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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8호]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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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마지막 송상’ OCI그룹 창업자 송암이 남긴 것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2021-03-11 오전 9:02:49


송암 이회림
   
   1917년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에서 태어남
   1930년 송도보통학교 졸업, 손창선 상점 입사
   1934년 박화실과 결혼
   1946년 서울 종로에 이합상회 설립
   1948년 개풍상사 설립
   1956년 대한양회 설립
   1968년 동양화학 인천공장 준공
   2005년 송암미술관 인천시에 기증
   2007년 7월 18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
   

   송암(松巖) 이회림(李會林)은 ‘마지막 송상(松商)’이라고 불리는 우리 시대 전설적 상인이다. 그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개성 잡화상 수습점원으로 출발하여 30세 때 서울 종로통에 굴지의 무역상사 개풍상사를 차려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생전에 소나무와 바위를 매우 아꼈던 그는 아호처럼 사시사철 푸르른 삶의 자취를 남겼다.
   
   
   40여년간 화학산업에만 매진
   
   그는 OCI(The Origin of Chemical Innovation)그룹의 창업자이자 송암미술관의 설립자로 살다 갔다. 40여년간 화학산업 분야에 매진하며 오늘의 OCI를 글로벌 종합화학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한국 고미술 애호가로서 평생 수집한 문화재 8400여점을 인천시에 기증하는 등 통 큰 사회환원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세수할 때 비누를 쓰지 않을 정도로 물자를 아꼈다. 신문에 끼어 오는 광고 전단지까지 잘라 메모지로 아껴 쓰는 알뜰한 삶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는 신용과 근면성실을 중시하는 개성상인의 덕목을 따라 행동하는 리더로 존경을 받았으며, 새로운 사업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과감한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화학산업의 기틀을 세운 뛰어난 사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붓글씨를 즐기고 서화와 골동품에도 식견이 높았던 송암 이회림 회장은 전통문화와 예술의 보존에도 힘썼으며, 뛰어난 전통예술품의 수집과 전시를 통해 또 다른 의미의 나눔을 실천했다.”(송암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추모하며, 이홍구 전 국무총리)
   
   기업인으로서 송암은 1960년대 이후 40여년간 오로지 화학산업에만 매진했다. 그 결과 오늘의 OCI그룹은 삼광글라스, 유니드, 유니온, 이테크건설, 오텍 등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 현지 공장 및 지사를 둘 정도로 성장했다.
   
   송암은 1917년 4월 17일 경기도 개성 만월동 288번지에서 중국과 백삼교역을 하던 이영주와 모친 윤효중 사이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번창하던 사업이 1929년 대공황 때 순식간에 문을 닫자 선친은 그해 56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식구들의 충격은 매우 컸다.
   
   “38세에 홀로되신 어머니께서 철부지 5남매를 키우시느라 형언할 수 없이 많은 고생을 하셨다. 어머니는 집에다 솜틀을 놓고 밤샘을 하면서 솜을 타거나 남의 밭김을 매주고 뽕을 얻어와 그것으로 누에를 쳐서 어린 5남매의 생계를 이어갔다.… 내 생애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신 분은 역시 어머니였다. 서당 훈장을 지내신 외할아버지의 엄격한 훈도를 받은 어머니는 자애롭기 그지없었으나 우리 5남매에게는 매우 엄격하셨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겨울철 눈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내렸고 날씨도 더 추웠던 것 같다. 눈이 내리면 그 눈을 말끔히 치워야 하였는데, 마당은 물론이려니와 대문 밖 이웃집 문전의 눈까지도 치우게 하셨다. 눈을 치우지 못하면 밥상머리에 앉지 못하게 하셨다.”(‘내가 걸어온 길’ 이회림)
   
   송암의 모친은 친척집에서 뜨물을 얻어다가 돼지를 키우고, 아침 일찍 남의 집에 가서 집을 치워주고 밥 두 그릇을 얻어다 다섯 식구를 나눠 먹였다. 할머니가 장만해 놓은 땅에서 쌀이 들어왔는데, 어머니는 제사에 쓸 쌀을 조금 남겨 놓고는 정미소에 가서 좁쌀로 바꾸어 가면서 절약하였다고 한다.
   
