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photo 뉴시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photo 뉴시스

“프로야구에 비유하자면, 20승 이상을 거둔 제1 선발투수 대신 제2 선발투수를 선택한 셈이다. 상대 타선의 특성을 감안해 1선발이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법조인 A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신임 대법원장 후보로 김명수 춘천지법원장을 지명한 것을 두고 이렇게 해석했다. 지난 8월 21일 김 후보자에 대한 청와대 발표가 있기 직전까지 정치권과 법조계에서는 유력한 차기 대법원장 후보로 박시환 전 대법관을 손꼽았다. 박시환 전 대법관은 문 대통령이 지명 의사를 전달했음에도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대법원장 지명을 고사한 박 전 대법관은 유력 후보로 언론에 거론되자 휴대폰을 끄고 사실상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2005년 11월, 그가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대법관 임명장을 받을 당시 문 대통령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관련 업무를 총괄했던 인연이 있다. 박 전 대법관은 법원 내 진보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창립회원이고 이 모임 회장을 지냈다. 우리법연구회는 1988년 2차 사법파동을 계기로 만들어진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 모임 소속 판사들이 정부 및 사법부 요직에 기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 내 사조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2010년 사실상 해체됐다.

박시환 대신 김명수 깜짝 발탁

김명수 후보자는 부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사법고시 25회인 그는 박 전 대법관(21회)의 사시 4년 후배다. 두 사람은 공히 진보성향으로 분류된다. 박 전 대법관이 우리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은 데 이어 김 후보자도 이 모임 회장을 지냈다. 김 후보자는 우리법연구회가 해체된 후 새로운 모임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2011년 6월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재직 당시 동료 판사 38명을 모아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조직,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연구회 회원 수는 현재 400명이 넘는다. 현직 판사가 총 3000명가량임을 감안하면 법원 내 가장 큰 모임이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일부 인사들은 법관 인사, 대법원장 권한 등을 논의하며 법원행정처와 불편한 관계를 보였다. 국제인권법연구회는 지난 3월 불거진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문제제기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모임에는 우리법연구회에 참여했던 상당수 인사가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 회원들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판사들의 성향을 구분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양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해왔다.

자유한국당 정용기 의원은 이와 관련 “김명수 후보자가 활동했던 ‘우리법연구회’라는 판사 사조직은 진보 이념 성향의 판사 모임으로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사법부 내 하나회’로 불렸고 이념 편향적 판결과 패권적 행태로 국민적 지탄을 받고 해체된 적폐조직”이라고 꼬집었다.

김 후보자는 박 전 대법관에 비해 진보적 색채가 더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후보자는 2003년 대법관 제청 문제로 사법파동이 불거졌을 때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있던 양승태 대법원장을 공개석상에서 비판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 후보자는 최근 대법관 인선 과정에서 36명의 후보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포함된 바 있으나 최종 후보에는 들지 못했다.

김 후보자의 판결은 인권을 강조해왔다는 평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노조 인정과 에버랜드 노조 부당해고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노조에 우호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70~1980년대 발생한 간첩조작 사건의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잇따라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주목받기도 했다.

김 후보자가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에 임명되면 법원의 이념이 ‘좌클릭’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는 보수성향의 판사들이 사법부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 대통령이 김 후보자를 대법원장에 지명한 것도 사법부 내부의 세력 교체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문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대법원장을 포함 총 14명의 대법관 가운데 12명의 대법관을 교체하게 된다. 이명박 정부 때 양승태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임명된 대법관들의 임기(6년)가 줄줄이 만료되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7월 문 대통령은 신임 조재연·박정화 대법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지낸 박정화 대법관의 경우 우리법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한 판사로 알려져 있다. 2018년 1월에는 김용덕·박보영 대법관의 임기가 만료되고 8월에는 고영한·김창석·김신 대법관이 교체될 예정이다. 이밖에도 김소영·조희대·권순일·박상옥 대법관이 문 대통령 재임기간 중 임기가 끝난다.

보수 진영에서는 신임 대법관의 제청권이 대법원장에게 있는 한 향후 대법관 구성은 ‘진보 일색’으로 바뀔 것이라고 우려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진보성향 법조인들이 정부 요직에 속속 기용되고 있다. 우리법연구회 소속의 김형연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지난 5월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임명됐다. 최근 법무부 법무실장에 임명된 이용구 변호사는 부장판사 출신으로, 과거 법원 재직 시절 우리법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문재인 후보 선대위 법률지원단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 후보자가 대법원장으로 취임하게 되면 사법부 내부에 진보성향 판사들이 주류로 등장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반면,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요직에 기용됐던 보수성향 법관들이 2선으로 밀릴 것을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사법부는 또 한 차례 내홍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따라 법원 안팎에서는 “삼권분립에 따라 법원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정권에서 법원을 검찰 다루듯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사법부 한 고위 인사의 말을 들어보자. “사법부는 기본적으로 법을 다루는 곳이라서 보수색이 강하다.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의 인사들이 더 기용될 수는 있겠지만 인위적 이념편향을 걱정하는 것은 기우(杞憂)라고 생각한다. 현재 내부에서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같은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인사권에 대한 이해충돌이 저변에 깔려 있다. 신임 대법원장이 와서 이 부분을 합리적으로 개선한다면 사법부 내부 논란도 자연스럽게 잦아들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관련, 국회에서는 최근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인사권을 축소하고 법원행정처의 권한을 분산할 사법평의회 구성 등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인사에 따른 논란은 사그라들겠지만 국회 등 외부의 입김이 강해져 사법부 독립성이 훼손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안팎으로 도전받고 있는 상황을 김 후보자가 어떻게 극복할지 지켜볼 대목이다.

한편 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는 9월 초 실시될 예정이다. 31년 이상 판사로 살아온 김 후보자의 재산은 8억원대. 2017년 3월 공개한 고위공직자 재산신고에 따르면 김 후보자는 소유 부동산이 없고 차량은 2001년식 SM5를 탄다. 아들과 딸은 모두 판사로 재직 중이다. 사위와 며느리도 법조인으로 알려졌다. 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재산 등 개인 신상보다는 이념성향, 과거 판결 등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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