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호 동원호 인도양 출어식에서.
제31호 동원호 인도양 출어식에서.

김재철은 뭍 생활 5개월 만에 지남 2호 선장으로 뽑힌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김재철이 선장이 되기까지는 2년6개월간 그가 보인 성실성과 노력이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그가 참치잡이를 몸소 겪어본 사람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선장이 되기엔 너무 젊었지만 선주는 김재철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산대 출신 가운데 그만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없어서였다. 1961년 1월 7일 김재철은 선장이 되어 지남 2호를 이끌고 선원 22명과 함께 부산을 출발, 3주 만인 1월 31일 사모아에 도착한다. 그 뒤 1962년 5월 7일 되돌아오기까지, 그는 실력을 발휘해 여러 차례 만선의 어획량을 올린다. 뒷날 ‘캡틴 킴’ 또는 ‘J. C. Kim’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선장으로서의 기본 역량을 사모아 어장에서 얻게 된다. 동아일보 1962년 5월 8일자 신문 3면에 ‘제2지남호 귀항: 참치 13만달러어치… 풍어기 날리며’란 제목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김재철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린 첫 번째 신문기사였다. 그리고 놀라운 기록 하나가 발견된다. 그것은 김재철이 쓴 선상일기로, 출어 날짜인 1월 7일부터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선내와 어장 상황, 선장의 역할과 고민 등을 낱낱이 엿볼 수 있다. 힘든 바다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그의 남다른 면모였다.

지남 2호에서 큰 성공을 거둔 김재철은 7개월 뒤 경쟁사인 ㈜동화의 동화 1호 선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김재철이 지남 2호를 떠나게 된 까닭은 약속한 성과의 배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63년 동화 1호 선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김재철은 12개월 동안은 선장으로, 그 나머지는 뭍에서 모두 20개월을 근무한다. 동화 1호 선장 겸 선단장으로 사모아에 출어했을 때도 놀랄 만한 어획량을 올려 ‘캡틴 킴’의 이름을 높인다. 선장의 능력에 따라 회사 운명이 결정되는 사업이 원양어업이다. 따라서 창업 대열에 뛰어든 원양어업 경영자들은 모두 김재철을 스카우트하려 했다. 김재철은 그때 고전을 면치 못하던 고려수산주식회사에서도 10개월간 근무하며 사업 기틀을 잡아준다. 고려수산은 10척의 원양어선을 남태평양 산토 어장에 진출시켰고, 해양대학 출신 선장들도 보내놓은 상태였다. 수산부장으로 발탁된 김재철은 어윤일 회장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해양대 출신들은 상선 전문 인력입니다. 어선 전문 인력과 상선 전문 인력은 근본부터가 다릅니다. 이런 선원 구성으로 일하면 손해만 커질 겁니다. 바꾸셔야 합니다.”

인도양을 헤쳐 나아가다

김재철이 본사 근무를 시작하면서 각 배마다 수지계산표를 작성해 보고하자 회장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남태평양 참치잡이가 돈이 된다는 친구 말에 따라 깊은 고민 없이 뛰어들었던 어윤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재철은 이처럼 경영자들이 저지른 실수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이든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하고, 꼼꼼히 따져 판단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번 내린 결정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도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된다. 뒷날 그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고 파악했으며 반대자나 소수자의 의견도 귀기울이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또 한 명의 공격적인 사업가가 김재철을 끌어가기 위해 적극 나서는 일이 일어난다.

“저 친구를 잡아야겠구나.”

고려원양 창업자 이학수는 1963년 창업 때부터 김재철을 눈여겨봤다. 그의 집요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김재철은 고려원양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된다. 고려원양은 한국 원양어업 역사에서 빠르게 성장했다가 사라진 기업이다. 고려원양의 이학수는 6·25전쟁 직후부터 광명인쇄공사를 운영해오면서 5·16군사정변 때 목숨을 걸고 혁명공약과 포고문을 인쇄했던 사람이다. 그는 1963년 큰돈을 벌 수 있어 보이는 원양어업에 진출하기로 결심을 했다.

