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밭에서 묘목을 살펴보는 서성환 회장.
녹차밭에서 묘목을 살펴보는 서성환 회장.

1970년대 태평양은 국내 화장품시장 70%를 차지했다. 서성환은 태평양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서성환은 한 우물만 파다가 자칫 쇠퇴의 길을 밟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더 이상 성장이 어렵다는 우려감에 휩싸여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다.

금융·서비스 등 3차산업에 비중을 두고 다각화를 추진한 결과 1990년대 초 태평양은 모두 25개 계열사를 보유하는 거대기업이 되었다. 외형으로만 본다면 놀라운 성장과 확장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인수하거나 설립한 회사들이 대부분 부진의 늪에서 저조한 실적으로 태평양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1991년 5월 13일 수원공장에서 파업 중이던 노조 조합원들이 본사를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무렵 국내 산업계에 확산되어 가던 노동운동과 노사분규의 파도를 태평양도 피해갈 수 없었다.

파업사태는 25일 만에 마무리되었지만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보이지 않는 형국이었다. 직원들의 파업보다 더 큰 문제는 회사의 경영상황이 악화되면서 부실 계열사들의 채무보증을 서던 태평양도 자금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성환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는 끝내 버릴 수 없는 존재 이유로의 회귀, 즉 소명으로의 복귀라는 답을 얻었다.

“앞으로도 나는 화장품을 할 것이다. 아니, 다시 태어나도 어머니가 일으킨 화장품 사업을 할 것이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이것이 최대 위기를 돌파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답이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일하던 서성환에게 ‘위험 사인’이 켜졌다. 1991년의 시련이 그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폐암이라는 무서운 병마가 그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서성환의 나이 68세. 폐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지 불과 45일 만에 그는 다시 회사에 출근했다. 다행히 사업 구조조정이 마무리되고 있었고, 기업 내부혁신도 서경배 대표의 주도하에 흔들림 없이 진행 중에 있었다. 2002년 말 서성환은 아들 서경배와 녹차 한 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서성환이 입을 열었다.

“이제 회사의 의사 결정은 네가 했으면 싶다.”

“상하이 말고 펑톈으로 진출하자”

2001년 흥미로운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국내 ‘최장기 근속자’로 그때 78세이던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선정된 것이다. 서성환은 56년이 넘게 한 직장에서 일해 퇴직금만 28억원이 넘었다. ‘한우물’ 경영을 중시하는 개성상인의 기질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1980년대 들어서며 이미 중국 시장을 경험한 바 있는 서성환은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크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었지만, 서성환은 임원들에게 수시로 당부했다. 중국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홍콩과 대만에 직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성환의 예상대로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었고, 우리 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특히 화장품은 다른 품목보다 규제 장벽도 많았고 관세도 높았다. 방법은 현지에 생산공장을 설립하고 시장에 진출하는 것뿐이었다. 세계 화장품 회사들이 상하이에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생산공장을 건립하고 있었다. 태평양도 조사팀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합작 법인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서성환의 생각은 달랐다.

“상하이 말고 펑톈으로 진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펑톈은 선양(瀋陽)의 옛 지명이었다. 서성환은 만군 시절 신의주를 거쳐 선양을 통과하며 강행군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서성환이 선양을 지목한 이유는 과거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는 시세이도나 크리스챤디올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시장을 선점한 상태여서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컸다. 반면 중국 동북 3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선양은 상대적으로 경쟁사들의 관심밖에 있어서 초기 안정적 진입이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또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중국 심장부에서 사업하기 전에 중국 시장을 이해하는 마케팅 학습장으로 선양이 최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먼저 중국 외곽 지역에서 경험을 쌓은 뒤 중국 중심부로 들어가는 우회 전략을 세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적중했다. 처음부터 상하이로 들어간 기업들은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아모레는 상대적으로 중국에 대해 훨씬 깊이 알아가기 시작했다. 선양에서의 사업이 안정화되자 아모레는 거점을 하나둘씩 확대, 1995년에는 다롄, 1996년에는 창춘과 하얼빈에 분공사를 세웠다. 국내에서 숨가쁘게 달려왔던 행보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서서히 느린 걸음으로 하나씩하나씩 탄탄하게 징검다리를 놓듯 확장해 나아간 것이다.

