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2008년 9월 9일 정권 수립 60주년 기념식을 갖고 있는 모습. ⓒphoto KCNA
북한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2008년 9월 9일 정권 수립 60주년 기념식을 갖고 있는 모습. ⓒphoto KCNA

‘인공기(人共旗·인민공화국기)’는 북한이 각종 주요행사 때 내걸어 놓는 깃발을 말한다. 북한의 ‘국기(國旗)’인 인공기의 명칭은 ‘홍람오각별기(紅藍五角星旗)’ 또는 ‘람홍색공화국국기’(藍紅色共和國國旗)이다. 북한은 그동안 인공기를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선전해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을 점령했던 옛 소련이 제작한 것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면서 북한의 평양에 진주한 옛 소련 제25군 군사위원인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은 1947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두봉을 불러 “북조선에서도 국가를 세워야 할 테니 새 국기를 만들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김두봉은 “태극 문양이 들어간 국기를 사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후 몇 달이 지나 모스크바에서 제25군 사령부에 인공기의 도안을 보내왔다고 레베데프 소장의 통역이었던 고려인 출신 박일 전 교수가 밝혔다. 박 전 교수는 인공기의 도안을 한글로 번역해 김두봉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인공기는 모스크바 디자인제작소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북한에선 광복 이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태극기가 사용돼왔다. 1948년 4월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태극기 아래서 연설했다. 그러다 1948년 7월 10일 북조선 인민회의에서 태극기가 폐지되고 새로운 국기로 인공기가 제정됐다. 김두봉은 연단 뒤에 있던 태극기를 끌어내릴 것을 지시했고 대신 인공기를 게양시켰다. 김일성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은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인공기에 대한 이런 역사적 사실은 북한이 철저하게 소련의 ‘괴뢰(傀儡·꼭두각시)’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련이 만들어준 인공기

오는 9월 9일은 북한 정권이 수립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은 1948년 8월 25일 의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를 실시한 뒤 같은해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회의를 소집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북한에선 9월 9일이 9·9절 또는 국경절로 불린다. 9·9절은 조선노동당 창건기념일인 10월 10일과 함께 북한의 사회주의 5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북한의 5대 명절은 새해(1월 1일), 김정일 생일(2월 16일·광명성절), 김일성 생일(4월 15일·태양절)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성대하게 행사가 치러지는 날은 김일성 생일과 9·9절이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9·9절을 맞아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군사력을 과시하고자 열병식(군사퍼레이드)도 해왔다. 특히 이번 9·9절은 ‘공화국’ 수립 70주년인 만큼 대규모 행사를 벌일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권 수립 70주년을 ‘대경사’로 기념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2008년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6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여군들의 행진 모습. ⓒphoto 위키피디아
2008년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6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여군들의 행진 모습. ⓒphoto 위키피디아

북한 정권이 9·9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해온 이유는 국가 수립의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지금까지 ‘공화국’을 자주적으로 창건했다는 점을 내세우면서 한국의 건국을 미국 제국주의(미제)의 앞잡이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폄하해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북한은 말 그대로 소련의 꼭두각시였다는 점이 분명하게 입증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북조선에서 민주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광범위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연해주 군관구와 제25군 군사위원회 등에 비밀암호 지령을 내렸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스탈린이 내린 이런 지시는 애초부터 소련이 북한에 위성정권을 세우겠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부르주아 민주정권’이란 북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친소(親蘇)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의미한다.

스탈린의 이런 지시에 대해 소련군 총정치사령관 요시프 쉬킨 중장은 1945년 12월 25일 당시 외무인민위원회(외무부의 전신)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위원장에게 보낸 ‘북한의 정치 상황’이라는 비밀보고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수립은 아직 결정적으로 달성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앞으로 북한에서 철군할 경우 국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민족민주간부들을 양성하는 데는 4∼5개월의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보고서의 내용으로 볼 때 소련은 북한에 진주할 때부터 자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이익을 보장할 단독정부를 구성할 의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보고서는 1945년 12월 27일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에 앞서 작성된 것으로, 소련이 남북한 단일정권 수립에 찬성한 것처럼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쉬킨 중장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군 총정치사령관에 있으면서 북한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 등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 소비에트 국가 창설을 총괄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스탈린 서기장의 총애를 받았으며 비밀경찰 체카(옛 소련 KGB의 전신)의 우두머리였던 라브렌티 베리아에 이어 제3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해 국가 성립에서 집권세력의 양성에 이르기까지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식민지 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했다. 이런 정책의 계획과 집행은 쉬킨 중장이 총괄했다.

쉬킨 중장이 만든 나라

제25군이 중심이 된 소련 군정은 1945년 12월 17일 북조선공산당 제3차 확대회의를 열어 김일성을 제1비서에 앉혔고, 1946년 2월 8일 사실상의 정권기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해 역시 김일성을 위원장에 앉혔다. 김일성의 양손에 당과 행정권을 쥐여준 셈이다. 당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소련의 신탁에 의한 북한의 단독정부를 의미한다.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에 관한 규정’ 제3조를 보면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있어서의 중앙행정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의 인민사회단체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발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고 적시돼 있다. 중앙행정주권기관으로서 법령을 제정한다는 것은 바로 정부를 말하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누가 먼저 수립했는지는 이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북한 정권이 정부 수립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았던 것은 남북 분단의 책임을 한국에 돌리려는 의도였다.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출범하자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당시 레베데프 소장은 “북한에서 시행된 일련의 정치 일정은 모두 소련 공산당 중앙위 지령에 따라 군정이 주도한 것으로 외형상 북조선 공산당과 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내용들은 모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방부, 외무부 등의 문서보관소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비밀문서와 자료에서 발굴된 것이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자국에 살고 있던 고려인 2~3세 가운데 대학 교육을 받은 정치·군사·경제·정보·교육·기술·문화 등 분야별 전문가 428명을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에 급파했다. 소련은 북한 정권을 창설하면서 이들을 당과 정부의 부책임자로 앉혀 소련을 대신해 사실상 정권을 관리하도록 했다.

