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6월 교보문고 광화문점 개점식 테이프 커팅 모습. 가운데가 신용호, 오른쪽 두 번째가 이도선.
1981년 6월 교보문고 광화문점 개점식 테이프 커팅 모습. 가운데가 신용호, 오른쪽 두 번째가 이도선.

신용호의 열성과 집념으로 1958년 이 나라 6대 생보사 가운데 막둥이로 태어난 대한교육보험은 창립 5년 만에 보유계약 56억원으로 업계 3위, 1964년 보유계약 100억원 돌파로 업계 2위에 오른 뒤 마침내 1967년 설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올라섰다. 세계 보험 역사에서도 이처럼 빠른 성장은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운 기록이었다. 대한교육보험이 보험업계 1위에 오르자 신용호는 미련 없이 사장에서 이사회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국 사업현장을 직접 돌아보며 보험사업의 전망을 살피고 새로운 계획을 구상해나갔다.

신용호는 지독하다 싶을 만큼 완벽하고 집요하다는 평을 받는다. 1977년 회장이 된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신입사원 면접에 직접 참여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도 실적이 저조한 본사 부장, 실장, 임원까지 그만두게 한 뒤 ‘급료는 후불로 주겠다’는 광고를 통해 간부사원을 다시 구한 일화는 오늘날까지 재계 신화처럼 전해진다. 2000년 맏아들 신창재가 교보생명 회장에 취임하기까지 33년 동안 사장이 무려 여남은 차례나 바뀌었다. 경영 안정을 위해 최고 경영진을 쉽게 바꾸지 않는 업계 관행과는 다른 것이다. 교보 신용호의 임원 인사는 상식을 뛰어넘어 기발하고 파격적이란 평이 나오는 이유이다.

대한교육보험을 창업하고 초창기 몹시 경영이 어려웠을 때 신용호는 한 인재를 만나게 된다. 바로 황해도 출신 박달규로, 그는 동성고등학교를 나와 6·25전쟁 중인 대구 피란 시절 출판계 선각 김천운의 ‘한국출판사’에서 경험을 닦아 풍문사라는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신용호는 그를 눈여겨보고 그가 보험 판매에 탐구심과 천재성이 있음을 알아보고 그를 초빙한다. 박달규는 엄청난 독서력을 갖춘 데다가 보험 판매 전문서적을 비롯해 심리학에 조예가 깊어 대중심리를 꿰뚫어보는 혜안과 설득에 비범한 인물이었다. 박달규는 입사한 뒤 사원 교육에 빛을 내면서 삼성 이병철이 탐을 낼 만큼 수많은 우수한 세일즈 인재들을 키워낸다. 그는 단숨에 상무 직위에 오른다. 대한교육보험이 그즈음 성장과 발전을 거듭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박달규와 같은 인간경영 장자방이 신용호를 도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0년 들어 경제성장과 함께 사교육비가 늘어나면서 교육보험만으로는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경쟁력이 떨어지자 1995년 ‘교보생명’으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자산이 늘면서 관련 계열사도 잇따라 세웠으니 모두 보험으로 맡긴 고객의 돈을 운용하기 위한 금융 계열사였다.

22층 건물 5개 층을 잘라내라

9개 자회사 가운데 금융과 동떨어진 업종이 하나 있다. 바로 ‘교보문고’이다. 서점의 대형화 추세가 형성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후반 광화문 네거리에 대형 빌딩이 들어서고 있었다. 1977년부터 종로1가 1번지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 격으로 짓기 시작한 이 건물은 신용호의 단호한 의지로 대한교육보험 사옥으로 세워져 갔다. 대한교육보험을 창립하면서 임직원들에게 선언했었다. “25년 이내 서울 한복판에 이 나라 최고 건물을 짓겠다” 신용호는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광화문 세종로 네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교보빌딩의 하늘로 치솟는 위용에 누구나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용호는 새벽부터 광화문 공사 현장에 나와 작업을 독려하고, 회현동 사무실로 돌아오곤 했다. 22층까지 하늘로 솟구쳐 오른 빌딩의 외장 공사가 마무리 단계인 터여서, 신용호는 물론이고 공사 현장 노동자들까지 가슴 깊이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신용호는 몇몇 서류를 검토한 뒤 빌딩 조감도를 다시 들여다보며 회상에 잠겼다. 초등학교도 가지 못할 만큼 가난에 시달린 험난했던 지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자 스스로도 대견한 감회가 가슴속에 솟구쳤다. 그때였다. 인터폰이 울리며 청와대에서 손님이 오셨다는 말과 함께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사나이들이 성큼 들어섰다. 청와대 경호실의 고위 간부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옥을 17층으로 낮춰주십시오. 대통령 각하의 경호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순간 신용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22층까지 이미 쌓아올려 완공단계인 건물을 17층으로 낮추라니! 빌딩이 무슨 두부모인가. 어떻게 다섯 개 층을 잘라낸단 말인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희 빌딩은 법적 절차에 따라서 정식 허가를 받아….”

