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성형주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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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떠날 수 없었습니다. 10년 동안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신 국민들께 제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지지해준 많은 분들에게 오히려 상처만 드린 것 같아 밤잠을 설치곤 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지난 3월 25일 서울 마포구 소재 한 오피스텔에서 만난 반기문(73) 전 유엔 사무총장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10년간 세계를 누볐던 그가 입국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이처럼 조용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2월 1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반 전 총장은 가급적 공개활동을 자제해왔다. 그는 “지난 1월 12일 귀국 후 약 20일간 대선후보로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며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3월 24일 미국 보스턴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국가원수급에게 제공하는 초빙교수직을 제안해와 이를 수락했다. 그가 대선 불출마 선언 직후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현실도피’라는 지적과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의 말이다. “미국으로 떠난다는 내게 ‘현실 도피’라는 지적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부 정치권 인사는 나를 ‘보수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정말 속이 상했다.”

그는 하버드대에 가는 일정을 연기했다. 그의 한 측근은 “반 전 총장이 5월 9일 대선 때까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다”고도 했다.

“미국에 가는 문제를 두고 참모들과 회의를 했고 주변 지인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대부분 ‘예정대로 떠나시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내키지 않았다. 내가 이대로 훌쩍 떠난다면 다시 한국 땅을 밟을 때 국민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를 고심했다. 내게 기대했던 많은 분들이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데, 내가 그분들을 제대로 위로한 적도 없지 않은가. 내 생각이 부족했다고 느꼈다.”

“내 생각이 부족했다고 느꼈다”

반 전 총장은 사실 미국으로 떠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보낸 이삿짐 일부는 현재도 선박편으로 태평양을 건너오는 중이었다. 귀국 후 대선후보로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는 바람에 사당동 자택의 정리도 마치지 못했다고 했다. “손님이 오면 창피할 정도로 집이 엉망이다. 풀지 못한 짐이 쌓여 있고 그나마도 일부는 아직 한국에 도착하지 않았다. 아내와 상의한 후 하버드대에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하버드대 초빙교수직을 제안받은 건 2016년 초였다. 하버드대 측은 임기가 1년도 안 남은 그에게 퇴임 후 3개월간 초빙교수로 와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그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을 하버드 측에 전달했다. 이 시기 그는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30%를 넘나들며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경 하버드대에서 그에게 다시 연락을 해왔다. “미국을 떠나기 전 하버드대에 ‘내가 한국에 가면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랬더니 하버드대 측도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충분히 이해한다’는 답을 줬다. 그 뒤로는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나니까 다시 하버드대에서 연락이 왔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수락했다. 3개월 정도 하버드대에 있으면서 자서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버드대 초빙교수직은 국가원수급에게 제안되는 자리로 알려졌다. 펠리페 칼데론 전 멕시코 대통령과 타야르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이 이런 절차를 밟아 하버드대에서 초빙교수로 있었다. 하버드대는 이들에게 주택, 개인비서, 연구실 등을 제공한다. 그 대신 초빙교수는 하버드대 교수와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차례 강연을 해야 한다.

그가 하버드대 초빙교수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사전에 하버드대와 말을 맞춰놓은 게 아니냐” “한국에 들어와 정치 한번 해보려다 안 되니까 도망가는 거냐”는 식의 비판이 제기됐다. 그는 이에 대해 “미국에 있는 한 블로거가 이 사실을 처음 보도했는데, 그때 잘못된 내용이 많았다. 종신교수로 간다거나,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는 바람에 많은 오해를 받았다”고 말했다.

불출마 선언 후 3개월 과정 초빙 수락

그는 하버드대에 일정 연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하버드대에서는 일정 연기를 공식적으로 밝히기보다, 그냥 알려진 것 정도로 하자고 했다. 내 개인 사정을 많이 고려해준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의 역할이 없더라도 한국에 남아 주변 분들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 등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그는 미국행 보류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론 지난 1월 자신의 정치적 행보가 미숙했음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지난 1월 대선행보는 일정이 너무 많았다. 뭘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20일 정도 하면서 살펴보니까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월 1일 새벽에 일어나 불출마의 변을 직접 작성했다.”

“‘박연차 의혹’ 보도 법적조치 할 것”

반 전 총장은 이번 대선에서 누군가를 도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는 “내가 밀고 싶은 대선후보는 아직 없다. 여기저기서 만나자는 연락이 많이 오지만 안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주변에서는 아직도 “반 전 총장이 직접 다시 나와야 한다. 기울어진 대선판에서 역할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왜 그만뒀냐. 다시 나오시라’는 말을 한다. 집사람은 그때마다 ‘그만둔 사람에게 하는 덕담으로 이해하시라’고 조언한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무얼 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내게 역할이 주어진다면 그걸 피할 생각은 없다. 나는 국민들께 빚을 많이 진 사람이다.”

그는 최근 장애인 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거나 위안부 관련 단체 등을 만나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반 전 총장은 지난해 말 시사저널이 보도한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23만달러 수수 의혹’ 기사에 대해 “한 푼도 받은 일이 없다. 때가 되면 법적조치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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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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