당시 소련 군정이 북한 정권을 이끌 지도자로 내세운 인물은 김일성이라는 소련군 대위였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로 1912년 4월 15일 평양 교외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초등학교 교사로 기독교 선교활동을 했다. 어머니 강반석도 기독교인이다. 김일성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김일성은 일찍이 부모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14세 때 길림에서 중국 공산당 청년조직에 가담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후 김일성은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일본 관동군이 1939년부터 만주에서 대대적으로 빨치산 토벌에 나서자 김일성은 1940년 소련 연해주로 도주했다. 소련 극동군은 1942년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하바로프스크 인근 바츠코예에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88국제여단을 만들었다.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의 1대대 대대장으로 복무하면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환영행사에 처음 나타난 김일성. 뒷줄 우측 첫 번째가 레베데프. ⓒphoto 위키피디아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환영행사에 처음 나타난 김일성. 뒷줄 우측 첫 번째가 레베데프. ⓒphoto 위키피디아

김일성을 면접한 스탈린

스탈린은 19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4시간 동안 면접하면서 북한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봤다. 이후 소련 군정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레베데프 소장은 스탈린이 당시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한 이유에 대해 “김일성이 비록 학식과 공산주의 이론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소련에 충성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레베데프 소장은 또 “김일성이라는 이름(본명은 김성주였지만)이 북한 주민들에게 ‘항일투쟁 민족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지도자로 부상시키기에 용이했던 점도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1949년 작성된 ‘김일성의 정체’라는 제목의 비밀문서에서 “실제로 항일운동을 펼쳤던 ‘김일성 장군’이 존재했지만, 어느 순간 사라졌고 그 자리를 김일성으로 개명한 김성주가 차지했다”고 밝혔다. CIA는 2011년 기밀 해제된 이 문서에서 “김성주가 영특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에게 높은 신임을 얻었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1946년 7월에도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또다시 면접했다. 평양 주재 소련 정보기관이 김일성의 무식과 독단적 스타일을 문제 삼아 북한의 지도자를 박헌영으로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고 스탈린에게 건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면접에서도 스탈린은 김일성을 최종 결정했다.

소련은 이처럼 북한 정권 수립과 지도자 발탁까지 모든 과정에 개입했다. 심지어 소련 군정은 1947년 말 북한의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북한의 국장(國章)을 보면 상단에 붉은 별이 있고, 국호가 적힌 붉은 리본으로 감싼 농작물 이삭이 공업을 나타내는 상징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다. 이 디자인도 소련의 국장 형태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소련 군정은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두 달 전에 초대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명단을 작성해 스탈린에 보고하고 일부 수정 지시를 받기도 했다. 북한은 헌법을 비롯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선노동당 강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과 제도 등을 소련을 모델로 삼았다. 북한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북한의 이른바 집권 엘리트들은 대거 모스크바로 유학, 당시 선진국이었던 소련의 문물을 그대로 베껴갔다.

지금도 북한 인민군은 열병식에서 행진할 때 소련의 붉은군대처럼 무릎을 펴지 않고 다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걷는다. 절도가 있고 힘찬 모습을 보이기 위한 행진 방법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요즘은 많이 사라졌지만 러시아에 가면 머리에 붉은 꽃 리본을 단 유치원생들이 줄지어 행진하는 모습을 아직도 볼 수 있다. 이는 현재 북한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평양과 모스크바는 이처럼 닮은꼴이 많다. 심지어 교통경찰의 수신호도 똑같다.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과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한 스탈린의 시신이 방부처리돼 미라로 보존되고 있듯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도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돼 있다.

북한은 이번 9·9절 70주년을 맞아 ‘빛나는 조국’이라는 제목으로 대(大)집단체조(매스게임)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북한은 2002년 김일성의 제90회 생일을 맞아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 공연 ‘아리랑’을 처음 선보인 이래 2004년과 2006년을 제외하고 2013년까지 거의 매년 체제선전과 외화벌이 목적으로 집단체조 공연을 벌여왔다. 북한은 2014년부터 지금까지 핵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감행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조치 등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급감하자 ‘아리랑’ 공연을 중단한 상태였다. 집단체조 공연의 주제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일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지난 4월 20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 건설 노선’의 종료를 공식 선언하고 ‘경제 건설 총력 노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한은 이번 공연에서 핵무기를 보유한 ‘정상국가’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는 내용을 선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3대 세습을 정당화하고 김 위원장의 리더십을 강조할 것이 분명하다.

북한 정권이 말하는 ‘빛나는 조국’은 헌법에 명시됐듯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나라’라는 뜻이다. 또 앞으로 김정은의 나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소련군 대위에서 일약 북한의 지도자로 등극한 김일성은 ‘김일성 민족’의 창시자가 됐다. 김정일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한 지 100일이 지난 이후 담화에서 “지금 해외동포들은 조선민족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부르고 있다”면서 “조선 민족의 건국 시조는 단군이지만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위대한 김일성 수령 동지”라고 강조했다. 김정은도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생일 100회 열병식에서 “김일성 민족의 백년사는 파란 많은 수난의 역사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고 우리 조국과 인민의 존엄을 민족 사상 최고의 경지에 올려 세웠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련의 꼭두각시로 탄생한 북한 정권이 9·9절 70주년을 계기로 ‘김씨 왕조’임을 대내외에 선포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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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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