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방문 첫날인 지난 6월 28일 장진호전투 기념비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photo 연합
미국 방문 첫날인 지난 6월 28일 장진호전투 기념비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photo 연합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서 방미 첫날인 6월 28일(현지시각) 콴티코 미 해병대국립박물관 앞 공원에 지난 5월 4일 설치된 장진호전투 기념비에 헌화한 후 기념 연설을 했다.

“67년 전인 1950년, 미 해병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들이 한국전쟁에서 치렀던 가장 영웅적인 전투가 장진호전투였습니다. 장진호 용사들의 놀라운 투혼 덕분에 10만여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흥남철수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메러디스빅토리호에 오른 피란민 중에 저의 부모님도 계셨습니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를 떠나 12월 25일 남쪽 바다 거제도에 도착할 때까지 배 안에서 5명의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도주의 작전이었습니다. 2년 후, 저는 빅토리호가 내려준 거제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곳에 한 그루 산사나무를 심습니다. 산사나무는 별칭이 윈터 킹(Winter King)입니다.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영웅적인 투혼을 발휘한 장진호전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발간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따르면, 장진호는 개마고원 위를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장진강 중류를 막아 건설된 인공호수로 1934년 일제가 완공했다.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소속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 제8군단과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형성한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그해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제8군은 서해안을 따라, 그리고 제10군과 한국군 제1군은 동해안을 따라 함흥으로 올라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제10군과 한국군 제1군은 장진강을 따라 압록강으로 진출해서 제8군과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군 제10군과 한국군 제1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나선 것이 10월 25일 압록강을 건너 개마고원 일대에 산개해 있다가 장진호 부근에 집결한 중국군 제9병단 소속 7개 사단 규모 병력이었다.

베트남전쟁을 취재해서 퓰리처상(賞)을 탄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2007년에 출판한 ‘가장 추웠던 겨울: 미국과 한국전쟁(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에 따르면, 장진호전투에서 화력장비가 월등한 미군이 중국군에 패배한 원인은 사상 유례없이 영하 40도 부근으로 떨어진 혹독한 추위였다. 일반적으로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한 것으로 알려졌던 장진호 부근에는 그해 혹한이 밀어닥쳤다. 혹한은 미군 탱크와 대포들의 윤활유를 얼어붙게 해 곳곳에서 멈추어 섰고, 결국 소총을 기본으로 한 중국군과 같은 조건이 되고 말았다.

핼버스탬의 ‘가장 추웠던 겨울’은 참전 미군들의 인터뷰를 통해 1950년 여름에서 1951년 봄에 이르는 기간 중의 한국전쟁을 그리고 있다. 책의 앞뒤 표지는 미 해병대 1사단을 따라 장진호전투에 종군했던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이 찍은 사진이 장식하고 있다.

중국 최대의 검색 엔진 바이두(百度)도 장진호전투 당시의 추위를 기록해놓았다. “쑹스룬(宋時輪) 중장이 지휘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제9병단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 동북지방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장진호 부근에서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군 제10군과 만나 17일간의 엄한(嚴寒) 기후조건 아래에서 포위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연합군 병력은 6만5000명 정도였고, 중국군 제9병단은 16만명 정도였다. 동상과 보급부족, 그리고 무기의 열세로 미군의 흥남 방향 철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바이두는 미군이 전쟁 후에 발표한 자료들을 취합해서 2주간의 장진호전투에서 미군 측은 사망 2100명, 포로 300명을 포함해서 1만3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고, 중국군 측은 동사 4000여명을 포함한 전사자 1만1000명에 병력 손실은 5만6000명이었던 것으로 집계했다.

장진호전투의 결과 원산평원 이북의 북한 지역이 중국군에 장악당하게 됐고,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해서 중·북 국경지대로 적을 몰아붙이던 미 10군의 주력이 흥남을 통해 부산으로 빠져나가는 결과가 빚어져서 한국전 전체 전황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바이두는 이 장진호전투에 대해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 후퇴 작전의 성공”이라고 표현했지만, 1950년 12월 11일자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군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패배”라고 표현했고, 뉴스위크도 “미국이 진주만 사건 이래 가장 참혹하게 당한 패배”라고 표현했다고 전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 측은 당시 압록강을 건너 개마고원으로 산개한 중국군을 ‘인민지원군’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사실은 대만 수복을 위해 대만해협 건너 푸젠(福建)성에서 대기 중이던 홍군 정예부대였다는 것을 중국인들 가운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의 해군이 일본군에 패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중국이 장진호전투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장진호전투를 자신의 가족사와 관련 지어서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번 방미를 계기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미국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역사적 사실을 결코 소홀히 생각하지 않도록, 또 한·미 동맹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비치지 않도록 외교 흐름을 잘 끌어나가기를 바란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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