국가최고지도자가 ‘적국’인 중국을 방문한 것이었다. 닉슨은 중국 국가최고지도자인 마오쩌둥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른바 ‘상하이 코뮤니케(공동성명)’에 합의했다. 이 공동성명에는 평화공존원칙에 입각하여 패권 추구에 반대하고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천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과 중국인 자신에 의한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 필요성을 인정했다. 양국의 수교는 닉슨이 낙마하면서 시기가 다소 늦춰졌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1975년 12월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후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78년 12월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발표했고, 양국은 1979년 1월 1일을 기해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다.

트럼프가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틸러슨 엑슨모빌 CEO(오른쪽)가 2012년 6월 러시아 석유회사 로스네프트와의 계약 서명식에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트럼프가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틸러슨 엑슨모빌 CEO(오른쪽)가 2012년 6월 러시아 석유회사 로스네프트와의 계약 서명식에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키신저의 트럼프 칭찬

닉슨은 베트남전쟁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국경·이념 분쟁을 벌여온 중국과 수교한다는 전략을 추진했었다. 닉슨은 이를 위해 중국이 견지하는 ‘하나의 중국’이란 원칙에 동의하면서 대만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했다. 중국도 미국 대신 소련을 제1의 가상 적(敵)으로 간주하면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했었다. 닉슨의 중국 전략은 당시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후 국무장관 역임)이 마련한 것이었다. 키신저는 1971년 7월 중국을 극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고,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으며, 1979년 미·중 수교를 견인한 막후 주역이었다.

미국 최고의 전략가란 말을 들어온 키신저(93)가 최근 트럼프 당선인을 이례적으로 칭찬했다. 키신저는 지난 12월 18일 CBS방송의 뉴스 시사 프로그램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해 “트럼프 당선인이 매우 중요한 외교 이슈를 많이 제기했다”면서 “그것이 적절히 다뤄진다면 좋은, 대단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키신저의 이런 언급은 트럼프 당선인의 ‘하나의 중국 원칙’ 폐기 시사 발언과 친(親)러시아 성향인 렉스 틸러슨 엑슨모빌 최고경영자(CEO)를 국무장관에 발탁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키신저는 또 “트럼프 당선인이 던지는 낯선 질문들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풀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트럼프 당선인은 역사에 매우 중요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키신저는 틸러슨 국무장관 내정자에 대해서도 후한 점수를 줬다. 키신저는 “그가 러시아와 너무 친하다는 주장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 “러시아와 친하지 않았다면 엑슨모빌 대표로서 쓸모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키신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트럼프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있는 모든 의무 하나하나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키신저는 미국 대선을 전후해 트럼프 당선인에게 외교 조언을 해왔다. 또 트럼프 당선인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연쇄 회동하며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 당선인이 키신저가 45년 전 예상했듯이 러시아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키신저는 미·중 관계 개선에 나서기 위해 중국 방문을 앞두고 닉슨에게 “20년 안에 당신만큼 현명한 계승자가 나와 중국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에 기우는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키신저는 “파워게임의 균형을 냉철히 바라봐야 한다”면서 “당장은 러시아를 바로잡고 채찍질하기 위해 중국이 필요하겠지만 미래엔 반대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키신저의 ‘선견지명(先見之明)’처럼 트럼프 당선인은 일종의 ‘역(逆·reverse)닉슨’ 전략을 외교·안보 정책으로 삼는 듯하다. 리버스 닉슨 전략은 한마디로 말해 ‘연아제화(聯俄制華)’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손잡고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다. 닉슨의 ‘중국과 연대해 소련(러시아)을 견제한다’는 ‘연화제아(聯華制俄)’ 전략의 반대를 말한다.