   
   눈을 안 치우면 밥상에 앉히지 않은 어머니
   
   송암의 할머니 또한 알뜰한 살림꾼이었던 듯하다. 역시 젊은 시절을 홀로 보낸 할머니는 집안에서 소규모로 소주를 만들어 판매했다. 이 덕분에 다소 축재해 장단역 근처에 전답을 매입하였다.
   
   “개성에서 장단역까지는 기차삯이 25전이었다. 할머니께서는 갈 때는 홀몸이고 거리가 약 30리밖에 안 되니 걸어가자고 하시기에 나는 돈을 아끼시려나 보다 하고 그저 따라만 다녔는데, 돌아올 때에는 콩이나 녹두 같은 잡곡을 가져오게 되니 기차를 타고 온다. 이때에도 할머니께서는 ‘사람이란 한 푼이라도 아껴야 앞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고, 나는 10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도 크게 감명을 받아 성장해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내가 걸어온 길’)
   
   송암은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진학의 꿈을 접는 대신 서점에서 일하려고 했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독서를 하면 상급학교에서 배우는 것 못지않게 지식을 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어머니의 반대로 좌절됐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니 대견하다마는 장사를 배우고 익히려면 서점보다는 큰 상점에 취직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당시 개성에는 큰 도매점들이 있었는데 이런 곳에 취직하면 처음 3년간은 월급 없이 일을 시켰다. 이 기간이 지나야 주인이 점원의 됨됨이를 평가해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본인 명의로 적립금 100원을 주는 게 관례였다. 바로 개성상인으로서 가능성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절차였다.
   
   “나는 빈한한 가정의 장남으로 3년간 보수 없이 일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활이 어렵다고 당장의 수익만을 좇지 말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생각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서점에서 일하는 것을 막으셨다. 그 후 나는 아버님 친구분의 도움으로 잡화 도매상인 손창선 상점에 점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고, 송상으로서의 자질을 갈고닦기 시작하였다.”(‘내가 걸어온 길’)
   
   
1 1968년 11월 8일 인천 소다회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공장 시설을 안내하고 있는 송암.
2 1986년 금탑산업훈장 수상 기념 사진. (오른쪽부터) 이회림 명예회장, 부인 박화실 여사, 아들 이수영 당시 동양제철화학 사장.
3 1977년 청구목재부설여자중학교 입학식에서 학생들과 함께. 청구여중은 이회림 명예회장이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개설한 학교로 산업체 부설학교의 효시가 됐다.
4 2005년 6월 송암미술관 기증식에서 평생 수집한 고미술품을 둘러보는 송암. photo OCI그룹

   개성 상점서 수습 1년 만에 주문 일도 맡아
   
   당시 개성 상점에는 잡화류 다음으로 화장품류가 많았다. 송암이 여기서 느끼고 자극받은 것이 있었다. 바로 백미 한 가마니가 5〜6원 할 때 한 타에 15원 하는 ‘제니와’라는 고급 화장비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누 6개가 쌀 한 가마니와 맞먹는 값이었다. 그는 이런 물건은 오직 화류계 여성, 즉 홍등야곡에 젖어 있는 족속들이 쓸 것이라고 여겼다. 남자가 그런 비싼 비누를 쓴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용인되지 않을 뿐더러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비누는 손 씻을 때나 머리 감을 때만 썼지 얼굴에는 쓰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비누 세수는 하지 않았다.
   
   송암은 수습점원 1개월도 안 돼 상점에서 취침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보통 수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한 일인데 그에게는 일찍 허락됐다. 그러나 상점에 가지고 갈 만한 이부자리가 없었다. 없는 살림에 이부자리는 물론 의복까지 새로 만들려니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수습점원의 가장 어려운 일은 수사환(고참점원)들이 시내에서 주문받은 물건을 배달하는 것이었다. 자전거나 자전거 뒤에 손수레를 달고 짐을 싣고 배달을 다녔는데 적재량이 무척 많아 애먹었다. 송암은 약골이 아니어서인지 배달을 도맡아 했다. 그랬더니 주인은 물론 선임사환들도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1년도 안 돼 수사환들이 하는 주문 일까지 맡았다.
   