“신 회장님. 대통령 각하의 경호와 관련된 사항입니다. 그리고 이건 차지철 경호실장님의 특별지시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짓기 전에 이런 말씀이라도 있었다면 그에 따랐겠지만….”

“아무튼 분명히 경호실장님의 지시를 전해 올렸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조속히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청천벽력 같은 폭탄선언에 신용호는 온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연락을 받은 임원들이 하나둘 회장실로 들어섰다.

“모두들 걱정 말고 당분간 함구해주시오. 모든 문제를 내게 맡겨주십시오. 다만 공사는 문제가 해결될 동안 일단 중단시키세요.” 그 결연함에 임원들은 모두 불안감을 느꼈다. 신용호 성격에 결코 5개 층을 잘라내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체구는 작지만 뚝심과 강단으로 똘똘 뭉친 ‘작은 거인’으로 한번 정한 목표는 절대로 바꾸지 않는 인물 대산 신용호였다. 임원들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물러갔다.

신용호는 눈을 지그시 감은 뒤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곱씹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하나는 교보빌딩을 짓고 있는 자리에 호텔을 지으라는 정부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었다. 신용호가 어렵사리 부지 매입을 끝내자 정부 고위 관계자가 호텔을 지어줄 것을 제의했다. 서울 중심가에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호텔이 턱없이 모자랐고, 국제회의와 같은 큰 행사를 열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대한교육보험이 광화문 부지 매입에 나서자 큰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용호는 이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국사를 논하는 청와대와 광화문 바로 앞에 숙박업 호텔을 짓는다는 것은 대한민국 위상과 자긍심을 깎아내리는 행위라고 여겼다.

‘청와대에서 결정한 일이라면 대통령께 직접 간청해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박정희 대통령은 온몸을 바쳐 나라에 헌신하는 사람이라 자신의 굳은 의지를 이해해주리라는 희망이 가슴속에 샘솟았다. 한순간 경희대학교 대학원장 김점곤을 떠올렸다. 화순 출신으로 그는 박정희의 선배다. 여순반란사건 때 백선엽과 함께 박정희를 구해준 예비역 장군이기도 했다. 그가 나서도 안 된다면 차라리 내가 죽을 각오로 권력의 부당함을 온 국민에 호소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베스트셀러보다 양서를 소중히

교보문고 창립자 대산 신용호
교보문고 창립자 대산 신용호

그러나 이것은 내 일이다. 내가 나서서 직접 해결해야만 한다. 가슴에 굳건한 신념이 불타올랐다. 마침내 신용호는 비장한 마음으로 결단을 내려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저는 국법이 정한 대로 대한교육보험을 세운 뒤 헌법에 바탕을 둔 관련 법령을 털끝만큼도 어기지 않았고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 왔으며, 각하께서 주시는 표창도 여러 차례 받았고, 국민훈장까지 수여한 사람입니다. 이제 완성 단계에 있는 저희 대한교육보험의 사옥 건축은 관계법에 따라 허가를 받아 티끌만 한 위법도 없이 공사를 진행해 지금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청와대 경호실에서 22층 건물을 17층으로, 5개 층을 잘라내라고 합니다. 각하의 경호상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짓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지시가 있었다면 저는 반드시 그 지시에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완공이 다 된 오늘 법적으로 아무 하자도 없는 건물을 5개 층을 잘라내라는 명령을 받고 보니 그저 암담할 뿐입니다. 이제 와서 건물을 잘라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대통령께서 만든 법을 자르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행동을 합법화시켜 주는 것이니, 앞으로 남발될 비슷한 불법행위를 무슨 명분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나라와 각하, 그리고 법의 권위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합법적으로 쌓은 사옥을 자르라면 건물을 자르는 대신 저는 죽을 각오로 그 부당함에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님께서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말씀 올립니다.”

편지를 쓰고 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 일로 어떠한 고초를 겪게 되더라도 결단코 후회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청와대 경호실 고위 간부가 다시 신용호를 찾아왔다.

“각하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계획대로 사옥을 완공하세요. 걱정 끼쳐 미안합니다.” 과연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신용호의 용감한 집념과 신념의 의지력이 교보빌딩을 위기에서 지켜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침내 지상 22층에 지하 3층, 건면적 9만2000여㎡(2만7700여평)의 세종로 중앙 이순신·세종대왕 두 동상을 지키는 위용의 교보빌딩이 완공되었다.