“차 사업은 당장 돈이 벌리는 사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공하면 소비자나 국민한테 아모레 이미지가 달라질 것입니다. 계속 적자가 날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사업을 추진할 테니 여러분들은 지켜봐주세요.”

1979년 갑자기 소집된 이사회에서 서성환은 녹차사업을 공식화했다. 태평양 입장에서 차 사업 진출은 그야말로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회사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서성환의 차 사업 결정은 프랑스 견학 이후 유달리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이미 몇십 년 전부터 구상하던 일이었다. 녹차사업에 뛰어든 서성환은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나갔다. 먼저 사람을 구하고 땅을 구해 밭을 일궜다. 다음으로 시설을 세우고 기술을 도입해 판매에 나섰다. 평생을 기다린 사업이었기에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사 안에서는 연구실 출신 서항원으로부터 전체 사업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조언을 들었다. 또 차나무 재배와 관련된 전문 기술은 제주대학 허인옥 교수로부터 자문을 구했다. 허인옥과 서성환은 이미 20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가 하면 부지 조성과 농원 개간은 그즈음 제주도에서 농지관리를 하던 공무원 박문기가 맡았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제주도 땅을 국내 최대 다원(茶園)으로 몸소 손으로 일군 농부는 김원경이었다. 서성환은 이들에게 자신의 평생 집념인 녹차사업에 대해 설명했고, 이들은 모두 그를 믿고 아낌없이 힘을 보탰다.

어머니에게 배운 집념으로 일궈낸 녹차사업

녹차사업이야말로 서성환의 건강한 신념과 뚝심에서 시작되고 지속할 수 있었던 문화사업이었다. 서성환에게 녹차사업은 돈 버는 사업이 아니었다. 계승하고 싶은 우리의 ‘전통’이었고, 발전시키고 싶은 우리의 ‘문화’ 그 자체였다.

서성환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늘 고민했다. 1959년 태평양화학공업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바꾼 뒤 매년 배당을 실시했다. 배당이야말로 주주들에 대한 기업의 기본적 예의라고 생각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배당률을 높인 것은 오늘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인류에 봉사한다는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기업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윤리는 그의 평생신념이었던 셈이다.

서성환은 196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성환장학금’을 중앙대학교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10년 뒤에는 태평양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해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 학술연구 지원사업, 여성생활문화를 개척하는 논문공모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그 무렵 장학활동에 대해 “회사의 재무구조에 상관없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우량기업”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이어서 학교법인 태평양학원을 설립하고 태평양박물관을 개관하는 등 남보다 한발 앞서갔다. 그리고 서성환은 따로 복지재단을 설립하고 관장 전완길 집필 한국 최초 ‘한국화장문화사’를 발간한다. 사회공헌활동을 복지 분야로까지 넓혀 나갔다. 이같은 서성환의 신념은 2000년대 들어 아모레퍼시픽이 교육, 학술 분야는 물론 문화, 복지, 환경, 여성 등 다양한 분야로 공헌활동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이후 직접 공헌활동을 펼치는 것은 물론 공익재단 설립을 도와 간접 후원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특히 2010년에 10년째를 맞은 한국유방건강재단의 핑크리본 캠페인은 마라톤 대회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대표적 공익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아모레퍼시픽은 2000년 유방암 퇴치사업을 펼치기 위해 관련 의학자를 비롯해 언론계, 재계, 법조계 등 각계 인사들의 뜻을 모으고 전액을 출자, 비영리 공익재단을 세웠다. 재단을 설립하고는 해마다 재단운영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과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마라톤대회는 물론 핑크리본 자선콘서트, 건강강좌 등을 통해 아모레퍼시픽은 여성을 위한 사회공헌활동을 대표하는 기업이 됐다. 2003년 1월 9일,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은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기 직전 아들에게 남긴 말은 어머니 윤독정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얘야, 세계가 사랑하는 아모레, 얼마나 좋으냐, 부디 일본에 앞섬을 언제나 잊지 말아라.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힘을 써라.”

이제까지 여자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여 화장을 했지만 이제 남자들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화장을 한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영원한 인간의 아름다운 본능인가.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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