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산 김인득

1915년 8월 17일

경남 함안군 칠서면에서 태어남

1932년 윤현의와 결혼

1934년 마산공립상업학교 졸업, 마산 내서금융조합에 입사

1943년 진주 상공회의소 업무과장으로 전직

1958년 전국의 영화 체인망을 장악한 영화왕으로 등극

1962년 숭동교회 장로 장립

1972년 벽산그룹 회장 취임

1974년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

1997년 7월 10일 서울에서 별세

벽산(碧山) 김인득(金仁得)은 다방면에 걸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일제하 지방금융조합 직원에서 출발한 그는 단성사, 중앙극장을 비롯한 전국 영화체인망을 장악해 한때 ‘영화왕’으로 불렸다. 이어 동양물산, 한국슬레트, 벽산건설 등 굴지의 기업군을 일구고 새마을운동 실업가로 농촌진흥에 앞장서기도 했다. 만년에는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으로 취임해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맞서는 전미 순회강연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한·미동맹을 다지는 민간외교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라는 평가도 받는다.

벽산은 1915년 8월 17일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능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김상수와 모친 박차연 사이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벽산은 집안 어른이 ‘푸른산처럼 기개 있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서흥 김씨 24세손으로 선조 중에는 동방5현으로 꼽히는 김굉필이 있다. 김굉필은 조광조, 이황, 이언적의 스승이었던 조선조 정통 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터득한 집념의 삶

벽산은 다섯 살 때 맞은 3·1독립운동에 대해 회고록(‘내 집을 채우라’)에 이렇게 적고 있다. ‘어느 날 많은 사람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아직도 거풀진 땅의 밑바닥 속에서 솟구쳐 나올 것 같은 3·1 만세의 함성은 눈을 감아도 환히 보이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일제 치하의 전통적 제사가 끊이지 않는 집안에서 자란 나는 이 아름다운 씨앗들을 나도 모르도록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꽁꽁 동여매야만 했다.’

벽산은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다가 아홉 살 때 칠서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3수 끝에 마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하면서 어려서부터 집념의 삶을 터득한다. 그가 세 번째 도전했던 고교 입시는 어느 해보다 경쟁이 치열하여 경쟁률이 15 대 1이나 됐다.

‘마산상업에 입학하여 1학년 교과서를 펼쳤을 때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이 될 수 없다” “네가 초목과 같이 썩을 수 있겠느냐?”는 글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내 집을 채우라’)

마산상업에 진학하고 1년쯤 지나 벽산은 동네 윤 부자의 딸 윤현의와 결혼한다. 아내는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어서 벽산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산상업 시절 벽산은 항상 단정하고 조용하게 행동하면서 힘 있는 억양의 미남 학생이란 평을 들었다. 학업 성적도 우수한 편이어서 전국 주산대회에서 우승도 차지했고 서예전시회에선 항상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스포츠에서도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농구에서 센터, 축구는 키퍼, 탁구에서는 학교 대표선수로 활약하였다.

1934년 벽산은 학교 추천으로 마산의 내서금융조합에 입사한다. 7명의 직원은 거의가 전문학교 또는 갑종(5년제) 상업학교 출신이어서 그 역시 말단 자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조합이사는 일본인 장교 출신으로 ‘불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미가 급하고 강직한 데다 일밖에 모르는 위인이었다. 까다롭고 빈틈이 없어 밑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은 두세 달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정도였다.

벽산은 그곳에서 한국인이란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현실은 조국의 비극을 생각하게 했다. 조국 잃은 설움에 무학산 기슭에 올라 봄날의 황혼을 바라보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문득 꿀벌의 발에 꽃가루를 묻혀 번식을 유도하는 식물의 지혜가 떠오르면서 식민지 시대와의 사생결단을 각오한다. 당시 그는 이런 각오를 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제1인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조국이, 그리고 미래의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언제 어디서든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리라.’(‘내 집을 채우라’)

금융조합 일에 매진하기 시작한 벽산은 조합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아내와 별거까지 감수하면서 규정과 실무 숙달에 열중했다. 조합원 모집, 예금 권유, 조합 내에 산적해 있는 연체 독촉 처리 등에서 모두 일등을 했다. 이듬해 조합이사는 조합의 중요한 열쇠를 그에게 맡겼다. 자신의 각오대로 직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된 것이다. 벽산은 비로소 이때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아내와 어린 딸을 직장이 있는 마산으로 데려왔다.

