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윈 알리바바그룹 회장 ⓒphoto 로이터·뉴시스
마윈 알리바바그룹 회장 ⓒphoto 로이터·뉴시스

지난 1월 15일 오후 3시,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알리바바그룹 임직원 2만5000여명에게 한 통의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이메일 발신자는 회사의 창업주 마윈(馬雲·48) 회장이었다. 이메일 내용은 폭탄급 충격을 몰고 왔다.

“오는 5월 10일 타오바오 창립 10주년 기념일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날 새 CEO를 발표하겠다.” 평소 괴짜로 소문난 마 회장이지만 창사 이래 전례가 없었던 ‘블록버스터급’ 폭탄 선언에 임원들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알리바바그룹은 발칵 뒤집혔다.

마 회장의 폭탄 선언은 자신의 퇴진 선언이 끝이 아니다. 그는 이메일에서 40대인 자신을 “비즈니스 고속 성장을 이끌 만큼 더는 젊지 않은 것 같다”며 “나뿐 아니라 1960년대생 임원들도 모두 1970~1980년대 직원들로 교체될 것”이라고 썼다. 자신이 물러나면서 다른 사람도 물고 들어가는 일종의 ‘물귀신작전’이다. 알리바바의 임원들은 2007년 알리바바가 홍콩 증시 기업공개(IPO)에서 대박을 터트리면서 대부분 주식 배당으로 돈방석에 올랐다. 이들에게 갑작스레 들이닥친 ‘조기퇴진’ 압박은 분명 충격이었다.

볼품없고 꾀죄죄한 외모

현재 알리바바그룹 내부에는 마 회장의 ‘이메일 사건’ 이후 차기 CEO가 누가 될 것이냐를 놓고 시끄러운 것으로 전해졌다. 마 회장의 이메일 내용대로라면 다음번 알리바바그룹 CEO는 30대에서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중국의 정보통신(IT)업계는 이번 마 회장의 결단을 이미 예견했다는 눈치다. 그가 최근 그룹의 각 사업 부문을 재편성했고,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피력해 왔기 때문이다.

중국의 정보통신 업계에서는 차기 알리바바 CEO로 외부 인재 영입보다는 내부 발탁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평소 하버드대, 예일대 등 뛰어난 스펙을 가진 인재들도 조직에 융화되지 못하면 거침없이 해고하는 것으로 유명한 마 회장이 외부 인재보단 이미 점찍어둔 내부 인사를 CEO에 앉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마윈의 성장 과정과 지금까지 알리바바를 이끌어온 경영 방침에서도 드러난다.

마윈은 1964년 저장성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모와 함께 저장성의 성도 항저우(杭州)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보냈다. 깡마른 체구에 꾀죄죄한 외모, 괴짜 같은 성격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성적이 신통치 못해 삼수 끝에 항저우사범대학 영어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영어와 무협지를 좋아했다. 집 근처인 항저우 최대 관광지 서호(西湖)로 외국인 말동무를 찾아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서호는 과거 백거이(白居易), 소동파(蘇東坡)가 산책하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던 곳이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영어만큼은 열심이었다. 마윈은 “아버지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을 때마다 영어로 말대꾸해 부모를 당혹게 하는가 하면,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영어교사·관광가이드·번역일을 했다”고 중국신문주간(中國新聞週刊)과의 최근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외국 유학은 간 적이 없다. 10여년 전 CNN 등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스스로를 “100% 메이드 인 차이나”로 소개했다. 하지만 영어와 미국이 오늘의 마윈을 있게 했다. 1995년 한 벤처회사 간부의 미국 출장길에 영어통역으로 따라나섰다가 처음 인터넷을 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마윈은 1997년 국가기관인 중국대외경제무역합작부에서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개발·관리일을 하게 된다. 일찍이 인터넷 세상을 접할 수 있었던 마윈은 1999년 기업 대 기업 간 전자상거래(B2B) 사이트 알리바바를 창업했다.

‘18나한(十八羅漢)’과 창업

초기 자본금 2000달러(약 210만원). 마윈이 17명의 친구들과 함께 알리바바를 창업할 때만 해도 중국의 전자상거래시장은 불모지였다. 그 스스로도 1995년 이전에 컴퓨터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당시 중국의 인터넷시장은 이메일 정도를 겨우 다루는 수준이었고, 인터넷 페이지가 한 번 바뀌는 데 3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윈은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미국 검색사이트에 ‘중국’을 치면 아무 내용도 검색되지 않는 것을 보고 ‘앞으로 이 시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항상 무협소설을 손에 들고 다닐 정도로 무협을 좋아하는 마윈은 ‘신명 나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사무실에도 무협 감성을 발휘했다. 일단 자신을 포함한 17명의 친구들을 ‘18나한(十八羅漢·소림사의 나한승 18인에서 따온 표현)’이라 불렀다.

