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한국 최초 화장품 연구실 모습. 벽면에 ‘포마드’ 광고 포스터가 보인다.
1954년 한국 최초 화장품 연구실 모습. 벽면에 ‘포마드’ 광고 포스터가 보인다.

1945년 9월 5일 서성환은 중국 베이징에서 현지 제대를 했다. 조선인 제대병들에게는 두 달치 식량이 지급되었다. 부대를 나온 뒤 개성과 그 주변 출신 32명은 함께 모여 생활했다. 동료 가운데 개성 출신으로 고씨 성을 가진 형이 인맥을 통해 거처를 마련했다. 베이징 내성(內城) 서북쪽에 있는 누옥(陋屋)이었다.

베이징 자금성 다자란시장에서

그러던 어느 날 서성환은 문득 ‘장사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는 장사라면 이미 몸에 익힌 터라 이곳에서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개성에서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여자의 몸으로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어머니가 선택한 일이 장사였다. 서성환은 우선 제대할 때 배급받은 쌀을 팔아 일부를 싸라기로 바꾸고 나머지 돈으로는 염색약을 샀다. 그런 다음 군복을 벗어 염색하여 비싼 값에 팔고 싸구려 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얼마간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성환의 장사 수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다. 그 돈이 장사 밑천의 모두였다. 서성환은 말조차 통하지 않는 베이징이지만 사람 사는 곳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우선 호구책으로 염색약이나 작은 물건을 사다가 되팔아 조금씩 이익을 남기는 장사를 시작했다. 그 이익금으로 군복을 사들여 염색한 다음 다리미질하니 멋진 새 옷이 되었다. 그런 다음 웃돈을 붙여 중국인이나 동포들에게 팔았다.

‘다자란’은 큰 시장이었다. 다자란은 베이징에서 가장 크고 활기 넘치는 시장으로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전통 상업거리였다. 그곳에는 온 세상 진귀한 것들이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베이징의 문물과 풍습은 낯설지만 흥미로웠고, 이제까지 보지 못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신기했으며 충격적이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성환은 1946년 2월 인천항에 도착한다. 가업(家業)은 전과 다름없이 창성상점으로 어머니가 명맥을 잇고 있었다. 제조장과 창고, 판매장까지 갖추어 고만고만한 상점에 비하면 제법 규모가 늘어나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가내수공업 상태 그대로였다. 서성환은 가족에게 베이징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어머니에게 더 큰 세상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포부를 밝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도 장사를 했다는 사람이 제 나라에서 뭔들 못하겠나. 그 의지를 잃지 말거라.”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그 믿음을 확인하는 일은 결국 용기를 얻는 과정이었다. 가족의 동의를 얻은 서성환은 우선 상점 이름을 ‘태평양상회’로 바꾸었다. 태평양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큰 바다였다. 모든 강물이 마침내 가닿아 모이는 곳이 바다 아니던가. 바다는 어딘지 모르게 넓고 깊은 모성을 닮은 듯했다. 상점 이름 변경을 시작으로 서성환은 다시 가업에 힘을 보탰다.

광복 뒤 화장품시장은 그야말로 호경기를 맞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사라졌으나 시세이도와 프랑스 코티분이 지배하던 시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실 국내 화장품 업계는 일제 화장품에 대해 시장 규모나 질적인 수준에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제 그들이 떠났다. 이 공백을 차지하기 위한 업계 경쟁은 치열했다. 화장품 제조회사가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50년 6·25전쟁 전까지 보건사회부가 집계한 전국 화장품 회사가 100여개, 여기에 가내수공업 규모의 업소를 합치면 그 숫자는 엄청났다. 하지만 품질 수준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경쟁 업체가 많다 보니 애로사항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바셀린, 유동 파라핀, 스테아린산 등 주요 화장품 원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원료 가격도 나날이 뛰어올랐다. 서성환은 원료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한 가지 원료라도 충분하게 확보하면 물물교환으로 다른 원료를 구할 수 있었다. 원료 구입하는 게 제품 생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원료로 만든 크림과 포마드 제품은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그러나 의욕과 성실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세월이었다. 광복 뒤 어수선한 시절은 또다시 그에게 시련을 요구하고 새로운 모색을 강요하고 있었다.