일본서 맺은 인연으로 영화 사업 도전

그 무렵 애국단체들은 전국적으로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벽산 역시 이 민족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그는 내핍 생활이란 단순한 절약이 아니라 저축이 뒷받침돼야 효과가 있다고 여겨 당시 28원의 월급을 받던 처지에 10년 계획으로 1만원 저축 목표 계획을 세웠다. 목표달성을 위해 갓 분가해서 신혼살림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도 하룻밤 숙직비 50전을 벌기 위해 숙직을 도맡아했다. 출장 횟수도 어느 누구보다 많았지만 아예 구두 뒷굽에 말굽 징을 박고 새벽에 집을 나와 하루 80리 길을 걸어다니면서 여비를 아꼈다.

벽산은 빼어난 업무 실적을 인정받아 1938년 금융조합연합회 경남지부로 전출된다. 이어 전문학교 진학에 뜻을 두고 일본 유학을 위한 검정고시 준비에 몰두한다. 그러나 경제적 궁핍과 격무로 인해 신경쇠약에 시달린 끝에 결핵 3기 진단을 받는다. 휴직원을 내고 귀향하여 1년간의 투병생활 후 건강을 회복해 1942년 진양금융조합 수석서기로 취임했지만 이듬해 금융조합 생활을 청산하고 진주 상공회의소 업무과장으로 전직한다. 당시는 2차 대전 말기의 궁핍한 시대였다. 벽산은 전직과 함께 집 옆에 660㎡(200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밭에서 한 해 수확한 열한 가마니의 고구마와 철마다 거둬들인 채소로 집안 식구는 물론 이웃들의 굶주림을 다소나마 채워줄 수 있었다.

1945년 8·15광복 후 벽산은 가족을 진주에 남겨놓은 채 부산으로 가서 친구의 철공소를 맡아 공원들과 자취생활을 해가며 사업 경영의 밑바탕을 다졌다. 그해 8월이 다 갈 무렵 사카모토 마사기씨의 가족이 진주에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벽산이 금융조합에 입사했을 때부터 신임을 주던 인물로, 벽산이 진주 상공회의소 업무과장으로 간 것도 사카모토씨의 배려 덕분이었다. 사카모토씨는 1945년 4월 육군에 소집되어 부산의 병사부에서 근무하다가 패전으로 고국에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벽산은 그 가족의 이삿짐을 꾸려 일본에 발송하는 일을 도맡는 등 귀국을 도와줬다. 그날 밤 사카모토씨와의 작별을 한 시대와의 단절로 인식한 벽산은 전혀 다른 운명을 만들어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일본에 의해서 짙게 파인 발자국을 보며 일본을 원수시하고 그들의 침묵에 만족해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비바람에 씻겨난 자국만 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식민지 근성이다. 저들은 다시 일어설 저력이 충분한 민족이다.…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부흥을 꾀하려면 서울이나 부산에 머물 게 아니라 일본을 알아야 한다.’(‘내 집을 채우라’)

부산으로 돌아간 벽산은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한 단계로 신문사 총국을 운영한다. 마침 종이가 귀한 터라 신문 용지 구입을 위해 일본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때 고베에서 불이전기회사 사장인 재일교포 이현수씨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일본에서 신세를 졌던 이현수씨로 인해 그는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게 된다. 귀국한 이현수씨는 당시 사재를 털고 빚을 내어 부산의 큰 극장들을 인수해 친척과 직원들에게 위탁경영시켰는데, 좌경세력이 개입하여 극장 쟁탈 분규가 벌어졌다. 실무책임자가 구속됐고 이현수씨 역시 구속돼 극장은 타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이때 벽산은 3개월간 이현수씨 옥바라지를 하면서 진주의 집을 팔아 그를 석방시키고 그의 재산도 되찾아주었다.

