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진 전 사장 ⓒphoto 뉴시스
민영진 전 사장 ⓒphoto 뉴시스

박근혜 정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 등이 민간기업인 KT&G 경영진 퇴진을 압박하고 인사에 개입한 정황이 새롭게 드러났다. 윤석렬 서울중앙지검장이 이끄는 특별수사본부가 KT&G 관련 의혹 규명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담배와 인삼을 생산하는 KT&G는 2002년 공기업에서 민간기업으로 전환됐다. 사장 선임 등 회사의 주요 결정은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KT와 포스코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측근인 최순실의 인사청탁과 민원을 들어준 사실이 드러나 검찰 수사를 받았지만 KT&G의 경우 최순실 측이 손길을 뻗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KT&G 사장으로 앉히는 데 실패한 게 주요 원인이다. 그 때문인지 KT&G 전·현직 사장은 모두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 곤욕을 치렀다. 일부 인사는 구속수감됐다가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반면 최순실의 민원을 수용한 KT 황창규 회장과 포스코 권오준 회장은 올 초 연임에 성공했다.

지난 6월 15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민영진 전 KT&G 사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민간기업인 KT&G 사장을 교체하기 위해 박근혜 청와대의 경제수석실과 민정수석실이 동원된 흔적이 곳곳에서 포착됐다”고 주장했다. 민 전 사장은 또 “안종범 전 수석은 기획재정부 고위인사 A씨 등을 동원해 KT&G 임원을 회유 또는 압박했다. 민정수석실은 검찰이 KT&G에 대해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는 것을 보고도 침묵했다”고 말했다. 당시 민정수석실은 우병우 수석이 이끌었다. 기재부 소속 A씨는 현재 모 부처의 차관으로 재직 중이다. 민 전 사장은 KT&G 사장 재직 시 인사·납품 청탁 등의 명목으로 현금과 명품 시계 등 1억7900만원의 뒷돈을 받고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 기소됐지만 1~3심에서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민 전 사장은 2010년 초 KT&G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이명박 정부 때 사장이 됐다고 해서 “MB맨이냐?”는 말을 들었다. 민 전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임명됐으면 무조건 MB맨이냐”면서 “민간기업은 이사회 절차에 따라 대표를 선임한다”고 선을 그었다. 민 전 사장은 1979년 기술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됐다. 초임 사무관 시절 경제 관련 부처에 재직하던 그는 1986년 전매청으로 자리를 옮겼고 한국담배인삼공사를 거쳐 민영화된 KT&G의 대표에 오른 내부 인사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2013년 초 연임에 성공해 2015년까지 사장으로 있었다.

민 전 사장의 시련은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넘어간 후 시작됐다고 한다. 민 전 사장에 대한 각종 투서와 루머가 나돌기 시작했고 KT&G 주변에서는 “정권이 바뀌었으니 민영진 사장도 곧 교체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민 전 사장은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 이외에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 민간기업 대표를 흔들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검찰은 2015년 초 민 전 사장을 겨냥한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당시 KT&G의 비자금 조성 및 금품수수 의혹이 담긴 첩보를 토대로 민 전 사장을 조사한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민 전 사장이 수십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기사가 검찰발로 쏟아졌다. 그에 대한 검찰 수사는 장장 10개월간 이어졌다. 검찰은 민 전 사장 비서의 처갓집 식구 계좌까지 추적하는 등 KT&G 관련 인사들을 샅샅이 뒤졌다. 민 전 사장은 2015년 7월 “더 이상 회사와 후배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면서 사장직을 내려놨다. 그리고 5개월 뒤 검찰은 금품수수 등의 혐의로 민 전 사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민 전 사장은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약 6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KT&G 후임 사장을 인선하는 작업도 시작됐다. 백복인 부사장을 비롯해 4명의 후보가 최종 심사대상에 올랐다. 여기에는 당시 안종범 전 경제수석과 동문인 B씨와 기재부 출신 C씨 등이 포함됐다. KT&G 사장추천위원회 심의 결과 백복인 후보가 사장으로 낙점됐다. 그러자 기재부 고위 인사가 KT&G 측에 연락해 “이사회를 연기하는 게 어떻겠느냐”면서 사장 인선을 연기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백 사장을 수석부사장으로 하고 사장을 새로 선출하자는 제안이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즈음 이번에는 검찰이 백 사장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민 전 사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KT&G 사외이사를 지낸 인사가 청와대 안종범 수석에게 KT&G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달한 게 사장 교체작업의 발단이 된 것으로 안다. 잘못된 정보를 전해들은 안 수석 입장에서는 외부 인사를 수혈하는 게 KT&G에 이롭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KT&G 이사회가 청와대 측이 염두에 둔 인물을 사장으로 선임하지 않자 후임 사장까지 검찰 수사를 받는 상황을 맞았다.”

민 전 사장은 1심에 이어 2심과 대법원에서도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6월 15일 대법원 2부(주심 김창석)는 “민 전 사장이 인사에 영향을 미칠 직위에 있지 않았고 금품을 전달했다는 관련자 진술도 믿기 어렵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민 전 사장은 2년을 넘게 끌어온 법정 투쟁을 통해 누명을 벗게 됐다. 그러나 그는 검찰 수사와 재판을 거치는 동안 심신에 큰 상처를 입었다. 검찰이 배임수재 혐의 등으로 불구속기소한 백복인 사장도 1심에서 증거부족 등의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민 전 사장은 기자에게 현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검찰 수사는 지독하리만치 힘든 과정이었다. 10개월 동안 탈탈 털어 기소가 됐지만 결국 무죄를 받았다. 나를 수사한 검사는 떳떳하게 생활하고 있다. 반면 나는 누군가에게 아직도 파렴치범으로 오해받는다. 왜 검찰이 이토록 무리한 수사를 진행했는지, 곧 배경이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

공교롭게도 민 전 사장과 백복인 사장에 대한 수사와 기소는 모두 서울중앙지검 김석우 부장검사가 맡았다. 민 전 사장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당시 김 부장검사의 수사지휘는 최윤수 3차장이 맡았다. 최 차장은 국가정보원 2차장을 끝으로 지난 6월 공직에서 물러났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최 차장을 우병우 라인의 핵심으로 분류한 바 있다.

“한 달 안에 KT&G 사건 마무리하라”

안종범·우병우 라인이 KT&G 수사에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과 관련해 민 전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검찰이 청와대 같은 곳의 하명을 받아 KT&G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 게 아니라면, 도저히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일부 변호사들 얘기로는 당시 청와대에서 ‘한 달 안에 KT&G 사건을 마무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말도 나왔다. 검찰의 상명하복은 이해하지만 근거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를 거부했어야 마땅하다.”

최순실이 KT&G 사장 인선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진술이 법정에서 나오기도 했다. 지난 3월 최순실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영수 전 포레카 대표는 “최씨가 KT&G 사장 후보를 알아보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포레카는 포스코 계열 광고대행사로, 최순실 측에서 포레카 지분을 강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이 있다. 김 전 대표는 이날 공판에서 “KT&G 동향을 안종범 전 수석에서 보고했느냐” “안종범 수석이 KT&G 사장을 교체하려는 생각에 관련 내용을 확인했느냐”는 검찰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인정했다. 김 전 대표의 진술대로라면 최순실과 안종범 전 수석이 KT&G 사장 인선에 관여했고 기존 사장 교체를 위해 민정수석실을 동원, KT&G 전·현직 대표에 대한 사정을 지휘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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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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