황해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새터마을의 원주 변씨 댁은 부농이었다. 바깥주인은 미남형에 호탕한 사람이었다. 안주인은 곱상한 미인으로 성정이 조용한 여인이었다. 반듯하고 윤택한 살림살이에도 안주인의 품성이 엿보였다. 부부는 2남1녀 자식을 보았다. 외동딸인 변금주(1930년생)는 별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녀가 철들 무렵 아버지는 작은댁을 보았다. 그 시절만 해도 남정네들이 첩을 들이는 일은 크게 흉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존심 강했던 변금주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개성으로 나왔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개성에 정착한 그녀는 열다섯 무렵부터 개성 유일의 신식 상점인 김재현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곱상한 얼굴과 성품을 기준으로 뽑힌 백화점 판매원들은 그야말로 신식 여성이었다. 일이 손에 익을 무렵 중매가 들어왔다. 상대는 백화점에 제품을 납품하다가 코너를 개설한 화장품 상점 아들이라고 했다. 서성환이었다. 만나보니 그는 이미 백화점 근무 경력이 있는 데다 인물도 훤칠했다. 소개한 사람은 차분하게 군말 없이 명쾌한 투로 자르듯 짧게 말했다.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청년이오.”

그렇게 중매 반 연애 반으로 둘은 만났다. 이 만남은 양가 모두 무리 없는 혼담이었다. 우선 두 집안 안사돈의 기질이 비슷했다. 살림도 그만하면 어느 한쪽으로 크게 기울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썩 어울리는 일이었다. 1947년 스물넷 서성환과 열여덟 변금주는 그렇게 결혼했다. 안정된 결혼 생활은 서성환의 사업의지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녀의 시어머니를 닮은 강한 생활력은 서성환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빛을 발했다. 뒷날 서성환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꼭 아내를 데리고 다녀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서성환의 아내 사랑은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모습으로 유별나게 비쳐졌다.

태평양화학 메로디 크림

1948년 출시된 메로디 크림의 상표.
1948년 출시된 메로디 크림의 상표.

소련에 의해 38선이 그려지면서 그 경계지에 포함된 지역들은 세파 속에서 운명의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개성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개성의 상징과도 같은 송악산에는 저마다 다른 봉우리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대치했다. 좌우 세력이 대립, 요란한 총소리가 밤하늘을 찢는 일이 예사로운 일상이 되어갔다. 불안한 정치 상황과 사회 혼란은 시장과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성 경제의 젖줄과도 같았던 인삼 재배면적은 광복 뒤 급격히 줄어들었다.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남북의 경제가 더 이상 단일한 틀 속에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전력난이 가중되었고, 원료 수급은 한층 어려워졌으며, 유통 체계가 반쪽이 되어 개성 이북 쪽은 판로가 막히고 말았다. 개성은 더 이상 개성이 아니었다. 그는 개성을 떠나 사업 무대를 서울로 옮겨 새로운 태평양을 출범시킬 것인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쉽사리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첫째 어머니의 동의가 필요했다.