<strong></div>1</strong> 양식기 공장을 둘러보는 벽산.<br/><strong>2</strong> 조회 때 직원들 앞에서 얘기하는 벽산.<br/><strong>3</strong> 1960년 여름, 서울 중구 쌍림동 자택에 모인 벽산의 가족. 윗줄 왼쪽부터 고 김인득 창업주, 차남 김희용, 3남 김희근. 아랫줄 왼쪽부터 장남 김희철, 부인 고 윤현의 여사, 차녀 김연숙, 장녀 김숙희.<br/><strong>4</strong> 벽산이 1953년 매입한 서울 종로 단성사. 매년 1위의 실적을 보인 대한민국 대표 영화관이었다. ⓒphoto 동양물산
1 양식기 공장을 둘러보는 벽산.
2 조회 때 직원들 앞에서 얘기하는 벽산.
3 1960년 여름, 서울 중구 쌍림동 자택에 모인 벽산의 가족. 윗줄 왼쪽부터 고 김인득 창업주, 차남 김희용, 3남 김희근. 아랫줄 왼쪽부터 장남 김희철, 부인 고 윤현의 여사, 차녀 김연숙, 장녀 김숙희.
4 벽산이 1953년 매입한 서울 종로 단성사. 매년 1위의 실적을 보인 대한민국 대표 영화관이었다. ⓒphoto 동양물산

단성사 이어 중앙극장까지 인수

석방 후 이현수씨는 벽산에게 힘을 합쳐 극장 사업을 하자고 요청한다. 광복 직후라서 오락시설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기에 일반 대중에게 건전한 휴식공간이 필요한 때였다. 사업 요청을 수락한 벽산은 난장판이 된 극장 운영을 회복시키기 위해 지배인 일을 맡았으나 실상은 사장, 경리, 선전 등 모든 업무를 도맡다시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객을 위해 최대한의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극장 청결 상태에서부터 공연물의 선택, 선전, 영사 효과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대로 극장 경기는 호전되어 성황을 이뤘다.

대단한 성황을 이루자 여러 유혹이 쏟아졌다. 영화 상영 일자를 확보하려는 업자들의 필사적인 요청을 허락하기만 하면 상당한 수입이 보장되던 때였다. 그러나 ‘불의의 재물은 망신의 근원’이라고 가르친 선친의 교훈은 벽산에게 물리쳐야 할 유혹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극장이 정도를 걸으면서 평판이 오히려 좋아지자 극장 수입은 더욱 늘어났다. 이에 고무된 이현수씨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불이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외국의 명화를 수입하는 일에 전념했다.

1950년 봄 벽산은 국내에 부족한 물자를 수입하기 위해 서울에 동양물산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마침 이현수씨의 불이무역도 일본에서 크게 번성하여 미국의 8대 영화사를 한 손에 쥐고 외국 영화 수입을 독점하고 있었다. 벽산은 이현수씨와 제휴하여 무역과 영화 수입을 추진키로 하고 서울 소공동 삼화빌딩에 사무실을 차렸다.

6·25전쟁 후 부산으로 피란 간 벽산은 식수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실시한 상수도 시설 확장용 입찰에도 참여한다. 조국의 보람 있는 일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자부심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그는 영화 사업도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전쟁에 시달린 국민들을 위한 사업이라는 사명감으로 여겼다.

당시 극장에 걸리던 외국 영화는 일제시대에 들여온 탓에 일본어 자막을 뭉갠 후 상영하는 낡은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판에 우리말 자막을 넣은 새 외화를 상영하니 그 효과가 대단하였다. 부산의 동양극장과 대구의 송죽극장에서 벽산이 수입한 외화가 개봉되었을 때 어찌나 관객이 밀려드는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부산의 동아극장 주변은 이중 삼중의 인파가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기마경관이 출동하여 정리해야 할 정도였다.

벽산은 외화 수입 사업 1년 만에 20여편의 외화를 수입하면서 직원도 20여명으로 늘리는 등 전국의 극장을 완전히 장악한다. 미국 8대 영화사 중 6대 영화사 작품을 독점 배급하는 놀라운 성장을 일궜다. 그는 수입 외화를 선정할 때도 명화만을 엄선해서 고객에게 봉사한다는 경영방침을 지켰다. 미국 서부의 개척정신에서 인내와 용기를 배우고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처절한 고난의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례를 일깨운다는 생각이었다. 벽산은 영화 사업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찌든 국민의 의식구조를 깨우치는 전기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좋아하였다. 인간애, 그 휴머니즘을 잘 반영하는 영화만을 속속 수입하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지상에서 영원으로’ ‘노인과 바다’ ‘십계’ 등 참다운 사랑과 우정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인간의 고결한 의지와 이해타산을 떠난 인간관계에 나 자신이 먼저 심취하는 것이었다.’(‘내 집을 채우라’)

1953년 서울 환도와 함께 벽산이 매입한 단성사는 외국 영화 전문관의 자리를 굳혔다. 실적 역시 매년 1위를 차지했다. 벽산은 1956년 서울 중앙극장까지 인수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부산 대영극장도 인수했다. 1958년에는 대구의 만경관과 제일극장, 대전의 중앙극장, 인천의 동방극장, 광주의 동방극장, 진주의 시공관을 운영하면서 전국의 영화 체인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한국의 영화왕으로 등극한다.

