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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9호] 20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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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th 창간 특집 | 과학이 설 자리가 없다]이제 ‘박인비式’ 과학기술을 만들자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일러스트 허인회
우리 사회를 선진국 문턱까지 이끌어준 과학기술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향한 참여정부의 화려한 꿈은 철저하게 잊혔고, 떠들썩했던 4차 산업혁명의 열기도 시들해졌다.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심지어 핵과 미사일 개발로 세상을 놀라게 만든 북한의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없다.
   
   단순히 관심만 없는 것이 아니다. 국민 안전을 위협하고 환경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과학기술을 거부해야 한다는 ‘러다이트(Luddite)적’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래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기술을 가차없이 폐기해버린다. 국정의 중심에서 밀려난 과학자들이 이제는 도덕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고비용·저효율 집단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시들해진 노벨 과학상의 꿈
   
   해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과학기술계는 전전긍긍했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스포츠와 대중문화에서의 한류 열풍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데 도대체 노벨 과학상을 하나도 못 받아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따가운 질책이 마구 쏟아지기 때문이었다.
   
   노벨 과학상에 대한 우리의 갈증이 부쩍 심해진 것은 2000년 무렵부터였다. 일본이 무려 18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연속해서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 우리를 자극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현재 ‘노벨상급’ 과학자가 6명이나 있고, 3년 이내에 노벨상급에 도달할 과학자도 7명이나 된다는 연구재단의 뜬금없는 발표도 그런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과학상의 수상 업적을 소개하는 짤막한 기사가 전부였다. 우리 과학자의 무능과 게으름을 탓하는 기사도 찾아볼 수 없고,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스웨덴을 상대로 로비를 해야 한다는 상투적이고 옹색한 변명도 들을 수 없었다. 적어도 ‘조중동’을 비롯한 주류 언론에서는 그렇다.
   
   일본 교토대 혼조 다스쿠(本庶佑) 교수의 생리의학상 수상 소식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10월 12일 노벨 과학상을 받은 일본인 과학자 23명 전원을 분석한 전면 기사를 실은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노벨 과학상 수상 소식을 기다리는 일조차 시들해져버린 것이다.
   
   
   통일 준비에서도 빠져버린 과학기술
   
   통일의 꿈을 실현하고, 동북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한의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일은 단순히 정치적 협상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통일 이후 남북의 경제·사회·문화적 격차를 빠르게 해소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통일 준비에 과학기술이 빠질 수 없다. 낙후된 북한에 도로·철도를 구축하고, 농업을 되살리고, 산업을 일으키고, 남한과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는 과학기술의 역할이 막중하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도 과학기술의 역할이 핵심이었다. 서독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기초과학 분야의 막스플랑크연구소와 응용기술 분야의 프라운호퍼연구소를 동독 지역으로 확대해서 설립한 것이 실질적인 통일 작업의 출발이었다. 동독 출신의 메르켈 총리가 두 번이나 연임할 수 있었던 것도 과학기술을 앞세워 구(舊) 동독 지역을 빠르게 발전시킨 덕분이었다.
   
   그런데 지난 4월 이후 숨가쁘게 진행되었던 3차례의 정상회담에서는 과학기술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평양에서 개최된 제3차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200여명의 수행단 중 과학기술 분야의 인사는 없었다. 게임산업계 출신의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이 과학기술계의 현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인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북한의 리용남 내각부총리가 장 위원장에게 (새 세기 산업혁명을 이끌어갈) ‘새 시대의 사람’이라고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북한의 입장에서도 우리 과학자의 참여를 기다렸을 것이다.
   
   10·4선언 기념공동행사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우리 대표단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북한이 대표단에 가장 먼저 자랑한 시설이 바로 2016년 대동강 쑥섬에 세워놓은 평양 과학기술전당이었다. 핵과 장거리 미사일 분야에서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은 분명한 의도가 담긴 일정이었다. 과학자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우리 대표단이 방명록에 남겼다는 ‘교육과 과학에서 남북협력을 활발하게 하여 민족의 밝은 미래를 열어나가자’는 기대는 공허한 것이었다. 과학에서의 남북협력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혼조 다스쿠. photo 뉴시스

   탈원전은 곧 ‘탈(脫)과학기술’
   
   국민의 안전을 위협한다면서 원전을 포기하는 ‘탈원전’ 정책은 정부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지난해 6월 19일 고리원전 1호기의 영구정지 선포식이 ‘탈원전 국가의 출발’을 알리는 선언식이 돼버렸다. 40년 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산업발전과 국민생활 향상에 크게 기여한 고리 1호기에 대한 의례적인 덕담조차 없었다.
   