서성환의 결단을 재촉한 것은 고향 개성을 둘러싼 불투명한 전망만은 아니었다.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만군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세상을 경험한 그에게 개성은 정녕 새로운 하늘이 아니었다. 서성환은 자신의 꿈을 실현할 무대로 개성은 이미 너무 좁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또한 불길한 기운이 맴도는 개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어렵게 기반을 이룬 제2의 고향을 다시 떠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윤독정은 아들의 깊어진 눈과 분별력을 믿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서울로 올라온 서성환 일가는 남대문시장 부근 남창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 일대는 크고 작은 도·소매상들이 올망졸망 자리 잡고 있어 초라하긴 했지만 시장의 활기만은 그런대로 살아 있었다. 이곳에는 개성 사람을 비롯한 실향민들이 적잖이 모여 터를 잡고 있었다. 1947년 서성환은 남창동에 ‘태평양화학공업사’ 간판을 내걸었다. 새로 시작한 서울에서의 사업이 개성 시절과 같을 수는 없었다. 밖으로 모든 여건이 바뀐 것은 물론이려니와 안으로도 가족 사이의 역할과 구성이 달라졌다. 어느덧 부모님의 나이는 5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1948년 1월 서성환은 서울 중구 회현동에 사업장을 열었다. 회현동은 개성 시절부터 어머니 심부름으로 내려와 활동하던 지역이어서 익숙한 곳이었다. 새 사업장을 열면서 서성환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품질이었다. 이익도 중요했지만 사람들의 신뢰는 한번 잃으면 그대로 끝이라는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 개성 상인들의 상도덕을 통해서 이미 깨우친 바 있었다. 긴 안목으로 볼 때 당장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 곧 소비자들의 신뢰와 좋은 평가였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첫걸음도 품질이었다. 문제는 원료 확보였다. 개성 시절 어머니가 확보해두었던 원료를 한껏 챙겨서 서울로 올라왔던 서성환도 입성 초기 잠깐 마음을 놓았을 뿐, 원료 확보를 둘러싼 어려움은 개성이나 서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예비 원료까지 이내 바닥을 보였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 서울에서 믿고 의지할 게 없었기에 더욱 절박했다. 서성환은 우수한 원료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로 고심했지만 답이 쉽게 나올 리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매달려도 쉽게 풀리지 않던 원료 확보의 열쇠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 무렵 화장품 원료는 광복이 되자 물러간 일본 화장품 회사가 남기고 간 것, 태평양전쟁 끝 무렵 일본군에서 비행기 윤활유로 쓰다가 남겨둔 피마자유, 그 밖에 출처가 명확지 않은 원료 따위가 시중 거간꾼들에 의해 거래되고 있었다. 그마저도 손쉽게 구할 수 없어 동분서주하던 차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공장 창고에서 다량의 원료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광복을 맞은 화장품 업계 호경기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국산 화장품 말고는 아직 외래품이 들어오지 않았던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나올 만했다. 판매업자들은 생산공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상당한 공을 들여야 제품을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윤도 꽤 좋았다. 당시 고객들에게 새로 나오는 제품은 요즈음의 이른바 ‘신상’이나 다름없었다. 서성환은 제품에 김재현백화점과 베이징에서 접했던 고급 제품들처럼 산뜻한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인쇄소와 일본 브로커까지 찾아다니며 만만치 않은 비용과 어려움 끝에 그는 비로소 완벽한 옷을 입은 제품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쏟아 세상에 선보인 첫 제품이 바로 ‘메로디 크림’이었다. 고집스러우리만치 남다른 품질을 지향하는 장인정신과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메로디 크림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전쟁과 ABC 포마드

