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나 초원 ⓒphoto 뉴시스
사바나 초원 ⓒphoto 뉴시스

주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산에라도 올라가야겠다’면서 등산을 한다. 특히 40~50대의 중년들은 등산을 아주 좋아한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등산이었고, 70% 이상이 등산화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우거진 숲을 찾아 산을 찾는 데도 과학적인 이유가 있을까.

유전자의 녹색 갈증

평소 회색 빌딩숲에 갇힌 직장인들은 틈날 때마다 자연을 접하고 싶어 한다. 잠시 쉴 때도 나무그늘을 찾고 잘 조성된 공원에서 산책을 한다. 주말엔 근처 수목원을 방문해 삼림욕을 즐기기도 하고, 휴가 땐 공기 좋고 물 맑은 자연을 찾아 떠난다. 시골에 사는 사람은 더 깊은 산골짝을 그리워하며 인위적인 손길이 미치지 않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인간이 이처럼 푸른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즉 ‘녹색 갈증’ 때문이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명을 뜻하는 ‘바이오’와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 ‘필리아’의 합성어로, 전 하버드대학 교수이자 유명한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 1984년에 만든 용어다. 우리 인간의 유전자 속에 녹색을 갈망하는 인자가 들어 있다는 학설이다. 비록 과학의 발달로 아주 편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자연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은 인간의 타고난 유전적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이 마르면 물을 찾듯, 회색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연을 찾게 된다는 설명이다.

초기 인류가 수백만 년에 걸쳐 살았던 거주지는 자연이 만든 산림(山林)이었다. 그곳에서 녹지를 접하는 일이 일상화되면서 인간은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 생태적 공간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갖도록 진화하였다. 인간이 맹수나 악천후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서식처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땅이 메마르지 않아 녹색식물이 많고 주변이 탁 트인 아프리카의 사바나 같은 환경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게 윌슨의 설명이다. 이런 환경은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현대인들도 진화된 사바나의 경관을 가장 좋아한다는 연구가 있다. 진화심리학자 고든 오리언스(Gordon Orians)의 ‘사바나 가설(Savanna Hypothesis)’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류의 조상이 거주하던 아프리카 동부와 비슷한 환경에 아직까지 끌린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에 따르면 현대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 또한 자원이 풍부한 넓게 트인 곳, 경쟁자의 정세나 지형을 살필 수 있는 절벽 끝이나 산꼭대기처럼 약간 높직한 곳, 물과 음식을 얻을 수 있는 호수와 강이 있는 곳들이다. 초기 인류가 추구한 사바나 초원의 이미지와 같다. 이는 초기 인류가 숲에서 생활하던 기억이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급격히 진행된 도시화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인간은 자연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자연과 접촉할 수 있는 곳에 머물게 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안정감을 찾게 돼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이 회복된다. 녹색 갈증 효과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의사가 환자의 재활을 위해 정원 산책을 권장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수술을 받고 회복기에 있을 때, 창밖으로 녹색의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병실에 입원한 환자의 회복이 훨씬 빠를 뿐 아니라 수술 후 합병증 발생률도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또 어릴 때부터 녹색을 자주 접하며 갈증을 해소한 사람들은 감성이 풍부하고 성격이 원만한 반면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같은 회색과 흑색 공간 속에서 생활해온 사람들은 이와 상반된 면을 보인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숲속 학교의 학생들은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효과와 함께 정신 집중이 잘 돼 학습력이 높고 왕따가 적다는 사례 연구도 많다.

중년층 생존기술 전수 열망

뿐만 아니다. 직접 자연경관을 보지 않고 자연과 같은 이미지로 조성된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녹색 갈증 효과를 볼 수 있다. 자연의 이미지로 꾸며진 식당에 더욱 끌리는 이유다. 결국 인간은 자연과 접하는 자연스러운 조화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소소하지만 집안에 화분을 키우고 스티로폼 박스에 고추모종이라도 심어 녹색이 커나가는 것을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원시시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해 남녀가 각기 다른 압박감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부족을 먹여살리고 지켜야 하는 남성은 먹을 것이 많으면서 경쟁자인 동물이나 다른 부족을 먼 거리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넓은 녹색 공간을 목말라 하며 초원과 산을 찾아다녔다.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초기 인류의 이러한 녹색 갈증이 오늘날에 와서 등산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등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남성들한테는 이런 ‘녹색 갈증’이 바닥에 깔려 있는 셈이다.

현대사회에서 넓고 탁 트여 있으면서 식물이 많고 메마르지 않은 곳, 이런 조건을 충족하면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산이다. 문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직원과 공유하려는 오지랖 넓은 중년의 ‘홍익정신’이다. 직장의 사장이나 대학의 교수들은 주말이면 집에서 푹 쉬고 싶어 하는 젊은 직원들이나 학생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려고 한다. 또 40~50대 부모들은 산에 가기 싫어하는 자식들을 억지로 끌고 함께 등산을 하려고 한다. 왜 그럴까?

이는 한마디로 다음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생존기술을 전수하기 위함이다. 수렵채취 사회에서는 집단의 존립을 위해 사냥의 베테랑인 부족장이 부족 청년들을 이끌고 숲속을 누비며 사냥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현대사회에서도 그 과정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젊은 친구들을 얼른 가르쳐서 훌륭한 사냥꾼으로 길러내야 내 딸과 손자, 그리고 몇 년 후의 자기 자신도 먹여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장남이 그러하듯, 무언가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의식(儀式)’이라는 것에 일종의 강박 증세를 가지고 있다. 중년에게 그 의식은 등산이다. 그러니 이번 주말에는 사장의 유전자에 각인된 족장의 기를 살려줄 겸 만물이 숨 쉬는 산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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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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