트럼프 당선인이 차기 정부 외교 사령탑인 국무장관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틸러슨을 지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신의 한 수’라고도 볼 수 있다. 세계 최대 에너지 기업이자 미국 최대 석유업체인 엑슨모빌에서만 41년간 일해온 틸러슨 내정자는 전형적인 오일맨이다. 특히 틸러슨 내정자는 푸틴 대통령과는 지금까지 17년간 인연을 맺어왔다. 틸러슨은 미국에서 푸틴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인사라는 말까지 들어왔다. 엑슨모빌이 그동안 북극해 자원 개발 등 러시아의 유전과 가스전 개발에 적극 투자해온 것도 이런 친분 관계가 상당한 매개가 됐다. 푸틴 대통령은 2013년 틸러슨에게 러시아의 자원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우정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우정 훈장은 러시아 정부가 외국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위 훈장이다. 틸러슨은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병합에 따른 미국과 유럽연합의 러시아 경제제재에 반대해왔다. 트럼프 당선인이 틸러슨을 국무장관 자리에 앉힌 것은 친러시아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틸러슨의 국무장관 발탁에 대해 “트럼프가 러시아와 진정으로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걸 보여준 신호”라고 분석했다. 국무장관은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하는 핵심이자 각국과의 협상을 주도하는 대표로, 어떤 인물이 국무부를 이끄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트럼프는 친러시아 성향인 마이클 플린 전 국방정보국장을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으로 내정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병합 이후 극도로 악화된 상태이다. 양국은 그동안 시리아 내전, 나토의 동진, 미사일 방어체제, 핵 군축 등에서 사사건건 대립해왔다. 이 때문에 양국 관계는 ‘신냉전(New Cold War)’에 빠졌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동안 푸틴 대통령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러시아와 관계 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혀왔다. 트럼프와 푸틴은 대선 과정에서 서로 호감을 표시해 ‘브로맨스’(bromance·남성 간 친밀한 관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브로맨스는 형제(brother)와 로맨스(romance)를 합한 신조어다. 푸틴은 트럼프를 “재능 있는 사람”으로, 트럼프는 푸틴을 “위대한 지도자”로 불렀다.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헨리 키신저.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헨리 키신저.

러시아와 연대해 중국을 제압한다

트럼프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이유는 무엇보다 IS를 격퇴하기 위해서이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손을 빌려 IS를 소탕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미국이 나토의 방위비를 지나치게 부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러시아와 관계가 좋아질 경우 나토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군비를 투입할 필요가 없다. 트럼프의 속셈은 러시아와의 밀월관계를 통해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의 향후 외교·안보 노선은 지금까지 상황으로 볼 때 중국에는 압력을 가하고 러시아와는 해빙 무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 7월 폭스뉴스 시사 토크쇼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수없이 들었는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렇게 되도록 방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와 갈등을 빚어 결과적으로 중·러 밀착을 도왔다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트럼프는 미국과 대만이 단교한 이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전화 통화를 해 중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심지어 트럼프는 중국이 핵심이익이라고 주장해온 하나의 중국 원칙 폐기 가능성을 서슴없이 언급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지난 12월 11일 폭스뉴스 시사 토크쇼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만, 우리가 왜 하나의 중국 정책에 얽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미국은 중국의 통화 평가절하와 미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 부과, 남중국해 대형 요새 건설로 피해를 보고 있는데 중국은 이런 것들을 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특히 트럼프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중국은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는데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면서 중국을 비난했다. 이런 발언의 맥락으로 볼 때 중국이 미국에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은 중국이 가장 민감해 하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폐기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중국에 보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 대륙과 대만·홍콩·마카오 등을 모두 중국의 영토로 보고, 이 중 오직 중국만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닉슨을 비롯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이 원칙을 양국 관계의 기초로 인정해왔다.

중국은 트럼프 차기 정부가 ‘친러 반중’ 외교·안보 전략을 추진할 경우 러시아와의 관계에 균열이 생길 것을 우려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다른 모든 나라를 제치고 러시아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푸틴 대통령과 지금까지 20차례 이상 만났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침공으로 경제제재를 받고 있던 2014년에는 4000억달러어치의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30년간 도입하는 초대형 계약으로 측면 지원에 나섰다. 그 결과 중·러는 북핵 문제와 사드 문제, 시리아 문제 등에서 한목소리를 내며 미국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중국은 트럼프의 새로운 외교·안보 전략으로 이런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해외판 SNS인 ‘협객도(俠客島)’는 ‘트럼프, 연아제화(聯俄制華)에 나서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선 기간 내내 러시아와 관계 회복을 공언했던 트럼프가 앞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구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미치광이 이론이 노리는 것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트럼프가 닉슨의 ‘미치광이 이론(Madman Theory)’에 따라 예측불가의 전략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치광이 이론이란 상대방에게 미치광이처럼 비침으로써 공포를 유발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전략을 말한다. 닉슨은 대통령 재임 당시인 1969년 유럽과 동아시아, 중동 주둔 미군에 핵전쟁 경계령을 내렸다. 자신은 화가 나면 자제하지 못하고 항상 핵 버튼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는 악성 소문도 퍼뜨렸다. 당시 북베트남(월맹)을 배후 지원하던 소련에 겁을 줘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트럼프가 남중국해 해상에서 미군의 수중드론이 중국 함정에 나포되자 중국에 “훔친 드론을 반환할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은 미치광이 이론의 전형적 수법이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는 예측불허와 전통적 국제규범에 대한 무시라는 자신에 대한 평판을 외교·안보 전략에 활용함으로써 상대국을 불안하게 하고 위협해 양보를 끌어내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트럼프는 닉슨의 외교·안보 전략을 적절하게 차용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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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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