이학수는 1966년 4월 230t급 참치어선을 건조하여 원양어업에 진출할 때의 심정을 “비로소 칼을 잡은 장수가 된 기분이었다”고 털어놓은 바가 있다. 그해 고려원양은 10척의 참치어선을 확보, 7척은 남태평양에 그리고 3척은 인도양으로 내보낸다. 고려원양은 1973년에는 어선 133척을 거느릴 만큼 사세를 키워나갔다. 선이 굵고 다혈질이었던 이학수는 한국 원양어업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중고선 도입이 대세를 이루던 원양업계에 350~500t급 대형 참치 연승어선의 건조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인쇄업을 해온 사업가로서 원양어업 초기에는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학수는 김재철을 집요하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마침내 1965년 김재철은 30세 젊은 나이로 고려원양주식회사 수산부장이 된다. 1965년에 이학수 사장은 새로 만든 선박 광명 9·10·11호 등 3척을 인도양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담대한 결단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국내 업체가 태평양이 아니라 인도양에서 참치잡이를 한 일이 없었다. 1957년 지남호 참치잡이 시범 작업이 인도양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도양 북서부 니코바르섬 근해에서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실질적 인도양 어장 개척은 1966년 4월 김재철 선장이 이끌었던 광명 11호가 처음이었다. 고려원양으로서는 그만큼 큰 위험을 떠안는 결정이었기에 최정예 요원을 보내야만 했다. 이학수는 어느 날 김재철 수산부장을 불렀다.

교과서에 실린 원양어업 일기

“이번 출어에는 김 부장이 선단장으로 나가줘야겠소. 당신이야말로 둘도 없는 완벽한 선장 아니오? 고기도 잘 잡을 뿐 아니라 선원 통솔력도 뛰어나니 이번에 내보내는 3척을 책임지고 이끄는 게 어떻겠소?” 김재철은 생각지 못한 이학수 사장의 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고된 해상생활을 끝내고 이제 육지생활을 제대로 해볼까 하는 때에 다시 선장으로 나가달라는 말은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이 큰일을 맡기려고 스카우트했던가’ 이런 생각이 스쳐가기도 했어요. 그러나 ‘제가 부족하지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용감하게 답했지요.” 이렇게 김재철은 고려원양 수산부장이면서 광명 11호 선장이자 광명 9·10·11호 3척 선단장으로 인도양 어장 개척에 뛰어들게 된다. 1966년 4월 2일 부산항을 떠난 배들은 5월 5일에 이르러 인도양에 들어선다. 인도양 조업에서도 김재철은 하루하루 어김없이 선상일기를 써 나갔다. 인도양은 파도와 바람과 상어가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저위도 지역에서 고위도로 옮겨갈수록 파도 높이가 사납게 높아진다. 인도양에 들어서는 5월 5일부터, 만선으로 아프리카 더반항을 밟는 7월 7일까지 도전과 성취와 감격의 시간들이었다. 아래 글은 ‘실업계 고등학교 국어2’에 실린 뛰어난 명문(名文)으로 평가받는 김재철 일기의 일부이다. 3척의 배를 이끄는 선단장이자 광명 11호 선장으로 바다에 도전하는 젊은이의 내면세계와 파란만장한 바다 상황, 그리고 어황을 감명 깊게 엿볼 수 있다.

‘1966년 5월 5일 피낭을 떠난 우리 광명호 선단은 수마트라 북쪽을 돌아 곧 인도양에 들어섰다. 대양으로 나오자, 남서계절풍이 알맞게 불어 더위를 식혀주고, 물빛은 맑다 못해 쪽빛으로 빛나니, 그 속에 비친 흰구름은 두둥실 물속을 난다. 우리나라의 다랑어 어업은 그동안 사모아를 중심으로 발전해왔고, 인도양은 파도가 거칠어 다들 출어를 망설이던 곳이지만, 저위도 해역이라 그런지 평온한 날씨에 바다는 그지없이 잔잔하다. 그러나 험하기로 이름난 인도양에 새 어장 개척 사명을 띤 첫 출어인지라 모두 긴장했다.

5월 8일 바다의 아침은 곱고도 정열에 타오른다. 동녘 수평선이 아름답게 물드는가 싶더니, 붉고 장엄한 태양이 불쑥 솟아올랐다. 잔잔한 해면엔 고기 떼가 난무하고, 크고 작은 갈매기들이 물을 차고 날며 바다의 아침을 맞았다. 망망한 바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수면을 나는 날치 떼들! 이 자연의 조화가 진정 놀랍기만 하다. (……)