   “매일 시내를 일주하며 소매상에 주문을 받으러 다니거나 장단, 고량포, 구화장 등 약 100~200리 거리를 다니면서 주문을 받는 것이 주된 일이었고, 그 후 발전하여 자전거로 1박2일 또는 2박3일 코스를 다니면서 목표 이상의 실적을 올려 손 주인은 물론 큰 주인(자금대여 후원자)까지도 칭찬이 자자했던 것이 기억난다.”(‘내가 걸어온 길’)
   
   하지만 그는 손창선 상점이 파산하는 바람에 3년 반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상점은 파산했지만 소득은 있었다. 그가 다니던 상점에서 취급하던 잡화가 1000여종에 이르렀기 때문에 상품을 감별하는 안목이 생겼다. 또 좋고 나쁜 것을 알게 돼 후일 물정에 대한 이력을 터득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당시 개성 상점 점원의 일과는 아침 7시 전에 일어나 상점 문을 열고 조반 후에는 지방에서 오는 상인들에게 물건을 권하며 매매가 성립되면 짐을 꾸리는 일이었다. 짐 꾸리는 곳은 창고가 있는 청포전 도가였는데 이곳은 일종의 공동창고였다. 아주 오래전에 건립된 옛 송도상인의 유물인 것으로 전해진다.
   
   젊어서부터 이런 일과를 소화하던 송암도 대략 1주일 중 3〜4일은 분주하고 그 외에는 시내로 주문을 받으러 다니거나 황해도 일대, 경기도 일대를 자전거나 기차편으로 2박3일 또는 3박4일 출장을 다니면서 보냈다. 17〜18세의 나이로 이렇게 출장을 다닌다고 해서 송암은 선망의 대상이 된 듯하다.
   
   지방 출장을 나가지 않을 때에는 상점에서 밤늦도록 초(草)일기장을 기록하는데 수사환은 이를 수합, 정리하여 장부에 옮겨 쓴다. 주인도 늦게까지 장부 정리를 하다가 점원들과 같이 잠을 자는 경우가 종종 있어 월 7〜8회 정도 숙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가 실례를 들어 남긴 개성장부
   
   송암은 1934년 삼촌의 소개로 동갑내기 박화실(개성 정화여학교 졸업)과 결혼했다. 당시 개성 남대문 부근에는 포목도매상이 세 곳, 잡화도매상이 세 곳 있었는데, 송암이 손창선 상점을 나오자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기 상점으로 오라는 권유를 했다. 오히려 그는 선택을 고심하는 입장에 처했지만 높은 급여를 주겠다는 잡화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강형근 포목상을 선택했다.
   
   송암이 젊은 시절 익힌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은 고려청자, 고려인삼과 함께 개성의 자랑거리였다. 세계 최초의 복식부기인 이탈리아의 부기법보다 오히려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송암은 자신의 실거래 내역을 인용한 개성부기 실례를 자서전에 꼼꼼하게 기록해 ‘마지막 송상’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는데 그중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특히 개성부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초일기를 매일 기록하는 것이다. 상점의 입출금 내역은 물론이려니와 상점 주인의 계획표, 물품출입 상황 등을 적고, 특이한 점은 고객이나 이웃 상점에서 손님이 와서 한마디씩 하는 것도 일일이 적어서 장사의 정보로 활용하는 것이다. 상점주나 수사환은 초일기를 매일 또는 2〜3일 만에 분석하여 어떤 물품이 인기가 있고 어떤 상품의 가격이 어느 지방에서 내려가는지 감을 잡고 즉시 대처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개성상인의 배타적 보수성 때문에 오늘날까지 개성부기가 보급되지 못하고 역사적 유물이 되어버린 것이 안타깝다.”
   
   당시 개성에는 상인 간의 수습제도로서 차인제도(差人制度)가 있었는데,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도 장차 기업을 계승할 자제는 반드시 다른 상점에서 수년간 수습을 거쳐 기업을 계승토록 하는 제도였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면화류가 전쟁물자화되자 그가 다니던 강형근 상점이 급속히 신장했다. 덕분에 송암은 서울 북창동에 신설된 지점의 판매책으로 발탁된다. 그는 후일 “손창선 상점에서는 상인이 개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실성, 신용 등의 덕목을 배웠다면, 강형근 상점에서는 장사의 기본 원칙과 방법 등을 습득하고, 상인으로 대성하려면 사고력, 즉 판단력과 책임감이 우선한다는 것을 터득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광복이 되자 송암은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귀향해 이웃 과수원 주인에게 돈을 꿨다. 당시 과수원 주인은 차용증서는 필요 없다면서 안방에서 꺼내온 100원 뭉치를 그에게 서슴없이 내놓았다. 당시만 해도 엄청난 거액을 이렇게 빌렸으니 그의 신용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종로 최고의 무역상 개풍상사
   
