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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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요즘 한창 잘나가는 남자 배구 현대캐피탈 얘기다. 현대캐피탈은 올해 들어 치른 17경기에서 전승하며 2006년 1월 자신들이 세웠던 단일 시즌 최다 연승(15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미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한 현대캐피탈은 남은 한 경기에서 이기면 신치용 전 감독이 이끌었던 삼성화재가 두 시즌(2006년 2~12월)에 걸쳐 달성한 17연승을 넘어 18연승을 기록하게 된다. 말 그대로 남자 프로배구의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다.

그 역사의 중심에 ‘1년 차 초보감독’ 최태웅(40)이 있다. 현대캐피탈은 지난 시즌 7개팀 중 5위를 기록하며 2005년 프로배구 출범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한때 삼성화재와 함께 견고한 양강 체제를 구축했던 그들로선 치욕스러운 성적표였다.

이후 새로 지휘봉을 잡은 이가 최태웅 감독이다. 당대 리그를 주름잡던 국가대표 세터 출신이지만, 그에겐 코치 경험이 전무(全無)했다. 프로배구 무대에서 코치 경력 없이 선수에서 바로 감독으로 수직이동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안팎에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물음표가 느낌표로 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배구 코트 위에 ‘최갈량’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감독’ 최태웅은 불과 10개월 만에 어떻게 팀을 바꿔놓은 걸까.

스피드 배구=하나의 배구

최 감독이 지난해 4월 부임과 함께 가장 먼저 공언한 것이 ‘스피드 배구’의 구현이었다. 기존 국내 배구에선 기량이 탁월한 외국인 선수에게 공을 몰아주는 이른바 ‘몰방(沒放)’ 배구가 주요 공격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간 일부 선수들에게만 공격이 편중되는 것이 배구의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반면 최 감독은 한 팀 전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여 모두가 공격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지향했다. 소위 ‘토털 배구’다. 주전 세터 노재욱(24)이 공을 올리려 할 때 좌우와 가운데서 서너 명의 선수들이 동시에 뛰어오른다. 어느 쪽에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대 입장에선 블로킹을 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점수를 내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측면 공격수인 오레올 까메호(30)가 중앙으로 자리를 옮겨 후위 공격을 하거나 오른쪽 공격수인 문성민(30)이 가운데 속공에 가담하는 등 예상을 뛰어넘는 공격 패턴도 상대의 혼을 빼놓는다. 최 감독의 스피드 배구는 단순히 ‘빠른 배구’가 아니라, 코트 위 6명의 선수가 한 몸처럼 호흡하는 ‘하나의 배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하는 ‘하나의 배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또 있다. 보통 작전 시간엔 주전 선수들이 감독의 지시를 듣고, 벤치를 달구던 후보 선수들이 코트로 나가 몸을 푼다. 대부분 팀이 따르는 불문율과도 같다.

하지만 현대캐피탈의 작전 시간 땐 주전·후보에 관계없이 모두 최 감독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후보 선수라도 언제 코트에 나설 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 팀이 어떤 상태인지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운영철학이다. 현대캐피탈 구단 관계자는 “모든 선수가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자연스럽게 책임감을 느낀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져도 좋아! 도전해!”

“경기에 져도 좋으니까 오레올하고 성민이 주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줘.”

지난해 11월 10일 우리카드전 5세트. 6-9로 뒤지던 현대캐피탈의 최 감독이 세터 이승원(23)을 향해 한마디를 건넸다. 주포인 두 명 외에 다른 선수들에게도 공격 기회를 주라는 주문이었다. 이승원은 이후 진성태(23)와 박주형(29) 등에게 공을 배분하며 경기를 이끌었지만, 끝내 경기에선 패하고 말았다. 최 감독은 나흘 뒤 열린 대한항공전에서도 선수들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겁난다고 피하면 다음에 누가 해? 미스해. 과감히 미스해. 해야지. 안 하면 나중에 못한다고.”

실패의 두려움을 씻어내다

최 감독은 지난 10개월 동안 선수들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잊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스피드 배구란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면서 시행착오는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이전보다 빨라진 토스에 발을 맞추다 보니 스텝이 꼬이고, 점프를 뛰어도 헛손질을 하기 일쑤였다. 세터 노재욱은 “처음엔 토스를 10개 올리면 그중에 한두 번 공격에 성공할 정도로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았다”고 했다. 시즌 전 까마득한 후배인 대학 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지는 굴욕도 맛봤다.

하지만 최 감독은 서두르지 않았다. 선수들이 실수를 해도 “잘하고 있다”고 칭찬했고, 주눅든 선수들에겐 “오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발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격려했다. 구단은 시즌 전 경기 포상금 책정을 감독에게 일임했다. 이전엔 대개 팀이 이겼을 때 수훈 선수가 받았지만, 최 감독은 패한 경기에서도 가능성을 보여준 선수에게 포상금을 지급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팀 색깔을 입히기 위해 우직하게 기다렸다.

결과와 실패에 대한 부담을 덜어낸 선수들이 최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그 기간이 놀랍도록 짧았다. 신현석 현대캐피탈 단장은 “최 감독이 추구하는 배구를 구현하기까지 적어도 2~3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정착에 성공했다”며 “감독과 선수가 서로 신뢰하고 버텨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 감독은 일 중독자다. 하루 서너 시간을 자는 건 예삿일이고,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배구 때문이다. 그의 사무실엔 컴퓨터 두 대와 노트북까지 있다. 책장엔 자신만의 언어로 매 경기를 분석해 놓은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너무 배구에만 빠져 살기에 주변에서 ‘취미라도 가져보라’고 권하자, 어디선가 수학 문제집을 구해왔다. 최 감독은 “배구 데이터 분석을 하려면 통계를 알아야 하는데 혹시나 도움이 될까해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 시절, 시즌이 끝나면 해외로 나갔다. 목적은 여행이 아니라 선진 배구 리그를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는 동행한 팀 전력분석관의 체류 경비를 자비(自費)로 댔다고 한다.

배구에 대한 그의 이런 열정은 선수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노재욱은 “밤을 새워 선수 영상을 분석하고 훈련장에 나타난 감독님이 ‘내가 이걸 왜 하는 줄 아냐. 재미있어서 한다’고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며 “나도 그런 열정을 꼭 닮고 싶다”고 했다. 송준호(25)는 “(감독님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다양한 동영상을 보여준다”며 “구체적인 꿈을 잊고 살았는데 그걸 보고 다시 목표를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 최태웅이란 새 리더가 코트에 불러일으킨 변화의 바람은 강렬하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선 그의 배구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구 팬들에겐 큰 즐거움일 것 같다.

이순흥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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