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운영하는 거대강입자가속기(LHC). 둘레가 27㎞에 이른다. CERN은 LHC보다 규모가 3배 이상 큰 ‘미래형 원형 충돌기(FCC)’를 2025년부터 건설할 예정이다. ⓒphoto 뉴시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운영하는 거대강입자가속기(LHC). 둘레가 27㎞에 이른다. CERN은 LHC보다 규모가 3배 이상 큰 ‘미래형 원형 충돌기(FCC)’를 2025년부터 건설할 예정이다. ⓒphoto 뉴시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의 뒤를 이을 차세대 가속기 개발 경쟁이 뜨겁다. 힉스 입증에 혁혁한 공을 세운 LHC에 뒤질세라 유럽의 ‘미래형 원형 충돌기(FCC·Future Circular Collider)’ 프로젝트를 비롯해 일본이 주도하는 ‘국제 선형 가속기(ILC)’, 중국이 추진하는 ‘원형 입자가속기’ 등이 차세대 가속기 자리를 놓고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 이들이 내놓은 밑그림은 모두 수퍼급 가속기이다.

암흑물질 찾을 유럽의 초대형 가속기

2012년 힉스 입자가 검출된 이후 세계 입자물리학계는 LHC보다 더 큰 규모의 초대형 가속기 건설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조금이라도 더 큰 고에너지 가속기’를 개발하려는 이유는 인간이 찾지 못한 더 많은 입자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입자를 더 높은 에너지로 가속해 에너지가 높아지면 물리적인 사건이 많이 나타난다.

가속기는 크기가 1000조분의 1m에 불과한 양성자 2개를 빛에 가까운 속도(30만㎞/초)로 가속시켜 서로 충돌하게 만든 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물질을 포착해 우주의 기원을 알아내는 장치이다. 이때 양성자는 충돌 에너지 때문에 그 구성 성분들인 쿼크나 글루온과 같은 소립자로 부서지는데, 충돌 에너지가 커질수록 양성자를 깨뜨려 그 안의 소립자에 전달할 수 있는 에너지도 커진다. 마치 물속을 헤엄쳐 나갈 때 작은 물고기가 지나갈 때보다는 사람이, 사람보다는 배가 많은 물방울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LHC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걸까. 아니다. 입자물리학 실험은 앞으로 20년간 LHC 중심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우주의 약 27%를 채우고 있지만 존재를 규명하지 못한 암흑물질과 초대칭이론 등으로 연구 분야를 넓히며 더 활약할 것이다. 하지만 LHC에서 새로운 입자가 발견되지 못한다면 기존보다 훨씬 높은 고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 입자가속기의 대형화다.

CERN은 대형화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다. ‘미래형 원형 충돌기(FCC·Future Circular Collider)’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 FCC는 둘레만 80~100㎞로, 프랑스와 스위스에 걸쳐 지하 200m 깊이에 만들어진다. 2012년 힉스 발견으로 제구실을 톡톡히 한 LHC 둘레가 27㎞인데, 그 기록을 크게 뛰어넘는 규모다. 서울~천안 거리가 100㎞쯤 되는 만큼 이 정도 길이의 원형 가속기를 지하에 묻는 셈이다. 충돌 에너지는 자그마치 100Tev(테라전자볼트). LHC보다 10배 이상 높다. 소형 건전지 50조5000억개를 연결해야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이다.

CERN에 따르면, FCC의 건설은 2025년부터 시작돼 2035년부터 2040년 사이에 가동을 시작한다. 대량의 힉스 입자를 만들어 힉스 자체의 특성을 밝힐 예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FCC는 ‘힉스 팩토리(Higgs Factory)’로도 불린다. ‘신의 입자’ 힉스 이후에 발견될 입자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CERN은 FCC를 통해 인류가 아직 한 번도 관측하지 못한 암흑물질이나 초대칭 입자를 발견하길 기대하고 있다. FCC 건설에는 한국의 강릉·원주대학, KAIST, 고등과학원 등 6개 기관을 포함해 23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중국도 3조원짜리 ‘힉스 팩토리’ 건설

