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롯데그룹 신격호 명예회장이 지난 연말 법원에 ‘성년후견인’을 신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진은 지난해 7월 28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신격호 회장 모습. ⓒphoto 남강호 조선일보 기자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롯데그룹 신격호 명예회장이 지난 연말 법원에 ‘성년후견인’을 신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진은 지난해 7월 28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신격호 회장 모습. ⓒphoto 남강호 조선일보 기자

서울 강남에 30억원대 빌딩을 가지고 있는 70대 자산가 A씨의 여동생은 최근 A씨를 위해 가정법원에 다녀왔다. 치매를 앓고 있어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A씨 대신 자신을 A씨의 ‘성년후견인’으로 신청하기 위해서다. A씨에게는 신용불량자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A씨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봐 걱정이 돼서다. 변호사를 통해 만난 여동생은 “A씨의 아들은 치매 걸린 아버지의 병간호 대신 자신의 빚을 갚는 데 돈을 다 쓸 인물”이라면서 “여동생인 내가 오빠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여동생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2013년 7월부터 시행돼 이제 갓 2년 반을 넘긴 ‘성년후견인 제도’가 최근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던 롯데그룹의 신격호 총괄회장의 넷째 여동생 정숙씨가 신격호 총괄회장에 대한 성년후견인 지정 신청을 한 것이 계기다.

예전에는 금치산자와 한정치산자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금치산(禁治産·재산관리 능력이 없음)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어감을 준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또 이 제도가 금치산자를 보호하는 것보다 금치산자의 법적 능력을 제한하는 데 집중돼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성년후견인 제도는 이 대신 법원이 질병이나 장애, 나이가 듦에 따라 사무(事務)를 처리할 능력이 되지 않는 성인을 대신할 후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가장 큰 차이는 금치산자 제도가 중증 정신질환자 등에만 대상이 제한돼 있었다는 점이다. 성년후견인 제도는 노인과 장애인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금치산자 제도가 재산관리에만 집중돼 있던 반면, 성년후견인 제도는 치료와 요양에 대한 분야까지 관리해야 한다. 금치산자 제도의 후견인이 친족에 제한됐던 것에 비해 성년후견인 제도의 후견인은 친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정된 성년후견인은 피후견인의 평소 의사와 남은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후견인의 재산과 건강 등을 지키고 후견인을 도와야 한다.

재산과 건강을 지키는 성년후견인

지난해 10월 있었던 사건 중 성년후견인 제도를 적극 활용한 사례가 있다. 치매를 앓고 있던 72살 김모씨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에 아들과 연락이 두절됐다. 김씨에게는 서울 종로의 상가를 비롯해 여러 부동산과 예금 자산이 있었다. 김씨의 남동생이 김씨를 데리고 가 ‘모든 재산 관리를 동생에게 위임하고, 월세 수익을 동생에게 지급한다’는 위임장을 쓰고, 유언장을 바꾸며 재산까지 처분했다. 이에 김씨의 아들이 변호사를 성년후견인으로 선임해 ‘재산을 원상복구하라’며 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승소 판결을 내린 서울중앙지법은 “법원이 선임한 후견인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치매 환자의 상태를 악용해 임의처분한 재산을 회복한 사례”라고 소개했다.

성년후견인을 지정해 달라고 신청하는 것은 본인이나 배우자, 4촌 이내 친족만 가능하지만 특별한 경우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검사가 할 수도 있다. 청구인 스스로 후견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후견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경우 총 다섯 명의 가족이 성년후견인 후보로 지목됐다. 신 총괄회장의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 등 자녀 4명이다.

법원은 성년후견인 신청이 접수되면 피후견인과 청구인, 후견인 후보 등 이해관계자를 모두 불러 적합한 후견인이 누구인지를 심사한다. 이해관계자끼리 특정인이 후견인이 되는 데 동의하지 않아 다툼이 벌어지면 조사관이 파견되기도 한다. 성년후견인을 배정받을 당사자의 정신 및 건강진단도 함께 이뤄진다. 이 과정이 완료되는 데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정도 걸린다.

대개 후견인은 후견 계약의 내용에 따라 재산을 관리하거나 신상에 대한 것을 지원한다. 예를 들어 통장이나 우편물을 후견인이 대신 관리할 수 있다. 각종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후견인의 몫이다. 의료 행위를 결정할 수도 있다. 가정법원은 그 범위를 정하고 변경할 수 있다. 후견인 역시 후견행동에 대해 취소할 수 있다. 만약 후견인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법원이 직권에 따라 혹은 피후견인의 청구에 따라 새로 판단할 수 있다.

아직은 보완이 필요한 제도

법무법인 지우의 이현곤 변호사는 “우리 사회는 유례없이 빠르게 고령화사회로 진입하면서 가족 형태가 많이 변했다”면서 “가족들이 치매노인과 장애인을 끝까지 돌본다는 개념도 사라진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서울가정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할 당시 성년후견제를 준비하는 대법원 TF팀에 참여했다가 최초의 후견 심판을 맡기도 했다. 그는 “후견인 제도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노약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라면서 “기업 경영의 측면에서도 경영권이 합리적으로 승계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년후견인 제도가 후견인의 보호를 받는 피(被)후견인의 행동능력을 아예 배제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를 들자면, 성년후견인이 선정되고 나면 피후견인은 선거권이 박탈된다. 지적장애 2급을 앓고 있는 아들을 대신해 성년후견인을 신청하고 싶다는 한모씨는 “아들의 뒷바라지가 걱정되는 한편, 성년후견인을 지정하는 게 아들의 의사결정 능력이 아예 없다고 못 박아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씨처럼 “피후견인의 남아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년후견인 제도가 악용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9월을 기준으로 성년후견인이 87% 정도가 친족인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 경우 상속 문제와 관련해 재산관리가 명확히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 법조인의 지적이다. 형법 제328조에 명시된 ‘친족상도례’는 재산죄에 한해서 친족 간의 범죄인 경우에는 형을 면제하거나 친고죄가 돼 고소가 없으면 처벌받지 않는다. 후견인의 대다수가 친족인 상황에서 친족상도례를 적용해 재산 범죄가 일어날 경우 처벌할 근거가 미약하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적이다.

지난해 11월 대한변호사협회는 성년후견인 제도 시행 2년 맞아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에서 서울가정법원 김지숙 판사는 “친족후견인들은 성년후견인 제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또 친족이 아닌 제3자가 후견인이 될 경우에는 일정 수준의 보수를 지급해야 하는데, 이 경우 재산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년후견인 제도가 무력할 수 있다. 김 판사는 “국가와 지자체 등에서 무보수 후견인 후보자를 확보하거나 후견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등 성년후견인 제도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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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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