이 무렵 벽산이 운영하던 동양물산은 교통부, 체신부, 남조선전기(지금의 한전) 등에 기재를 납품하면서 전후 복구를 위한 사업으로 활기를 띠었다. 벽산은 이때부터 한국에도 컴퓨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하여 1954년 전산사업부를 설치한다. 그 첫 사업으로 보건사회부에 통계기기를 공급하며 미국 레밍턴사의 대리점을 맡아 전자계산기, 즉 지금의 컴퓨터를 취급한다.

그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1962년 숭동교회 장로가 된 벽산은 신앙생활과 흥행 사업을 병행할 수 없다는 신앙적 결단으로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을 처분한다. 항간에는 그 무렵 발생한 증권 파동과 벽산의 극장 처분이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억측이 떠돌기도 했지만 이는 온전히 벽산의 신앙심이 만들어낸 결단이었다.

벽산의 차남인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벽산의 차남인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신앙심 때문에 영화 사업 포기

‘날마다 은행 직원들이 직접 나와서 극장 수입을 포대로 쓸어갈 정도의 호황이 계속되는 극장을 처분한다는 것은 내가 장로로서의 분명한 의지를 하나님께 받들어 올린 신앙의 쾌거였다. 정말 통쾌한 믿음의 승리였다.’(‘내 집을 채우라’)

이어 벽산은 부실화한 건자재기업 한국슬레트를 인수하여 경영정상화에 매진한다. 생산업 경험이 없던 벽산은 기술을 직접 배우고 익히면서 새벽 6시에 지프를 몰고 출근하여 밤 11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현장경영에 몰두했다. 그는 부실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지 않으면 100여명이나 되는 직원들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가 나타나 한국슬레트는 매년 2배 성장이란 기적을 낳았고, 이후 공장을 확장하면서 완전자동화시설을 도입함으로써 생산성 향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침 농촌 근대화 작업의 일부인 농어촌 지붕개량 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되어 슬레트 생산량은 수요를 충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국슬레트는 오늘날 다양한 건축 자재를 생산해내는 주식회사 벽산의 기초를 다졌다.

그 사이 답보와 침체를 거듭하던 동양물산의 활로책으로 벽산은 금속 양식기 생산과 수출의 길을 마련하는 한편 농업기계 사업에도 눈을 돌려 오늘날 주력 사업의 기틀을 다진다. 낙후한 농어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기계화 영농으로 소득을 올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처럼 벽산은 모든 기업을 운영하면서 항상 소명의식을 갖고 임하였다. 그가 이룩한 벽산그룹은 이미 언급한 기존 업체들 외에도 전자제품의 인희산업, 전선·코드 제품의 한창전기공업, 소프트웨어 전문의 벽산정보산업, 장치사업의 벽산금속, 벽산특수화학 등 국내 유수의 계열사를 다수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러나 이들 기업군은 벽산 생전에 구조조정을 거쳐 현재는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벽산주식회사를 장남 희철씨가, 농기계를 생산하는 동양물산기업을 차남 희용씨가, 그리고 벽산엔지니어링을 삼남 희근씨가 담당해 각각 회장직을 맡고 있다.

“집안 기업은 전적으로 선친께서 일궈놓은 것이니 저는 무조건 선친의 뜻에 따라 살기로 했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동양물산에서 생산하는 농기계의 디자인을 제가 직접 맡아 그리고 있지요. 제 전공이 산업미술이라 안성맞춤입니다. 농기계 생산은 식량자급의 근간이 되는 사업이니 매우 중요하지요. 현재 생산량의 60%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세계 농기계 생산 랭킹 12위인데 우선 10위 안에 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자율주행 트랙터도 내놓아 호평받고 있습니다. 기업은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이 맡아 운영해야 하지요. 자식에게 무조건 물려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에 기업을 이룩하라는 선친의 뜻이기도 하지요.”(차남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1974년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을 맡은 벽산은 소원해지는 한·미동맹을 다지는 민간외교에 앞장서며 이듬해 김장환 목사와 함께 미국에 건너가 각계 각층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상대로 반한(反韓) 여론을 순화시키기 위한 로비활동을 벌인다. 벽산은 귀국 후에도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후보의 주한미군 철수 공약에 맞서 설득전을 벌였고, 결국 카터 후보는 대통령이 된 후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포기했다.

