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의 신용호
청년 시절의 신용호

“조선 최고의 서점이라는 박문서관 수준이 이 정도라니….”

신용호는 크게 탄식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종로 거리는 광복된 조국에 대한 희망의 물결로 넘쳐나고 있었다. 신용호는 첫 출판 ‘여운형 선생 투쟁사’를 전국 서점으로 발송하고 박문서관을 가장 먼저 찾았다. 안쪽 계산대에 책임자로 보이는 이 앞으로 가서 꾸벅 인사를 하고는 명함을 내밀었다. 받아든 명함을 들여다보던 그가 신용호 얼굴을 멀끔히 쳐다보며 묻는다.

민주문화사

“민주문화사라니, 무슨 정치운동 단체요?”

“아니, 출판사인데요. 저희가 첫 출판한 ‘여운형 선생 투쟁사’를 지지난주에 이곳에 보냈으니 도착했을 겁니다.”

“무슨 책을 의논도 없이 함부로 보낸단 말이오? 그런 책으로 장사가 되겠소?”

신용호는 말문이 막히며 얼굴이 붉어졌다.

“광복된 조국에 뭔가 기여하고자 젊은이들이 읽을 만한 책으로 애국자인 여운형 선생의 투쟁기를 처음 낸 것입니다.”

지배인은 비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답답한 사람…, 그런 책은 돈 벌기는커녕 돈을 마구 퍼부어 그냥 뿌리는 책이란 말이오. 출판사로 성공하려면 베스트셀러를 만들어야지, 정치투쟁사로 무슨 장사를 한단 말이오? 출판업도 장사가 아니오? 무조건 잘 팔려야 돈을 벌고 그래야 사업이 되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인기 소설책을 만들어요. 예를 들면 오자키 고요 연애소설 ‘곤지키야사(金色夜叉)’, 우리나라에는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데 없어서 못 판단 말이오. 그런 책을 만들어 갖고 오시오.”

그 말에 당황하여 얼굴이 벌개진 신용호는 발길 차이는 구석 책장 맨 아래칸에 초라하게 몇 권 꽂혀 있는 자신의 책을 발견했다.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출판에 대한 큰 꿈이 산산이 부서져 내림을 느꼈다. ‘광복된 이 땅에서 어찌 왜놈의 연애소설 따위를 만들어야 환영받는단 말인가!’ 신용호는 크게 탄식을 하면서 맥없이 걸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보시오! 신사 양반, 나 좀 봐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문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누가 신용호를 불렀다. 점원인 듯한 젊은이가 뒤를 따라나와 바짝 다가와서는 속삭이듯 말했다.

“답답한 양반, 지배인에게 국물 좀 써요. 그러면 정문 맨 앞자리에 진열할 수 있어요.”

신용호는 기가 막혔다. ‘여운형 선생 투쟁사’를 팔기 위해 뇌물을 쓰라는 게 아닌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잠깐 그를 노려보다가는 고개를 홱 돌려 걸음을 재촉해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신용호의 출판사 꿈은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뒤 몇 가지 사업을 벌이다가 6·25전쟁을 겪고 나서 대한교육보험을 세우게 된다.

이병철·정진숙·신용호는 절친한 사이였다. 셋이서 골프장에 나갈 때는 늘 류태영을 불러 동행했다. 류태영은 막내로 그들을 잘 따랐다. 그 무렵 류태영은 박정희 대통령 부름을 받아 막걸리 잔을 나누며 가난한 농업국가인 한국을 어떻게 하면 덴마크나 이스라엘처럼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토론으로 밤을 지샌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그룬트비, 키부츠 정신을 찾아서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도입에 참여한, 이스라엘 키부츠 전문가이자 건국대 부총장을 지낸 류태영 박사. 그는 전북 임실에서 가난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늦깎이에 겨우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신문배달,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류태영은 1952년 유달영이 쓴 ‘새 역사를 위하여’를 몇 번이나 읽었다. 가난한 덴마크가 세계적 복지국가가 되는 과정을 다룬 책이었다.

류태영은 낙농국가로 나라를 일으킨 달가스와 그룬트비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농업국가인 우리나라가 이렇게 가난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9세에게 무작정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덴마크 왕실 장학생으로 그곳에서 2년간, 가난했던 덴마크가 그룬트비정신운동으로 국민을 깨우치고 세계적 낙농복지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배우게 된다. 그 뒤 류태영은 다시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다. 집단농장 키부츠를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그때도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크게 감동한 대통령 특명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 정부 장학금을 받으면서 그곳 사막의 키부츠 농장 운동을 연구하면서 배우게 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류태영은 건국대 축산대학 정신교육 책임자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농촌운동을 이끌었고, 아침에는 KBS 농가방송을 맡았는데, 이 방송을 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어느 날 류태영은 청와대로 불려가 박정희 대통령 부부에게 우리나라 농촌이 잘살 수 있는 방법으로 덴마크와 이스라엘 예를 들면서 국민정신 개조운동을 적극 추천하게 된다. 먼저 국민의식부터 바꿔야 나라경제가 발전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류태영은 청와대로 출근하게 된다. 이렇게 1970년 새마을운동이 본격 시작되었다. 그리고 류태영은 시골 출신으로 가난한 농촌에 관심이 많은 신용호와의 만남으로, 그는 평생 그의 참모 역할을 한다. 또한 1993년부터 12년간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교보문고 탄생에 자문 역할을 하게 된다.

