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람 신임 홍콩 행정장관 ⓒphoto 뉴시스
캐리 람 신임 홍콩 행정장관 ⓒphoto 뉴시스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주권이 중국에 반환됐다. 홍콩은 중국의 SAR(Special Administrative Region·특별행정구)로, 행정수반은 ‘행정장관’이라고 부른다. 올해로 주권반환 20주년을 맞는 홍콩에 제5대 행정장관이 선출됐다. 광둥(廣東)어(Cantonese) 이름은 람쳉 위에트오(林鄭月娥), 영어명은 캐리 람(Carrie Lam). 1957년 홍콩 완차이(灣仔) 출생으로, 아버지는 대륙 저장(浙江)성 출신의 노동자였다.

캐리 람은 지난 3월 26일 실시된 행정장관 선거위원회 위원 1194명이 투표하는 간접선거에서 777명(65.07%)의 지지를 얻어 5년 임기 행정장관에 당선됐다. 람은 홍콩의 중립지 명보(明報)가 3월 16~20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32.1%의 지지를 받아 2위에 머물렀다. 람은 2014년 8월에 벌어진 홍콩 시민·대학생들의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 시위를 강경진압해 1000명의 구속자가 나올 당시 홍콩정청의 2인자 정무사장(政務司長)이었다. 이 일로 람은 750만 홍콩 시민들로부터는 거부감을, 베이징(北京)의 중국공산당과 정부로부터는 신임을 받게 됐다.

홍콩은 1840년 영국과 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함에 따라 영국의 조차지가 됐다. 화약을 가장 먼저 발명한 중국이지만 15~16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의 결과 과학기술에 뒤진 청의 대포는 바다에 떠 있는 영국의 전함에 가닿지 못한 반면 영국 전함이 발사한 대포는 육상의 청 연안 방어진지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모두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홍콩의 주권을 영국에 넘겨주는 한편 상하이(上海)와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개방항으로 열어주어야 했다.

140년이 흐른 1980년대에 대륙의 통치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鄧小平)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홍콩 주권 반환협상에 나서 ‘일국양제(一國兩制·One Country Two Systems)’를 해결방안으로 제시했다. 주권을 중국에 넘겨주어 외교와 국방권을 장악하게 한 다음 50년간 자치권과 자본주의 경제권을 확보하게 해준다는 방식이었다. 홍콩의 주권은 덩샤오핑 사망 4개월 뒤인 1997년 7월 1일 중국 정부에 넘겨졌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6월 30일 밤에 영국군 국경수비대와 임무교대를 했다.

홍콩의 주권반환은 당초 영국이 희망하던 일이 아니었으나, 대륙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에게 “만약 영국이 홍콩의 주권을 약속대로 반환하지 않으면 홍콩 외곽에서 홍콩 이주를 희망하는 많은 중국인들의 홍콩 입경(入境)을 막고 있는 인민해방군의 경비를 풀어버릴 것”이라고 위협해서 대처 총리는 회담장인 베이징 인민대회당을 걸어나오다 다리가 후들려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던 일화를 남겼다. 인민해방군의 홍콩 외곽 경비를 풀어버릴 경우 수백만 명의 대륙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밀려가 홍콩의 질서는 엉망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홍콩이 완전히 중국의 일부가 되는 것은 1997년 7월 1일부터 50년이 흐른 2047년 7월 1일부터다. 현재 세계에서도 가장 활발한 자본주의 제도의 실험장이 되고 있는 홍콩이 앞으로 30년 뒤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을 채택 중인 중화인민공화국에 완전 편입된다. 현재 자본주의를 향한 제도 전환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중국의 경제시스템이 30년 뒤 홍콩 경제와 통합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지는 세계사적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항상 1등을 하던 캐리 람은 이탈리아계의 세인트 카노시안 칼리지의 홍콩분교에 입학했다가 다시 홍콩대학으로 진학했다. 1980년에 사회과학 학사를 획득한 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홍콩정청의 정무직 공무원이 됐다. 사회복지, 부동산 관리를 하다가 2004년 홍콩·런던 경제무역사무소 소장을 거쳐서 2012년 홍콩특구 정부의 2인자인 정무사장으로 취임했다.

캐리 람은 2007년 홍콩발전국 국장에 취임한 이후 많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 통치를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인 퀸스피어(Queen’s Pier·황후부두) 철거를 강행해서 베이징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11년에는 대륙에 가까운 신계(新界·New Territory) 지역의 불법 건축물 단속을 잘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홍콩 시민·대학생들의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를 강경진압해 지지율이 하락한 전임 렁춘잉 행정장관이 지난해 12월 연임을 포기하자 지난 1월 정무사장을 사퇴하고 행정장관에 출마해서 사상 첫 여성 행정장관에 선출됐다.

캐리 람은 27세이던 1984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수 중에 이 대학 수학박사인 중국인 람시우포(林兆波)와 만나 결혼했다. 남편 람은 홍콩중문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다 은퇴 후 국적지인 영국으로 갔으나 베이징 사범대학에 자리를 얻어 현재 재직 중이다. 남편과 두 아들은 모두 국적이 영국이지만 캐리 람은 중국 국적이다. 큰아들은 2016년 4월부터 베이징의 자동차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남편 람 교수는 부인 캐리 람의 홍콩 통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로 150년을 지낸 홍콩인들의 아이덴티티는 36년간 일본 식민지를 지낸 우리 국민들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일본은 의심할 길이 없는 제국주의자였지만, 홍콩인들에게는 영국이나 만다린(Mandarin·대륙의 표준 중국어)을 구사하는 중국이나 다 같은 지배자로 인식됐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와 자유로운 입법활동을 보장해주던 영국이 홍콩인들에게는 더욱 지지를 받는 형편이다. 영국에서 귀족들이 총독으로 파견되던 시절에도 홍콩 총독들은 아침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통으로 경호원 없이 조깅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2014년 8월 홍콩 시민·대학생들의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시위는 앞으로 캐리 람 행정장관에게 홍콩의 정치 분위기를 보다 민주적으로 이끌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해주고 있다. 캐리 람은 그러면서도 베이징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이다. 홍콩 최대의 반(反)중국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최근 마윈의 알리바바에 인수되면서 여론의 독립성도 의문시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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