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FC 전용구장인 포레스트아레나. 1만2000석 규모의 축구 전용구장이다. ⓒphoto 뉴시스
대구FC 전용구장인 포레스트아레나. 1만2000석 규모의 축구 전용구장이다. ⓒphoto 뉴시스

대구는 ‘야구의 도시’였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원년 멤버인 삼성 라이온즈는 이만수, 김시진, 이승엽, 양준혁 등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든 수많은 스타를 탄생시켰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11년부터 한국시리즈 4연패, 정규 시즌 5년 연속 우승에 빛나는 삼성은 대구 시민의 자부심이었다. 서울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대구 출신들도 가을만 돌아오면 삼성의 연승 행진을 자축하며 자랑스럽게 모자를 쓰고 점퍼를 입었다.

그에 비해 축구는 관심 밖이나 다름없었다. 2002 한·일월드컵 개최도시 선정을 계기로 시민구단 대구FC가 창단됐지만 K리그 성적은 야구에 비해 초라했다. 10위권 안에 든 적이 드물었고 역대 최고 성적이 리그 7위다. 대구 시민들이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수성구 대흥동까지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 대구에 요즘 ‘축구 봄바람’이 불고 있다. 봄바람을 넘어 열풍으로 번질 기세다. 도심 속 시민운동장을 개조한 축구 전용구장 ‘DGB대구은행파크’가 문을 열어 시민들이 한결 편하게 축구장을 찾을 수 있게 됐지만, 새 구장 오픈에 ‘반짝 효과’로만 설명하기엔 봄바람 기세가 무섭다.

지난 3월 12일 대구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밟았다. 지난해 FA(축구협회)컵 우승 자격으로 첫 아시아 클럽대항전을 치른 것이다. 상대는 중국 ‘머니 풋볼(money football)’의 대명사 광저우 에버그란데. 2006 독일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우승으로 이끈 주장 파비오 카나바로가 감독을 맡고 있고, 브라질 대표팀 멤버 파울리뉴가 미드필더로 뛰고 있다. 파울리뉴 한 명의 몸값(예상 이적료 약 485억원)이 대구 선수단 전체 몸값(약 87억원)의 다섯 배다.

이날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택시를 타자 기사는 “축구 보러 가느냐”고 먼저 물었다. “요즘 대구FC 대단합니데이. 옛날엔 10명 중에 야구팬이 8~9명, 축구팬이 1~2명이었다면 지금은 6 대 4 정도로 축구팬이 많아졌다 아잉교. 경기장에서 직접 보면 유럽축구 안 부럽다 카던데.”

3경기 연속 매진

대구 북구 고성동 시민운동장 자리에 지은 포레스트아레나(DGB대구은행파크)는 도심 안에 있다. 지하철 북구청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경기장에 도착해 보니 매표소와 팬숍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직 킥오프(오후 7시30분)까지 3시간이 남았을 때였다. 팬숍 직원은 “3월 9일 K리그 홈 개막전(대제주, 2 대 0 승리) 때 준비해놓은 유니폼이 매진돼 주문한 유니폼이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3년 전부터 서포터스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 3명은 일찌감치 앞쪽에 줄을 서 있었다. 이들은 “한 명당 꼭 한 벌만 사야 하느냐” “오늘 선수 마킹도 할 수 있느냐”고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함께 줄을 서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자 뒤에 선 사람들이 100여명 가까이 늘었다. 오후 5시30분 팬숍 문이 열리자 100여명이 “와!” 하며 들어가 하나씩 집자 진열된 유니폼이 전부 동났다. 어린이 사이즈 유니폼만 4벌 정도 남았다. 성인 유니폼 가격은 10만3000원이다. 팬숍 직원은 “작년 FA컵에서 극적으로 우승했고 새 홈구장 개장 효과를 볼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없어서 못 판 건 처음이라 신이 나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유니폼뿐만이 아니었다. 매표소 전광판에 ‘매진’ 글자가 뜨자 중년 남성들은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어떻게 표를 못 사냐”고 욕설을 내뱉었다. 한 남성은 “K리그를 표가 없다고 못 들어가긴 처음”이라며 “구급차량 들어가는 철문 사이로 보는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대구는 홈 개막전부터 광저우전, 3월 17일 울산전까지 3경기 연속 입장권 매진을 달성했다. K리그는 이제 공짜표로 보거나, 언제든 가면 볼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유럽 인기 축구경기처럼 사전 예매를 해야 볼 수 있는 상품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자 유럽 축구장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1만2000석의 DGB대구은행파크는 잉글랜드 2~3부리그 팀의 경기장 규모로 작은 편이지만 팬이 1만명만 들어와도 열기가 뜨거운 유럽 축구장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다.

지난해 대구 평균 관중은 3500명이었다. 작년까지 쓰던 대구월드컵경기장은 육상트랙이 달린 종합경기장으로 좌석 수가 6만6422석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1위를 달리는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이티하드 스타디움·5만5097석)보다 규모가 크다. 여기에 1만명이 들어간다고 해도 경기장은 텅텅 비어 보인다. K리그가 늘 저평가되었던 원인 중 하나다.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석이 가득 찼다. 팬들은 발을 스탠드 바닥에 “쿵쿵” 구르며 “골!”이라고 외쳤다. 경기장은 향후 증축이 용이하도록 철제구조로 되어 있어 1만명이 발로 바닥을 구르면 그 소리가 콘크리트 경기장보다 훨씬 크게 울려퍼진다. 이 소리는 지붕에 부딪혀 다시 경기장 안쪽으로 모이기 때문에 선수와 관중들은 ‘천둥’ 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지난 3월 12일 홈 개막전인 광저우전에서 승리한 후 기념촬영을 한 대구FC 선수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12일 홈 개막전인 광저우전에서 승리한 후 기념촬영을 한 대구FC 선수들. ⓒphoto 뉴시스

유럽 축구장 닮은 1만여석 전용구장

아무리 여건이 좋아도 팀 성적이 저조하면 인기를 끌기 힘들다. 새 홈구장 오픈과 맞물려 대구FC가 끈적한 역습 축구로 강팀들을 쓰러뜨려가는 맛이 대구팬들을 축구장으로 이끌고 있다.