5월 12일 페낭을 떠난 지 7일째 되는 날, 스리랑카 남쪽으로 약 300마일 떨어진 북위 0도30분, 동경 80도 적도 해역에서 첫 조업을 시작했다. 농밀어군(濃密魚群)을 포착한 것은 아니나, 새로 꾸민 어구를 시험하고 인도양 다랑어 어군의 생태를 파악하려는 시험 조업이었다. 비록 시험 조업이라곤 하나 인도양에서의 첫 조업인 만큼, 모든 선원들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감돌고, 나 또한 이른 새벽에, 풍어와 안전 조업이 있기를 경건히 빌었다. 새벽 4시, 조용한 해면이 중천에 걸린 달빛을 받아 곱게 반짝거리니, 새삼 신비감을 자아낸다. ‘투승준비(投繩準備)’ 지시를 내리자, 수백 와트의 작업등이 즐비하게 켜지고, 휘황한 불빛 아래 선원들은 저마다 작업부서에 배치되었다. 침로를 북쪽으로 바꿔 어도를 가로지르며 ‘투승 시작’의 신호를 내리니, 선원들은 싱싱한 냉동 꽁치를 꿴 낚시들을 연방 날쌔게 바닷속으로 던졌다. 전속으로 달리는 배에 맞춰 주낙도 따라 던져지니, 다랑어를 잡기 위한 주낙 어구가 물속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지만, 쾌주하는 배에 놀라 깬 갈매기들이 떼지어 불빛을 뒤따랐다. 분명 고기 떼를 뒤따르던 갈매기들인 듯해서 풍어를 바라는 선원들의 마음은 한결 더 부풀어올랐다. 약 네 시간에 걸쳐 2000여개의 낚시를 단 주낙 어구를 45마일 거리에 부설해 두었다. 투승이 끝난 뒤 네 시간을 기다리다가 적도의 태양이 한창 이글이글 타는 정오 무렵부터 주낙을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승무원의 대부분이 남태평양 사모아 해역에 나아가 숱하게 어로작업을 경험한 베테랑들이다 보니 작업은 처음부터 익숙하게 진행되었다. 양승기(揚繩機)의 빠른 회전에 따라 낚시가 하나둘 올라왔다. 기대와 실망이 몇 차례 엇갈리더니, 드디어 “다랑어다!” 하는 환성이 올랐다. 모든 선원들의 가슴은 부풀어 오르고, 두 선원이 다랑어가 문 낚싯줄을 붙잡고 승강이를 한다. 옆에서도 “잘해라! 첫 다랑어다! 놓치지 마라!” 하고 북돋워주니, 긴장이 더욱 고조된다. 다랑어와 사람의 줄다리기가 한창 이어지더니, 억세게 버티던 놈이 기진맥진해 뱃전 가까이까지 끌려오자, 어부들이 잽싸게 갈고리로 걸어 갑판 위에 끌어올렸다. 길이는 1m50㎝쯤이고 무게는 50㎏이 넘는 큼직한 놈인데, 곱고 노란 지느러미를 가져 옐로핀(yellow fin)이란 이름이 붙은 다랑어다.

7월 6일 드디어 만선을 했다.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또는 폭풍우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마리 한 마리 가슴 졸이며 낚아 올린 고기가 이젠 어창에 그득히 차서 더 실을 데가 없게 되었으니, 완전한 만선이다. 어렵게 낚은 다랑어를 흉측한 돌고래나 모진 상어 떼에 빼앗긴 적도 많지만, 그래도 여러 날 동안 낚아 올린 고기가 모두 7000여마리. 인도양에서의 첫 만선이기에 더욱 흐뭇하고 대견했다. 전장에서 수만의 전리품을 싣고 돌아가는 개선장군의 기쁨인들, 드넓은 바다 한복판에서 오랜 시일 고생하여 만선한 기쁨만 하랴. 40회의 조업에 120t! 이만하면 첫 항해의 어로는 성공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원양어업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인도양에 세워졌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배 위에서 어기여차 뱃노래를 소리 높이 부르면서 귀항의 길을 재촉했다.’

독립의 길, 창업의 길

1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1967년 3월 7일 돌아온 김재철은 이듬해 이사로 승진한다. 그 무렵 원양업계는 수산대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의 7~8년 선배들이 주로 장(長) 직함을 달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김재철은 초고속 승진이었다.