   공론화위원들조차 거부해버린 성급한 탈원전은 1000명이 넘는 정체불명의 ‘폴리페서’들이 주축이 된 대선캠프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태양광 패널 개발을 위한 정부의 투자에 재미를 붙인 ‘신재생 마피아’들의 입김도 작용했을 것이다. 영화 ‘판도라’가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버렸다는 주장도 있다.
   
   탈원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난 60년 동안 애써 개발해놓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기술을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당장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전력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있고, 환경이 파괴되고, 한전·한수원과 같은 에너지 기간 기업의 경영이 악화되고 있다.
   
   영국 무어사이드 원전 건설 사업의 우선협상 대상국 지위도 상실해버렸다. 스마트원자로 공동개발 사업으로 우리와 각별한 사이였던 사우디아라비아도 우리가 개발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로인 APR-1400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원전 수출의 꿈은 UAE의 바라카원전으로 마감하게 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 위험하다는 이유로 퇴출시키는 원전을 다른 나라에는 ‘바라카(신의 축복)’라면서 수출하겠다는 발상은 지극히 비윤리적인 것이다. 원전 개발 대신 ‘폐로(閉爐)’ 기술을 미래의 먹거리로 삼으면 된다는 정부의 주장은 해괴망측하다. 세계적인 원전 기술 개발에 성공한 우리 자신에게 모욕적인 것이다. 성급하게 밀어붙인 섣부른 탈원전은 사실 현실보다 이념에 집착하는 ‘탈(脫)과학기술’ 선언이었다는 뜻이다.
   
   
   겉으로만 화려한 기술사업화
   
   연구실에서 개발된 기술의 사업화가 중요한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기술의 사업화를 온전하게 과학자의 몫으로 떠넘겨버렸다.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IT 분야에서 거세게 밀려온 뜨거운 ‘벤처 창업’ 광풍에 속절없이 휩쓸려버렸다. 소위 ‘대세’에 밝다는 무책임한 경제 전문가들과 정부의 화려한 선동(煽動)이 대학과 출연연을 삼켜버린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대학과 출연연에서 시작한 벤처의 대부분은 현실의 거센 풍랑을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좌초해버렸다. 눈먼 돈에 불과했던 정부 지원금을 받아내는 실력으로 현실세계에서 투자금을 확보할 수도 없었고, 투명성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투명한 경영은 비현실적인 꿈이었다. 사업성이 전혀 없는 어설픈 기술로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과학자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인사·재무 관리에 실패해서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대학원 학생을 직원으로 착각해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았다.
   
   어렵사리 살아남은 벤처에는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행히 증권시장에 상장이라도 할 정도가 되면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히 기술 개발 과정에서 받았던 정부의 지원금이 발목을 잡는다. 정부의 지원으로 개발한 기술의 수익을 개인이 독차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술 개발의 과실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창업에 성공한 과학자에게는 속절없이 도덕적으로 부패한 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다. 기초과학연구원의 김진수 박사가 겪고 있는 황당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세계적인 IT 창업자들을 ‘과학자’라고 착각해버린 상태에서 선진국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이고 투명한 투자관리 시스템의 중요성도 철저하게 외면해버린 것이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IT 창업가들은 기술자가 아니라 놀라운 영감을 타고난 뛰어난 경영자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는 뜻이다.
   
   
   모방형 과학기술 정책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하는 과학기술부를 부총리급으로 격상시킨 이후부터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게 증폭됐다. 과학기술 투자를 확대하고, 선진국의 ‘혁신정책’을 흉내 내기만 하면 당장 창의적인 연구 성과가 쏟아져 나와서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야단들이었다. 선진국의 정책을 벤치마킹하는 ‘정책 전문가’들의 홍보(PR)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길지 않았던 부총리급 과학기술부 시절의 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많지 않다.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종합 조정하는 중책을 수행하겠다고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혁신본부’는 ‘거버넌스’에 대한 무의미한 논란만 부추기다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국가가 나서서 ‘신동(神童)’을 선발하고, 아무 대책도 없는 ‘우주인’을 떠들썩하게 선발했던 것이 부총리급 과학기술부의 알량한 성과였다.
   