중국도 이미 둘레 50~80㎞ 규모의 원형 강입자가속기 건설을 추진 중이다. 중국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IHEP)의 왕이팡(Wang Yifang) 소장은 FCC에 필적할 만한 ‘중국판 힉스 팩토리’ 최종안을 올해 말까지 완성하고 이르면 2020년 건설을 시작해 2030년대에 완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선 2028년까지 기본 입자인 전자와 양전자(전자의 반입자)를 충돌시켜 힉스 입자와 다른 여러 기본 입자를 만들어내는 ‘원형 가속 충돌기’를 건설한 다음, 이어 같은 시설을 활용해 2035년까지 더 큰 에너지가 들어가는 양성자-양성자 충돌기로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힉스가 단지 하나의 입자인지 아니면 그보다는 특이한 입자인지 등 힉스의 속성을 자세히 알아낸다는 방침이다. CERN의 LHC에 비하면 힉스 입자를 훨씬 정밀하게 연구할 수 있다.

중국 쪽이 추산하는 건설 비용은 30억달러(대략 3조원). 지난 8월 중국 과학기술부로부터 우선 3500만위안(약 56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았고, 추가로 800만위안(약 12억8000만원)을 요청해 놓은 상태이다. 추후 비용은 국제 협력을 통해 충당해 나갈 생각이다. 다른 나라가 건설 비용 분담에 나서지 않더라도 중국은 독자적으로 둘레 52㎞의 강입자가속기 건설에 나설 예정이며, 국제 협력 연구시설로 건설된다면 그 규모를 둘레 80㎞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런 규모의 입자가속기가 중국에 세워질 경우 중국은 ‘세계 입자충돌기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과학 전문지 ‘네이처’는 내다봤다.

일본, 세계 최장 11조짜리 선형 가속기 건설

일본도 가속기 경쟁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일본은 긴 직선 구간 터널에서 전자와 양전자를 가속해 충돌시키는 ‘국제 선형 가속기’(ILC)를 추진하고 있다. 길이 31㎞로 2030년경에 건설될 예정인데, 선형 가속기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건설 비용은 100억달러(약 11조원). 일본 정부는 미국 등 여러 나라와 협력해 이를 충당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유럽과 중국의 원형 방식과 달리 선형 가속기를 건설하려는 걸까. 선형 가속기가 더 큰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둥근 형태의 원형 가속기에서 입자가 곡선으로 돌 경우 빛을 발하며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성질이 있다.

또 선형 가속기는 깨끗하고 효율 높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LHC와 같은 원형 가속기는 양성자와 양성자가 충돌한다. 양성자 안에는 두 종류의 쿼크와 글루온, 양자 효과에 의해 형성 중인 쿼크 등이 뒤섞여 충돌 반응이 복잡하다. 따라서 원하는 반응을 얻으려면 데이터를 많이 얻어 그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 기록해야 한다. LHC에서는 현재 충돌 사건 10만개 중 하나 이하꼴로 기록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하지만 전자와 양전자를 충돌시키는 선형 가속기는 모든 충돌 사건을 기록하기 때문에 입자의 특성을 상세히 밝히기에 좋다.

그럼 원형 가속기로는 같은 실험을 할 수 없을까. 원형 가속기는 가속 과정에서 진행 방향이 휘며 전자기 방사가 일어나 에너지 효율이 떨어진다. 양성자보다 전자처럼 가벼운 입자에서 이런 일이 더 잘 발생하기 때문에 현재 규모 이상으로 하기엔 무리가 있다. 비록 ILC의 길이가 중국이나 유럽의 원형 가속기보다 짧지만, 입자 빔이 곡선으로 휘면서 손실되는 에너지가 없어 효율이 좋다.

현재 우주 탄생의 비밀을 캐기 위한 각국 간의 경쟁은 2라운드로 접어든 듯하다. 힉스의 발견은 과학 역사상 커다란 이정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따지자면 우주의 비밀에 다다르는 첫 단계에 불과할 뿐이다. 힉스 발견에 못지않은 수많은 발견들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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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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