김재철은 1968년 12월 회사를 나와 창업 준비에 들어간다. 1958년 무급 실습항해사로 첫발을 뗀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김재철이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는 데는 하기와라 노부오(萩原宣夫)의 권유가 있었다. 그는 김재철보다 여덟 살 많은 일본 수산업체 다이렌 레이쇼(大遠冷藏)의 사장이었다. 이 회사는 고려원양이 인도양에서 잡은 참치를 사들이는 중견 종합상사인 도쇼쿠(東食)의 주요 협력회사였다. 김재철이 창업하는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새로운 사업을 아무리 권해도 김재철이 큰 바위인 듯 옴짝달싹하지 않자 마침내 하기와라는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을 하나 추천하시오. 그러면 그가 사업을 하도록 모든 것을 주선하리다. 그걸 보고 당신이 창업을 하면 어떻겠소?” 이렇게 해서 김재철이 추천한 사람이 고려원양에서 상사로 모시는 상무이사 김정학이다. 하기와라의 도움으로 김정학이 ㈜동수를 창업하고 난 1년 뒤에야 김재철이 동원산업을 창업한다. 사무실 한 칸에서 시작된 사업이었다. 하기와라가 김재철에게 창업을 적극 권유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그즈음 일본 원양업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원양어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일본은 어업허가권 가격이 선박값보다 비쌌다. 중고선보다는 배를 새로 만들어서 조업하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8년 이상 된 중고선들은 어항마다 녹이 슬고 먼지가 쌓인 채 매여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바다에 나가려는 인력이 크게 줄었고 선원들은 새로 만든 선박만을 가려서 타려 했다. 어항에 묶여 있는 배들 때문에 바다에서 돌아오는 배들이 정박할 수 없었다.

일본인 하기와라와 마키하라

일본은 이 무렵 중고선을 해외로 옮기려는 노력을 적극 기울인다. 마침 1965년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짐으로써 한·일 간 경제협력 관계에 해빙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활용하려 중소 규모 수산업체들뿐만 아니라 재벌급 회사들 또한 중고선 매매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가장 먼저 서울에 사무소를 열고 영업을 시작한 종합상사가 식품 및 수산 전문 도쇼쿠였다. 또 하나 호재는 일본의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횟감용 고급 참치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어선들이 참치를 잡아 올리면 일본으로 몽땅 수출할 수 있는 시장이 열렸던 것이다.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의 수산물 수입량은 무려 36배나 늘어날 만큼 수요가 크게 늘고 있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준비를 잘했더라도 시대상황과 활동무대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제 김재철 앞에는 기량을 소신껏 펼칠 수 있는 시대와 무대가 열리고 있었다. 1960년대 한국 수산업체는 영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원양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선주들은 중고선을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 연불(延拂) 조건으로 들여오고 조업 비용도 빌린 다음, 고기를 잡는 대로 갚아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격이라 할 만큼 좋은 사업이었다. 1세대 원양업체들은 거의 이렇게 성장했다. 일본 중고선 도입에 불을 붙인 계기는 일본 측이 한국에 제공한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가 원양어선 구입에 투입되면서부터다. 1966년 12월 13일 일본 어업협력자금 5000만달러를 민간은행이 지급·보증함으로써 중고선 구입 자격을 얻을 업체가 외자도입 심의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대한농산, 대림수산, 한성기업 등이 수혜기업으로 뽑혔다. 김재철에게 눈독을 들인 하기와라는 한두 번 권유에 그치지 않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참치 배가 낡아서 새 배를 지었는데 중고 배들 처분이 어렵다. 당신이 회사를 차리면 그 배를 연불 조건인 외상으로 줄 테니 고기를 잡아서 천천히 갚아라. 내가 당신을 택한 이유는 선장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 틀림없이 고기를 잘 잡아올릴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하기와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갖고 있지 않은 한 유능한 젊은이의 앞날에 과감히 투자하면 반드시 성공하리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이 결정이 김재철의 사업에 날개를 달아준다. 하기와라는 김재철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동원산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무렵 큰 회사와 거래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다면서 김재철을 미쓰비시종합상사 수산부로 데려가 연결해 주었다. 김재철이 창업하고 일본에서 중고선을 들여오게 되었을 때 돈을 빌려준 사람은 하기와라이지만 종합상사가 거래를 중개해야만 외화를 빌릴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루어진 미쓰비시종합상사와의 관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때 만난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마키하라 미노루(槙原稔) 전 미쓰비시 회장이다. 그가 김재철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중반으로, 미쓰비시종합상사 수산부 차장으로서 한국 선주 모임에 참가했을 때 그의 상사였던 우쓰이(日井) 수산부장은 마키하라에게 이런 당부를 한다.

“저기 끝자리에 앉은 저 젊은 친구를 유심히 보시오. 저 친구가 김재철이니 얼굴과 이름을 꼭 기억해 두시오.”

이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동원산업과 미쓰비시종합상사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졌고, 동원이 성장하는 동안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다. 외환위기 때도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마키하라 회장은 1980년대 초반 김재철이 하버드대학 최고경영자과정을 다녀오는 데 큰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김재철의 인생을 통해 거듭 확인하는 것은 ‘믿음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는 흐르는 강물처럼 또 다른 큰 강물과 만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인연들이 크고 작은 좋은 인생의 기회를 만들어낸다.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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