   교과부와 미래창조부를 거쳐 새로 탄생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하다. 연구 성과의 평가 방법을 개선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연구자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개발하겠다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다. 분명한 명분도 없이 되살린 ‘혁신본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면서 괜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투명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과학자들에게만 실패를 용납하고 자율성을 보장해주겠다는 발상은 공허한 것이다. 오히려 과학자들에 대한 사회적 불신만 증폭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 지난 10월 16일 오전 대전 유성구 기초과학연구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현장 시찰에서 여야 의원들이 지하실험연구단을 찾아 연구 내용을 듣고 있다. photo 뉴시스

   도덕적으로 무너져버린 과학기술
   
   우리 과학기술을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또 있다. 과학기술계가 진정한 의미의 과학을 증진하고,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 개발에 전념하는 ‘학문적 환경’을 만드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정부의 연구비를 더 많이 받아내고, 더 많은 학생을 더 혹독하게 관리해서 더 많은 논문을 쏟아내는 것이 과학자들의 최종 목표가 되었다. 더 많은 상(償)을 받아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싶어하는 과학자들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노벨상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도 그런 환경의 산물이다.
   
   문제는 심각하다. 과학기술계는 우리 사회에서 익명의 투서가 가장 많은 분야라고 한다. 같은 기관에서 같은 연구를 하는 동료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대학원 학생이 교수의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있다. 오늘날 대학에서 교수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대학원 학생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대학원생의 고발로 기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교수도 있는 모양이다.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도 만들어졌다. 물론 성추문도 빠질 수가 없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교수 평가 사이트에서 학생들로부터 ‘인간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 교수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교수일수록 ‘인건비’ 평가는 좋고, ‘연구실 분위기’는 나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교수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 교수가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정부로부터 적지 않은 연구비를 받아야 하는 과학기술 분야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심지어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논문의 저자로 올리는 낯뜨거운 경우도 드러났고, 엉터리 ‘학술회의’를 핑계로 정부의 예산으로 관광 여행에 나서는 경우도 밝혀졌다.
   
   연구비 규모와 논문 편수만을 근거로 삼는 획일적이고 계량화된 평가가 과학기술의 연구 현장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평가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평가를 개선할 방향과 대안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심각하게 왜곡되어버린 연구·교육 환경을 바로잡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국식 과학기술을 만들자
   
   올해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혼조 교수의 적극적인 발언이 화제인 모양이다. 창의적인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투자를 확대하고, 과학자들에게 자유롭게 과제를 선택해서 장기적으로 노력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주장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원론적인 주장은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창의적인 기초과학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기에는 과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신뢰가 충분하지 않다.
   
   이제 정말 창조적인 과학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선진국의 제도와 관행을 맹목적으로 흉내 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 출발이다. 미국 LPGA ‘명예의전당’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올림픽 금메달까지 따낸 박인비의 경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골프스쿨에서 알려주는 ‘표준 스윙법’이 박인비에게 US오픈 트로피를 안겨줬다. 우리가 화학·자동차·반도체·조선으로 선진국 문턱에 올라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세계적인 표준 스윙법에도 한계가 있었다. 박인비의 남다른 체형(體型)이 문제였다. 짧은 기간에 압축 고도성장을 거듭해온 우리 사회의 현실과 너무나도 닮은꼴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우리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넘쳐나는 욕구가 집단이기주의와 이념적 편향으로 변질돼버렸다. 오랜 세월 각고(刻苦)의 노력이 전통으로 굳어진 선진사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진사회의 성공적인 제도가 우리 사회에서 형편없이 실패하는 것은 그런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인비는 3년 동안의 노력으로 자신의 체형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스윙법을 스스로 개발했다. 비거리는 짧더라도 정확성을 보장해주는 별난 ‘박인비식 스윙법’이 그 결과였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박인비 자신만을 위한 스윙법이었다. 성과는 놀라웠다. LPGA 복귀 3년 만인 2016년에 명예의전당에 입성했고, 올림픽 금메달도 차지했다.
   
   이제 우리도 진정한 ‘한국식’ 과학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의 흉내 내기는 무의미하다. 윤리성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정부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연구실의 모든 것을 활짝 열어서 윤리성을 투명하게 검증받을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명예와 권위를 핑계로 머뭇거릴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노력이 과학자에게 불편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투명한 선진국에 맞는 제도는 더 이상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관료에 대한 기대도 버려야 한다.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정부의 ‘위원회’가 관료들에 의해 어떻게 악용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은 더 이상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대통령과 정부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들에게 과학의 가치를 인식시키고, 국민들이 기술 개발을 성원해야만 진정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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