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韓正) 신임 국무원 상무부총리는 중국 최대 정치파벌인 ‘상하이방(幇)’의 새로운 좌장으로 떠올랐다. ‘상하이방’은 시진핑 집권 1기의 위정성에 이어 2기의 한정까지 연거푸 상하이시 서기를 정치국 상무위에 입성시킴으로써 중국 최대 정치파벌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상하이시 당 서기 출신 장쩌민이 1989년 당 총서기에 발탁된 후 역대 상하이시 서기는 단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상무위 진입에 성공했다. 장쩌민을 시작으로 주룽지, 우방궈, 황쥐, 시진핑, 위정성까지 모두 진입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후진타오 총서기 재임 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천량위(陳良宇) 전 서기만이 사회보장기금 유용으로 징역 18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을 뿐이다.

한정은 1954년생으로 저장성 츠시(慈溪) 사람이다. 태어난 곳은 상하이로 상하이 쉬후이구의 크레인 창고 관리인을 시작으로 줄곧 상하이시에서 공직을 맡았다. 탁월한 업무처리로 상하이시 서기를 지낸 주룽지 전 총리의 눈에 들었고, 공청단 상하이시 서기를 거쳐 39세의 나이에 상하이시의 중심인 루완구(황푸구에 합병)의 구장을 맡았다. 장쩌민의 측근인 황쥐 전 서기 시절에는 상하이시 부비서장과 상하이시 계획위 주임 등 핵심 요직을 맡았다. 이후 2003년 49세의 나이로 상하이의 2인자인 시장이 됐다. 상하이시 역사상 가장 젊은 시장이었다.

후진타오 집권 때 천량위 숙청이란 인사태풍이 상하이를 덮쳤을 때도 한정의 지위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인사태풍은 상하이 토박이인 한정에 대한 의존도를 더 강화했다. 시장으로 있던 한정은 상하이시 서기 임시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후 한정은 사건 수습차 저장성 서기에서 상하이시 서기로 긴급 차출된 시진핑을 보좌해 천량위 사건을 뒷수습하면서 시진핑과 인연을 맺었다.

시진핑의 후임 상하이시 서기로 온 위정성(兪正聲) 아래서는 시장으로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위정성이 2012년 18차 당대회 때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으로 상무위에 진입한 후에는 한정이 다시 상하이시 서기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후 한정은 상하이시 서기로 정식 승진했고, 정치국원이 됐다. 상하이시 1인자에 오른 두 차례 모두가 전임 서기의 인사변동 덕분에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때문에 관운(官運)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초 한정은 전임 상하이시 서기인 위정성의 후임으로 정협 주석을 맡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장가오리(張高麗) 상무부총리의 후임 수석부총리로서 리커창 총리를 보좌하게 됐다. 이는 한정이 상하이시 서기 재임 중 리커창 총리가 공을 들인 중국 최초 자유무역시험구(FTZ)를 상하이에 유치하는 등 적극 협조한 것이 반영된 인사조치로 풀이된다. 부총리 제청권은 국무원 총리에게 있다.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