메로디 크림 덕분으로 차곡차곡 사업 성과가 쌓여나갈 즈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포성이 울렸다.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UN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고, 그 길로 38선을 돌파, 10월 19일 평양에 다다랐다. 그러나 곧 끝날 것 같았던 전세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다시 역전되었다. 이때 서성환은 피란 갔던 개성 처갓집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1·4후퇴가 시작되었다. 서성환은 짐을 꾸려 부산행 피란 열차에 몸을 실었다. 피란 짐 속에는 개성으로 피란할 때 집 마당에 묻어두었던 향료도 소중히 갈무리되어 있었다. 1951년 부산은 밀려 내려온 피란민으로 또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끼니를 해결하고 기대어 잠잘 곳을 마련하는 일로 분주했다. 서성환은 우선 부산의 거래처였던 동광동 도매상 최유대를 찾아갔다. 최유대의 배려 덕분에 서성환 가족은 그의 가게 2층에 가까스로 임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부산에는 남대문시장의 거래처나 도매상들도 내려와 있었다. 서국배와 피란 온 여공들도 하나둘 만났다. 얼마 뒤 최유대의 도움을 받아 초량동에 작은 기와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안전한 피란처인 그곳에서 서성환은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조붓한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지냈고 조금 넓은 방에서는 제품을 만들었다. 그 방은 밤이 되면 여공들 숙소이기도 했다. 피란지 부산에서는 서성환 부부와 변응주, 서국배, 그리고 여직원 4명이 일했다. 이때 만든 제품은 작은 스테인리스 이중솥에 글리세린을 끓이고 향료 등을 첨가한 뒤 큰 그릇에 펴서 왕대나무로 저어 식힌 다음 병에 넣는 공정을 거쳐 생산했다. 이곳에서 ‘아데나 크림’과 포마드를 만들었다. 아데나 크림은 이름은 물론 상표까지 일제 크림을 그대로 본뜬 짝퉁 제품이었다.

상표에 영어로 ‘태평양’이라고 표기하기는 했지만 회사 이름을 밝힐 수는 없었다. 오른쪽 아래 작은 글씨로 표기한 ‘K37’이 바로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의미하는 일종의 비표였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없는 객지에서 맨주먹 하나로 다시 시작해야 했던 서성환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도매상 최유대는 서성환을 믿고 선금을 내주었다. 수소문 끝에 만난 포장재업체 윤인복 사장이나 용기업체 천광산업에서는 신용 하나만 믿고 외상으로 부자재들을 밀어 주었다. 그렇게 만든 제품은 서성환이 피란지 부산에서 정착하는 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특히 남성용 포마드는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일제강점기 끝 무렵까지만 해도 젊은 남성들은 요즈음 스포츠머리에 가까운 이른바 상고머리가 일반적인 머리 모양이어서 머리를 치장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 남성들 머리 모양이 일변했다. 미군 주둔과 함께 긴 윗머리에 윤기 나는 반고체 상태의 머릿기름, 곧 포마드를 발라 좌우로 갈라붙이는 그들의 헤어스타일이 신식이요 양풍(洋風)으로 인식되면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수요가 공급을 능가하자 일손이 모자랐다. 서성환은 인천에서 교직생활을 하던 처남 변영일을 내려오도록 했고, 먼 조카인 서일배도 합류시켰다.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변응주에게 관리, 변영일에게 생산 연구, 서국배와 서일배에게는 판매를 맡도록 했다. 일이 체계를 잡아가면서 제품 생산에 속도가 붙었다.

그래도 서성환의 일은 줄지 않았다. 인원을 늘렸다고는 해도 원료 구매와 제조는 물론 포장·판매·납품·수금까지 서성환이 직접 관여해야 했다. 1인6역을 감당해야 할 만큼 서성환은 일에 파묻혀 지냈다. 일 말고는 한눈 한번 팔 겨를도 없었다. 그때까지 판매되던 국산 포마드 주원료는 바셀린과 파라핀왁스, 유동 파라핀 등 주로 광물성 물질이었다. 광물성 포마드는 머리를 감아도 끈적이는 성분이 깨끗이 빠지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충분히 정제된 원료를 구입하기 어려웠기에 장기간 쓰게 되면 모발이 누렇게 변색되기도 했다. 우선 날마다 포마드를 쓰는 서성환 자신부터 제품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을까? 마침 일본 쪽에서는 식물성 포마드가 유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성환은 우선 밀수품으로 들어오는 일본 제품을 구입해 써 보았다. 과연 부드럽고 윤기도 나고 향기로운 포마드였다. 서성환은 자신이 생산하는 포마드 단점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런 방법 저런 공식을 대입해 가며 실험에 매달렸다.

고정일 소설가소설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