민간외교가 빚은 만년의 고초

그러나 그의 민간외교 활동은 뜻하지 않은 파장을 낳았다. 그즈음 박정희 대통령이 벽산그룹에 세무사찰을 지시한 것이다. 세무사찰의 발단은 미군 철수 저지운동과 연관돼 있었다. 벽산이 그와 사돈관계인 김종필씨를 대통령으로 앉히기 위하여 1974년 이후 여러 차례 미국을 드나들면서 요로에 수백만달러를 쓰며 로비를 했다는 혐의였다. 차남 희용씨가 바로 김종필씨의 아랫동서이다.

벽산은 1979년 10·26 사태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받기도 했는데, 세무사찰 때와 동일한 혐의였다.

벽산 김인득의 가계

1997년 7월 10일 서울에서 별세한 벽산은 부인 윤현의와 사이에 3남2녀를 두었다. 벽산주식회사 회장인 장남 희철(83ㆍ미 퍼듀대 원자공학박사)씨는 허영자(80)씨와 사이에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성식(53)씨는 ㈜벽산 사장으로 박성희(50)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찬식(51)씨는 ㈜벽산 부사장으로 장현주(50)씨와 결혼하였다. 삼남 은식(48)씨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양성원(43ㆍ연세대 교수ㆍ첼리스트)씨와 결혼했다.

동양물산기업 회장인 차남 희용(78ㆍ미 인디애나주립대 졸업, 산업디자인 전공)씨는 박설자(75)씨와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태식(47ㆍ미 유타대 졸업)씨는 국제기계 사장으로 유혜영(43)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식(41)씨는 동양물산기업 사업분석조정실장이며, 딸 소원(42ㆍ미 파슨스대 졸업)씨는 최문성(43ㆍ동양미디어 대표)씨와 결혼하였다.

3남 희근(74ㆍ미 마이애미대 졸업)씨는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으로 양인(65ㆍ갤러리인 대표)씨와 사이에 아들 중식(38ㆍ벽산엔지니어링 이사)씨를 두었다. 중식씨는 강여진(36)씨와 결혼하였다.

벽산의 장녀 숙희(80)씨는 정영현(작고)씨와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다. 아들 순욱(54)씨는 우수진(48)씨와 결혼하였으며, 장녀 순미(56)씨는 천마 대표로 김의석(57)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순영(53)씨는 목사인 김진봉(59)씨와 결혼하였다. 벽산의 차녀 연숙(71ㆍ서울대 사회학과 졸업)씨는 원영종(73)씨와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장남 치성(42)씨는 문지연(37)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치열(40)씨는 린다 심(38)씨와 결혼했다.

내가 본 벽산 김인득

‘뜻있는 돈벌이 한 애국지사’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기업인으로 성공한 벽산 김인득 회장은 돈벌이도 뜻있게 하였고 기업활동도 절도 있게 했다. 하늘에 재를 쌓는 덕 있는 분이었다. 벽산은 사별한 아내의 뜻에 따라 돈이 잘 벌리는 극장업에서 손을 떼고 생소한 건자재업에 개척자정신으로 투신했다. 이후 전국 농촌개량 사업에 앞장서는 새마을운동 실업가로 변신하였는가 하면 숭동교희 장로로 장립하여서는 하늘나라를 위한 기업활동에 매진하였다.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이 되어서는 1970년대 유신체제로 인해 삐끗거리던 한·미동맹을 바로 세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요로에 호소하는 애국심을 발휘한 애국지사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 벽산 선생과 함께 방미하여 통역을 담당하였는데 그분은 겸손하게도 자기의 역할은 김 목사의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일, 즉 여비와 소요 경비 일체를 부담하는 일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만년에 벽산은 비가 줄줄 새던 극동방송 구건물을 새로 지으라며 당시 큰돈이었던 3억원을 선뜻 내주기도 했다. 당시 극동방송은 하루 18시간씩 북한·중국·소련·일본 지역에 복음 방송을 내보냈는데, 건물이 낡아 비가 줄줄 새는 2층짜리 블록 건물이라는 사실을 아내를 통해 듣고서는 하늘나라에 그 뜻을 쌓는 큰 기부를 했다. 현재 극동방송국에는 이를 기념하는 벽산의 부인 고 윤현의 권사 기념관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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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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