1980년 대한교육보험 사옥 준공이 막바지에 이르자 입주 희망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빌딩 지하공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광화문 지하보도와 이어짐으로써 최적의 상권으로 인식, 임차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신용호는 이미 지층 공간에 대한 구상을 마치고 추진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때 신용호는 출판계 큰 어른으로 불리는 대한출판문화협회 정진숙 회장, 출판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는 친형제처럼 자주 어울렸다. 정진숙이 신용호에게 그즈음 출판계의 열악한 현실을 설명해주었다. 자신보다 5살 위인 정진숙을 큰 형님으로 존경하는 신용호는 그의 출판보국 신념을 믿고서 더욱 대형서점 설립을 강력히 밀고 나아갈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교보생명 임직원들은 그 큰 공간을 수익성 있는 사업이나 임대사업에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허가관청인 재무부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신용호는 평생 소망해온 서점 경영을 결심했다. 출판유통사업의 문화적·교육적 기능과 민족자본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일본에 갈 때마다 독서인들로 붐비는 야에스북센터·기노쿠니야서점·산세이도서점·이와나미서점 등 진보초(神保町) 서점가에서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가 만년에 귀국해서 하버드대학에서 특강할 때 패전 일본이 단숨에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두 가지 이유로서 첫째는 도쿄대학, 둘째는 이와나미서점이라고 학생들에게 강의했는데,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신용호는 늘 이 일화를 마음속 깊게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 자리에는 마땅히 고급 상가를 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값진 땅에 책방을 크게 열어 청소년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토록 한다면 대한민국 문화와 교육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 보십시오. 베스트셀러 도서들보다 1년에 단 한 권밖에 팔리지 않는 양서를 소중히 여겨 진열하겠습니다.” 신용호는 손해가 나더라도 청소년 정신역량을 키우는 일인 만큼 자신이 헌신하여 대한민국 국민 독서교육을 떠맡겠다고 설득했다.

1981년 6월 교보문고 광화문점 개점식에 참석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오른쪽)을 맞이하고 있는 신용호 창립자.
1981년 6월 교보문고 광화문점 개점식에 참석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오른쪽)을 맞이하고 있는 신용호 창립자.

세계 문화를 담는 큰 곳간으로

교보문고 창립 준비는 교보빌딩이 준공되던 1980년 시작되었다. 대형서점 설립 계획이 알려지자 대한출판문화협회를 비롯 출판계 모든 인사들은 적극 찬성한 반면, 종로 50여개 서점과 전국서적상연합회는 극렬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윽고 대형서점 설립 관련 찬반논쟁이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등 공론의 대상이 되었다. 서점 설립을 위한 준비팀이 가동돼 실무 검토와 준비를 하는 한편, 종로 서적상들을 무마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신용호는 정진숙과 함께 해나갔다. 이때에 나선 팔십 노구의 정진숙은 출협회장으로서 종로를 비롯 전국 서점들의 반대를 설득하느라 참으로 눈물겨우리만치 애를 썼다.

겨우 안도한 신용호는 이제 누구에게 서점 책임을 맡길 것인가 밤늦도록 고민한 끝에 3선 국회의원 출신 이도선을 떠올렸다. 그는 대학교수직을 초빙받아 새학기 강의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이도선과 신용호는 친선 골프모임에서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을 뿐 깊은 친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선택한 것은 이도선의 열정에 찬 웅변에 감동했고 강력한 추진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의정 활동으로 쌓은 경력과 인맥이 사업 추진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보았던 것이다. 이도선은 교보문고 대표이사에 이어 교보생명 사장과 회장까지 인연을 이어나갔다.

그해 12월 10일 교보빌딩 10층에 자리를 마련, 업무가 시작되었다. 교보문고 설립신고 준비를 비롯한 행정지원은 교보생명에서 전담했다. 신용호와 이도선 임시이사, 교보의 설립준비팀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사전모임을 갖고 사명과 창립이념 제정 등 기본 사항을 논의했다. 사명은 ‘교보문고’로 결정했다. 참석자들은 대형서점에 문고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반대를 했다. 그러나 이도선이 여기서 ‘문고’는 ‘문화의 큰 곳간’이라는 뜻으로, 오로지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위대한 한국 문화, 세계 문화를 함께 담는 거대한 그릇이라며 그 의미를 설명했다. 1980년 12월 24일 마침내 교보문고가 설립, 1981년 6월 1일 대한교육보험 사옥 준공식과 함께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문을 열었다. 지하 1층 규모는 3600여㎡(1100여평)에 이르러 그때 단일층 서점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이날 역사적인 개점식은 신용호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진숙 출협회장, 정관계·언론계 인사 등 많은 축하객과 대한교육보험 임직원, 이도선 사장을 비롯 교보문고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교보문고는 대규모 매장에 국내외 서적 100만권을 확보함으로써 불황에 허덕이는 한국 출판계에 숨통을 터줬고, 다양한 도서들을 골고루 진열해 푸대접받던 학술서 출판사들을 만족시켰으며,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서점업계에도 커다란 자극이 됐다. 누구보다 반긴 것은 독자들이었다. 원하는 책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온 세계 어떤 책이라도 그곳에 가면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과 만나 책 향기 속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서도 만족스러웠다. 그 뒤 대전·성남·대구·부산·부천·강남·잠실·목동 등에 잇따라 지점을 열어나갔다. 교보문고를 찾는 고객 수는 하루 평균 15만명, 연간 5000만명이 넘는다.

신용호는 1981년부터 교보문고에 출판부를 신설 경제·경영·심리학·교육·인문·사회·스포츠·레저·공학·컴퓨터·학술서 등 대학교재를 출판해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5년 창업한 민주문화사를 재건한 것이다. 그는 1991년 대산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해 류태영에게 맡기고 이어서 1992년 대산문화재단, 1997년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을 잇따라 설립해 공익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갔다. 그러던 신용호는 2003년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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