사무실,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무협소설에 나올 법한 이름을 붙였다. 예컨대 마윈의 사무실은 ‘도화도(桃花島)’, 회의실은 ‘광명정(光明頂)’, 화장실은 ‘청우헌(淸雨軒)’ 같은 김용의 무협지에 나오는 지명들이다. 사내에서는 직원들끼리도 무림 고수들의 이름을 썼고, 자신의 집무실엔 재야의 고수들이 사용했을 법한 칼을 여러 자루 전시했다.

회사에 세계적인 태극권(太極拳) 대사를 모셔와 직원 수천 명을 대상으로 태극권 정규 수업을 하는가 하면, 임원들과 회의를 진행하다가 난데없이 일어나 태극권을 연마하기도 했다. 특히 중화권 무협소설의 대부 김용(金庸·88)의 열혈팬이었던 마윈이 2000년 홍콩에서 김용을 만나 3시간 동안 무협에 대해 토론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마윈과 만난 김용은 “만난 적 없으나 서로 흠모한 지 오래된 사이 같다(神交已久)”고 했다.

무협지, 태극권 등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그의 애정을 두고 일각에서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말도 나온다. 강호와 협객에 대해 동경하는 중국인들의 정서를 자극해 알리바바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이런 경영방식이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미국의 이베이(eBay)를 중국 시장에서 4년 만에 철수시킨 원동력이 됐다는 평이다.

‘고객은 부모, 투자자는 외삼촌’

태극권을 선보이는 마윈.
태극권을 선보이는 마윈.

알리바바닷컴은 생산을 주로 하는 중국의 공장과, 이들의 물건을 받고 싶어하는 국내외 기업들이 주 타깃이다. 생산 대국인 중국에서 기업 대 기업 간 새로운 무역의 장을 제공한 알리바바닷컴은 시작부터 승승장구했다. 결국은 ‘수수료’ 장사인데도 수익이 엄청났다. 하지만 기업 간 거래의 장을 제공하는 데 한계를 느낀 마윈은 2003년 5월 10일 중국 최대 기업 대 소비자(B2C), 소비자 대 소비자(C2C) 간 전자상거래 사이트 타오바오(淘寶·taobao.com)를 창립한다.

알리바바닷컴으로 중국 인터넷 전자상거래시장에 신고식을 성공적으로 마친 마윈의 두 번째 도전인 셈이었다. 오프라인보다 20~30% 저렴한 가격으로 인터넷거래시장을 활성화시키며 ‘중국 상거래시장의 선구자’로 떠올랐다.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는 타오바오는 작년 말 연간 거래액 1조위안(약 170조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회원 수 4억명, 중국 인터넷 구매시장 점유율이 80%에 달한다. 그룹의 모태인 알리바바닷컴도 현재 전 세계 240개국에 6100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인터넷 장사꾼’에서 ‘중국 상거래시장의 선구자’로 떠오른 마윈의 업적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 대륙 기업가 가운데 처음으로 마 회장 얼굴이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고, 미국과 유럽의 경쟁 업체들이 알리바바의 성공 전략을 연구했다. 철저한 중국식 인터넷 상거래가 비결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예컨대 마윈은 평소 고객을 부모, 투자자는 외삼촌에 비유했다. 고객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창업 당시 알리바바닷컴은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한 번 수익을 낸 고객이 계속 알리바바를 찾게 됐고, 고객 수가 확보되자 이때부터 투자자를 모집하고 유료화 작업에 나섰다. 유료화 작업을 하면서도 수수료를 책정하면 고객들이 빠져나갈 것을 우려해 물건을 검색하면 상위에 링크시켜 주는 정책을 폈다.

대가를 지불하면 그만큼 높은 수익이 보장된다는 점 때문에 알리바바의 많은 고객들은 유료화를 선택했다. 2006년 알리바바닷컴은 홍콩 증시의 문을 두드렸고 당시 서브프라임 위기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시가 총액 260억달러(약 27조원)를 기록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퇴임 후 사회공헌 할 것”

그룹 성장과 함께 마 회장도 적잖은 부를 쌓았다. 마 회장은 후룬연구소의 ‘2012 후룬리포트(胡潤百富)’에 등재된 부자 상위 1000명 중 46위에 올랐다. 공식 집계된 보유 자산만 24억달러(약 2조5000억원)에 달한다.

창업자로서 혈기 왕성한 시기에 경영인 자리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마 회장에게도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 회장은 “정보기술(IT) 업계는 젊은이들 세상이다. 그들에게 더 큰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 책무이고 내가 회사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공헌이라 생각했다”고 은퇴 이유를 분명히 했다.

은퇴 후에는 회장직만 보유한 채 사내 인재관리나 사회공헌에 힘쓸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1월 15일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이렇게 끝맺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내가 아니면, 누구?(If not now, when? If not me,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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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디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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