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산(碧山) 김인득(金仁得)은 다방면에 걸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일제하 지방금융조합 직원에서 출발한 그는 단성사, 중앙극장을 비롯한 전국 영화체인망을 장악해 한때 ‘영화왕’으로 불렸다. 이어 동양물산, 한국슬레트, 벽산건설 등 굴지의 기업군을 일구고 새마을운동 실업가로 농촌진흥에 앞장서기도 했다. 만년에는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으로 취임해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맞서는 전미 순회강연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한·미동맹을 다지는 민간외교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라는 평가도 받는다.
벽산은 1915년 8월 17일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능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김상수와 모친 박차연 사이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벽산은 집안 어른이 ‘푸른산처럼 기개 있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서흥 김씨 24세손으로 선조 중에는 동방5현으로 꼽히는 김굉필이 있다. 김굉필은 조광조, 이황, 이언적의 스승이었던 조선조 정통 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터득한 집념의 삶
벽산은 다섯 살 때 맞은 3·1독립운동에 대해 회고록(‘내 집을 채우라’)에 이렇게 적고 있다. ‘어느 날 많은 사람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아직도 거풀진 땅의 밑바닥 속에서 솟구쳐 나올 것 같은 3·1 만세의 함성은 눈을 감아도 환히 보이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일제 치하의 전통적 제사가 끊이지 않는 집안에서 자란 나는 이 아름다운 씨앗들을 나도 모르도록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꽁꽁 동여매야만 했다.’
벽산은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다가 아홉 살 때 칠서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3수 끝에 마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하면서 어려서부터 집념의 삶을 터득한다. 그가 세 번째 도전했던 고교 입시는 어느 해보다 경쟁이 치열하여 경쟁률이 15 대 1이나 됐다.
‘마산상업에 입학하여 1학년 교과서를 펼쳤을 때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이 될 수 없다” “네가 초목과 같이 썩을 수 있겠느냐?”는 글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내 집을 채우라’)
마산상업에 진학하고 1년쯤 지나 벽산은 동네 윤 부자의 딸 윤현의와 결혼한다. 아내는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어서 벽산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산상업 시절 벽산은 항상 단정하고 조용하게 행동하면서 힘 있는 억양의 미남 학생이란 평을 들었다. 학업 성적도 우수한 편이어서 전국 주산대회에서 우승도 차지했고 서예전시회에선 항상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스포츠에서도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농구에서 센터, 축구는 키퍼, 탁구에서는 학교 대표선수로 활약하였다.
1934년 벽산은 학교 추천으로 마산의 내서금융조합에 입사한다. 7명의 직원은 거의가 전문학교 또는 갑종(5년제) 상업학교 출신이어서 그 역시 말단 자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조합이사는 일본인 장교 출신으로 ‘불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미가 급하고 강직한 데다 일밖에 모르는 위인이었다. 까다롭고 빈틈이 없어 밑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은 두세 달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정도였다.
벽산은 그곳에서 한국인이란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현실은 조국의 비극을 생각하게 했다. 조국 잃은 설움에 무학산 기슭에 올라 봄날의 황혼을 바라보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문득 꿀벌의 발에 꽃가루를 묻혀 번식을 유도하는 식물의 지혜가 떠오르면서 식민지 시대와의 사생결단을 각오한다. 당시 그는 이런 각오를 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제1인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조국이, 그리고 미래의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언제 어디서든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리라.’(‘내 집을 채우라’)
금융조합 일에 매진하기 시작한 벽산은 조합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아내와 별거까지 감수하면서 규정과 실무 숙달에 열중했다. 조합원 모집, 예금 권유, 조합 내에 산적해 있는 연체 독촉 처리 등에서 모두 일등을 했다. 이듬해 조합이사는 조합의 중요한 열쇠를 그에게 맡겼다. 자신의 각오대로 직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된 것이다. 벽산은 비로소 이때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아내와 어린 딸을 직장이 있는 마산으로 데려왔다.
일본서 맺은 인연으로 영화 사업 도전
그 무렵 애국단체들은 전국적으로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벽산 역시 이 민족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그는 내핍 생활이란 단순한 절약이 아니라 저축이 뒷받침돼야 효과가 있다고 여겨 당시 28원의 월급을 받던 처지에 10년 계획으로 1만원 저축 목표 계획을 세웠다. 목표달성을 위해 갓 분가해서 신혼살림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도 하룻밤 숙직비 50전을 벌기 위해 숙직을 도맡아했다. 출장 횟수도 어느 누구보다 많았지만 아예 구두 뒷굽에 말굽 징을 박고 새벽에 집을 나와 하루 80리 길을 걸어다니면서 여비를 아꼈다.
벽산은 빼어난 업무 실적을 인정받아 1938년 금융조합연합회 경남지부로 전출된다. 이어 전문학교 진학에 뜻을 두고 일본 유학을 위한 검정고시 준비에 몰두한다. 그러나 경제적 궁핍과 격무로 인해 신경쇠약에 시달린 끝에 결핵 3기 진단을 받는다. 휴직원을 내고 귀향하여 1년간의 투병생활 후 건강을 회복해 1942년 진양금융조합 수석서기로 취임했지만 이듬해 금융조합 생활을 청산하고 진주 상공회의소 업무과장으로 전직한다. 당시는 2차 대전 말기의 궁핍한 시대였다. 벽산은 전직과 함께 집 옆에 660㎡(200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밭에서 한 해 수확한 열한 가마니의 고구마와 철마다 거둬들인 채소로 집안 식구는 물론 이웃들의 굶주림을 다소나마 채워줄 수 있었다.
1945년 8·15광복 후 벽산은 가족을 진주에 남겨놓은 채 부산으로 가서 친구의 철공소를 맡아 공원들과 자취생활을 해가며 사업 경영의 밑바탕을 다졌다. 그해 8월이 다 갈 무렵 사카모토 마사기씨의 가족이 진주에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벽산이 금융조합에 입사했을 때부터 신임을 주던 인물로, 벽산이 진주 상공회의소 업무과장으로 간 것도 사카모토씨의 배려 덕분이었다. 사카모토씨는 1945년 4월 육군에 소집되어 부산의 병사부에서 근무하다가 패전으로 고국에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벽산은 그 가족의 이삿짐을 꾸려 일본에 발송하는 일을 도맡는 등 귀국을 도와줬다. 그날 밤 사카모토씨와의 작별을 한 시대와의 단절로 인식한 벽산은 전혀 다른 운명을 만들어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일본에 의해서 짙게 파인 발자국을 보며 일본을 원수시하고 그들의 침묵에 만족해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비바람에 씻겨난 자국만 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식민지 근성이다. 저들은 다시 일어설 저력이 충분한 민족이다.…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부흥을 꾀하려면 서울이나 부산에 머물 게 아니라 일본을 알아야 한다.’(‘내 집을 채우라’)
부산으로 돌아간 벽산은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한 단계로 신문사 총국을 운영한다. 마침 종이가 귀한 터라 신문 용지 구입을 위해 일본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때 고베에서 불이전기회사 사장인 재일교포 이현수씨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일본에서 신세를 졌던 이현수씨로 인해 그는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게 된다. 귀국한 이현수씨는 당시 사재를 털고 빚을 내어 부산의 큰 극장들을 인수해 친척과 직원들에게 위탁경영시켰는데, 좌경세력이 개입하여 극장 쟁탈 분규가 벌어졌다. 실무책임자가 구속됐고 이현수씨 역시 구속돼 극장은 타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이때 벽산은 3개월간 이현수씨 옥바라지를 하면서 진주의 집을 팔아 그를 석방시키고 그의 재산도 되찾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