1981년 6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선 대한교육보험 빌딩에서는 많은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건물 준공식과 교보문고 개점식이 열렸다. 가난한 시골 소년 신용호가 오랫동안 꾸어온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그날 신용호는 삼성그룹 이병철, 을유문화사 정진숙의 손을 좌우로 꼭 잡고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울 삼성문고를 선뜻 양보해준 이병철, 종로 거리에 50여개가 넘는 서점들 반발을 잠재워 준 정진숙 등이 교보문고 탄생을 도와 신용호의 책사랑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날 신용호는 이병철·정진숙·류태영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교보문고를 베스트셀러 유행서들보다 일반 서점에서 살 수 없는, 1년에 단 한 권 팔려도 좋은 책과, 대한민국 문화를 이끄는 세계 고전 인문학서들이 두루 갖춰진 서점으로 키워 나가겠습니다.”

대산(大山) 신용호(愼鏞虎)는 1917년 8월 11일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에서 아버지 신예범 어머니 류매순의 여섯 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해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큰형 신용국도 영암 항일농민운동에 참여하는 등 반일운동으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셋째형 신용원은 일본 도쿄음악대학을 졸업한 음악가였는데, 유학 시절 독립운동에 참가한 전력으로 늘 감시를 당하는 등 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괴로워했다.

용호의 아버지는 과거를 봐 벼슬을 하려 했지만 개화기에 그 제도가 폐지되어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가 살림을 도맡았으므로 집안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신용호가 8살이 되던 해였다. 여느 아이들처럼 보통학교에 들어갈 마음에 한창 들떠 지내던 시기인데 몸에 이상이 왔다. 어머니는 용호를 의원에게 데려갔다. 용호가 깊은 폐병에 걸렸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크게 상심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 풀석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만 해도 폐병은 한번 걸리면 살아나지 못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좌절된 보통학교 입학

민주문화사의 첫 책 ‘여운형 선생 투쟁사’.
민주문화사의 첫 책 ‘여운형 선생 투쟁사’.

그러나 신용호는 몇 해 뒤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어머니의 정성과 자신의 의지로 자연 치유되었던 것이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제 그토록 바라던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즈음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웠다. 아버지는 생각다 못해 목포로 이사를 가기로 한다. 마침 목포에 사는 친구에게서 하숙을 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 용호가 12살 되던 해였다. 그즈음 목포는 전국 6대 도시 안에 들 만큼 큰 무역 항구였다. 무엇보다 신용호는 집 앞에 북교보통학교가 있다는 게 기뻤다.

그는 폐병이 깊어졌을 때, 죽기 전에 다른 애들처럼 딱 하루만이라도 학교에 다녀보는 게 소원이었다. 아버지는 용호를 북교보통학교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입학 담당자가 용호의 나이가 너무 많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웃 영흥보통학교에서도 같은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한다. 용호의 친구들은 어느덧 4학년이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들었다. 학교에 갈 수 없다면 차라리 다시 폐병을 앓아 죽어버렸으면 싶었다.

아버지는 늘 집 밖에 나가 있었고 어머니 홀로 하숙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허리가 휠 정도였다. 실의에 빠져 몇 날 며칠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신용호는 자신이 철없게 여겨졌다. 더는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용호가 하숙 일에 발 벗고 나서서 힘든 일도 가리지 않고 돕자 어머니의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힘겹던 살림도 차츰 나아져 갔다. 어느 날 신용호는 목포상업중학교에 다니는 하숙생 강일구에게 미국 링컨 대통령에 대해 물었다. 강일구와는 한 살 차이라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강일구는 용호와 함께 유달산에 올라 목포 앞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링컨은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어. 그런데 일하면서 틈만 나면 책을 읽었지. 대백과사전을 몽땅 독파할 정도여서 학교를 나온 사람들보다 지식이 훨씬 넓고 깊었어. 대통령이 돼서는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켰어.”

“노예라니?”

“백인들이 개나 소처럼 부려먹은 흑인을 말하는 거야. 어쩌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조선 사람들도 노예나 다름없는지도 몰라. 네 아버지께서 소작쟁의 운동을 하시는 것도 소처럼 부려지며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일이 아닐까?”

신용호가 대꾸하지 않자 강일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도 배워야 일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야. 용호도 마찬가지야. 자존심 상하겠지만 먼저 동생 교과서로 공부를 시작해 보는 게 어때? 조선어와 일본어도 배우고, 역사와 산수도 열심히 공부하도록 해. 어려운 건 나한테 물어보면 언제든 가르쳐 줄게.”

신용호는 강일구가 고맙고 친형처럼 든든했다.