지난 시즌 대구의 선수단 총 연봉액수는 43억원으로 K리그1의 12개 구단 중 최하위다. 2부리그에서 올라온 지 올해가 3년째이고, 시민구단임을 감안하면 적당한 액수지만 전북, 울산, 서울, 수원 등의 강호를 상대하기엔 부족한 금액이다. 대구는 현실을 인정하고 무리하게 미드필더를 사들여 ‘점유율 축구’를 하지 않는다. 중원 싸움을 할 수 있는 볼 간수 능력이 좋은 미드필더를 사올 돈이 없기 때문에 강팀을 만났을 때 굳이 전면전을 펼치지 않는다.

대신 끈적한 수비로 상대 진을 빼놓다가 무섭게 휘몰아치는 역습을 갈고닦았다. 세징야-에드가-김대원의 삼각편대는 지난 3월 12일 광저우전(3 대 1 승)에서 3골을 합작하며 아시아 무대에서도 검증을 마친 상태다. 삼각편대의 중심이자 대구 축구 돌풍의 중심에 있는 세징야(30)는 브라질 출신 공격수로 올해가 K리그 4년 차다. 브라질에선 1~2부리그를 오가며 능력에 비해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했는데 대구에 와서 펄펄 날고 있다. 지난 시즌엔 K리그 도움왕(11개)을 차지하기도 했다. 같은 브라질 출신 스트라이커 에드가(32)도 태국 부리람 유나이티드에서 실력이 떨어져 방출되다시피 했지만 대구에선 결정적인 찬스에 골을 넣는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그러나 용병들의 활약만으론 지속적인 팬덤을 형성하긴 힘들다. FC바르셀로나(스페인)의 사비 에르난데스와 안드레 이니에스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의 웨인 루니와 마커스 래시퍼드처럼 자국 선수가 핵심 선수로 활약해야 팬들이 더 열광한다. 대구엔 ‘팔공산 메시’ 김대원(22)이 있다.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의 모교 보인고등학교를 졸업한 김대원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2016년 2부리그에 있던 대구FC에 곧바로 입단했다. 입단 초기 리저브 팀에서 뛰던 김대원은 곧바로 1군 주전을 꿰찼고 지난해 울산과의 FA컵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팬들에게 존재감을 확실하게 심었다. 김대원은 “세징야, 에드가 형들에게 공격 템포와 기술을 많이 배우고 있다”며 “다른 나라 형들이지만 빠른 역습을 함께할 땐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대 헤아(대구+스페인 골키퍼 데 헤아)’ 조현우 골키퍼도 대구 축구 붐에 한몫했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신들린 선방을 선보이며 스타로 떠오른 조현우는 팬숍에 초록색(골키퍼 유니폼 색) 머플러가 따로 제작되어 있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설계자 조광래

2014년 2부리그로 강등된 대구FC는 조광래 전 국가대표팀 감독을 대표이사 겸 단장으로 선임했다. 선수 시절 정교한 패스와 폭넓은 시야를 지녀 ‘컴퓨터 링커’로 불렸던 조 대표는 안양LG, FC서울, 경남FC에서 차례로 감독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2010 남아공월드컵 폐막 후 대표팀을 맡아 2011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아기자기한 쇼트패스 공격축구로 팬들을 매료시켰지만, 그해 8월 일본에 0 대 3으로 패하고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레바논에 1 대 2로 패하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비록 대표팀에서 꿈을 다 이루지 못했지만 ‘관중이 즐거운 축구를 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 안양 감독 시절 데리고 있었던 브라질 미드필더 안드레를 코치로 영입해 재작년엔 감독을 맡겼다. 안드레는 세징야, 에드가 등의 브라질 선수들을 다독이며 능력을 120% 끌어내고 있다.

조 대표의 최대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축구 전용구장 건립이다. 조 대표는 삼성 라이온즈가 2016년부터 시 외곽에 새로 ‘라이온즈 파크’를 지어 도심을 떠나면서 그 빈자리를 축구경기장으로 대체하는 ‘재생사업’에 적극 뛰어들었다. 시민운동장을 축구전용구장으로 개조하는 데엔 이견이 없었지만 지붕 비용 100억원이 문제였다. 경남FC 감독 시절 지붕 없는 축구전용구장(창원축구센터)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조 대표는 “지붕 없는 축구경기장은 ‘반똥가리(반토막)’밖에 안 된다. 나중에 지붕 덮으려면 200억원이 든다”며 시청과 시의회를 밤낮으로 설득했고, 천신만고 끝에 유럽 소규모 구장 부럽지 않은 축구전용구장이 문을 열게 됐다.

“사람들이 돈 내고 볼 만한 경기 상품을 만들기 위해 억수로 노력했어예. 예전처럼 우리 직원들에게 K리그 공짜표 달라는 연락이 오면 ‘내가 대신 사준다’고 합니데이. 한번 오신 분들은 다들 ‘돈 내고 볼 만하구나’ 하며 돌아갑니다.”

3경기 연속 입장권 매진을 기록한 대구는 경기마다 입장권 수익으로만 1억원을 벌어들인다. 조 대표는 “대구의 축구 잠재력은 풍부하다”고 말했다.

윤동빈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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