독학으로 깨친 실력

신용호는 강일구와 헤어진 뒤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불행한 처지를 원망만 했지 스스로 딛고 일어설 생각은 한 번도 못했다. 남몰래 부모님을 탓하기도 했다. 낯이 뜨거워졌다. 그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이제부터 링컨처럼 책을 스승이자 학교로 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 뒤 동생 용희의 책을 흘끔흘끔 넘보기 시작하다가 틈만 나면 몰래 들춰 봤다. 용희는 처음엔 그러는 형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형 용호가 책을 차지하는 시간이 차츰 늘어나자 투정을 부렸다.

어머니는 며칠 뒤 교과서 몇 권을 구해 왔다. 그날부터 신용호는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그는 독학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신용호는 교과서 말고 다른 책에도 관심을 넓혀 갔다. 그러나 거의 일본어로 쓰여 있어 눈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용호는 ‘일본어 첫걸음 독본’을 구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한자를 잘 몰라 진도가 더뎠다. 그래서 먼저 ‘천자문’을 익히기로 했다. 곧 ‘천자문’을 읽고 쓰게 되면서 자연스레 일본어를 읽고 풀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3년이 지나자 보통학교 졸업생 수준이 됐다. 그는 공부를 멈추지 않고 곧바로 중학교 과정으로 들어갔다. 하숙생들이 구해다 준 교과서로 1학년부터 공부할 수 있었다. 용호는 16살 때 중학교 3학년 공부까지 마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목포상업중학교 3학년 강일구가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용호야, 너 우리 학교에서 시험 한번 쳐보지 않겠니?”

“내가 어떻게 시험을….”

“아니야, 오늘 학교에서 기말시험을 봤는데 마침 네 생각이 나서 선생님께 말씀드렸어.” 용호는 시험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제껏 혼자서 공부에만 매진해 왔지 한 번도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지 못했다. 시험을 보면 그동안 공부를 제대로 해왔는지 확인할 기회가 될 것만 같았다. 용호는 설레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강일구를 따라 목포상업중학교에 갔다. 선생님께서 늦게까지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 신용호는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시험을 치르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풀어 나갈 때마다 정말로 중학생이 된 것만 같아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며 더욱 침착하려 애썼다. 선생님은 자상하게 채점까지 해주었다. 채점을 마친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면서 일구와 용호에게 말했다.

“이거 놀라운 걸! 성적이 우리 학생들로 치자면 중상위권이야.”

“강철왕 카네기 같은 사람이 되겠다”

강일구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용호를 부둥켜안았다. 얼떨떨한 나머지 용호는 교실 천장만 멍하니 쳐다봤다. 밤잠을 쫓으며 홀로 공부에 열중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글썽였다.

신용호는 20살이 되면 반드시 홀로 서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1000일 남았어!”

20살이 되려면 몇 날이나 더 있어야 할까 헤아리던 용호가 불쑥 내뱉었다. 폐병과 싸우던 시기, 시간이 천금처럼 여겨진 때가 있었다. 신용호는 버릇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자!’ 이 말을 중얼댔다. 그는 1000일을 귀하게 쓸 방법을 궁리했다. 독학으로 나아가리라고 결심했을 때 ‘책이 스승이자 학교다!’라고 굳게 다짐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1000일 독서!”

용호는 무릎을 탁 쳤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길은 오직 독서밖에 없었다. 어머니 하숙 일을 도우면서도 책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다. 하루 네 시간 넘게 자는 날은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쏟아지는 잠을 쫓으려고 한겨울에도 군불을 때지 않아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하숙생은 거의 부잣집 자제들이라 그들 방에는 책이 많았다. 덕분에 용호는 언제든지 마음껏 책을 빌려 볼 수 있었다. 빌린 책을 하숙생에게 가져다주면 하숙방에서는 밤새워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숙 일이 끝나면 도서관에 들렀다. 일본인이 세운 목포부립도서관에 가면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신간들도 쉽게 빌려볼 수 있었다.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은 스마일스가 쓴 ‘서국입지론(西國立志論)’(‘자조론’ 일본어판)이었다. 이 책을 세 번이나 거듭 읽었다.

그는 1000일 동안 꾸준히 책들을 독파해 나가며 삶의 의미와 살아갈 방향, 앞날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때 신용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은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을 비롯해 이광수 ‘흙’, 나쓰메 소세키 ‘봇짱’, 톨스토이 ‘부활’, 링컨·헬렌 켈러·에디슨·강철왕 카네기 등의 전기였다. 그렇다고 그는 마냥 책만 읽지는 않았다. 신용호는 세상 물정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목포 시내 곳곳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남교동 중앙시장과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부둣가도 둘러봤다. 일본으로 오가는 물자들을 따져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장 보는 일을 용호에게 모두 맡겼다. 용호는 질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방법이 있었다. 수없이 이 가게 저 가게 발품을 팔며 꼼꼼하게 따져보는 습관 덕분이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20살이 되었다. 1000일 독서가 끝나면 집을 떠나 홀로서기로 결심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강철왕 카네기 같은 사업가가 되는 거야!’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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