   그는 개성 시절의 장사 노하우를 살려 광복 후에도 거듭된 수익을 올리며 이재를 모았다. 그 결과 서울 관수동 입구 종로3가 1번지에 마침내 이합상회라는 간판을 걸게 된다. 이 가게는 1946년 장사를 시작한 이후 나날이 번창하여 불과 2년 만에 종로3가에서는 제일가는 점포가 되었다. 1948년 말 송암은 세든 점포를 매입하여 다시 무역상 개풍상사로 탈바꿈시키는데, 개풍상사는 대한중석에서 나오는 부산물 비스머스를 제련하여 독점 수출함으로써 1952~1953년 2년간 수출 실적 1~2위를 다투게 된다.
   
   이어 1955년에 대한탄광을 인수하고 이듬해 대한양회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펼친다. 대한탄광 시절에는 오늘날과 같은 장비가 없어 고생하는 광부들이 많았다. 송암은 광부들의 희생으로 탄광이 운영된다고 생각해 탄광촌에서 숙식을 함께했다. 또 장학회를 설립하여 직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주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에 회사를 운영하면서 장학사업을 시작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시발로 1979년에는 재단법인 회림육성재단을 설립하여 학술·문화 부문에 연구비를 지원했다. 1969년 군산의 청구목재를 인수하면서는 여공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고자 산업체 부설학교인 청구여중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어 송암은 오늘날 OCI가 된 동양화학을 1959년에 인수, 경영하게 된다. 동양화학은 애초 강원도 삼척에 소재한 일본인의 비누공장을 불하받은 김승호씨가 소다회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승호씨는 AID차관 560만달러 조달이 어려워지자 송암에게 동양화학을 인수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소다회는 섬유산업, 판유리 제조, 중석 제련, 식품, 의약, 세제 등 많은 곳에 쓰였으나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해 쓰는 형편이었다. 송암은 소다회를 만들면 수입대체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간산업을 일굴 수 있다고 판단해 동양화학을 인수했다.
   
   
▲ 2014년 9월 3일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시에 위치한 자회사 MSE(Mission Solar Energy)의 모듈 공장 준공식에서 이수영 회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

   직원 자녀 교육과 장학사업에 쏟은 정성
   
   송암은 이후 동양화학 제품의 수요처가 경인지역에 몰려 있고 제품 수송과 항만 입지 등을 고려해서 인천을 가장 적합한 공장 부지로 선택한다. 인천 앞바다의 두 개 섬 사이 2200m를 막아서 해수를 담수화하여 용수로 사용하는 큰 그림도 그렸다. 이는 중장비가 없던 당시 민간기업이 대규모 간척사업을 성공시킨 최초 사례로 기록됐다. 이 제방은 그 후 인천 도심에서 송도신도시를 잇는 주요 도로가 된다.
   
   그러나 1960년대 소다회 공장으로 성장하던 동양화학에도 위기가 닥쳐왔다. 1968년 소다회 공장의 실수요자는 대기업인데, 이들이 필요량 1년치를 일본에서 미리 들여오는 바람에 동양화학에서 생산한 소다회가 팔리지 않은 것이다. 이때 송암은 개인 보유 부동산과 인천 매립지를 처분해 회사를 정상화하겠다고 자구안을 내놓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집까지 팔아서 회사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을 보니 참다운 기업가다”라며 “경영정상화에 정부도 지원하라”라고 지시할 정도로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송암은 소다회 수입금지와 사채동결, 차관상환 유예 등의 정책을 이끌어냈다.
   
   OCI는 현재 태양광발전의 핵심 소재인 폴리실리콘 사업을 말레이시아(태양광), 군산(반도체)의 투트랙 생산지 전략을 통해 대응해 나가고 있다. 최근 OCI는 세계 최대 태양광 웨이퍼 기업인 롱기솔라에 9300억원 규모의 폴리실리콘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생산하는 폴리실리콘의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하기도 했다. OCI는 제조원가를 2020년 평균 대비 추가로 15% 절감하는 등 말레이시아 공장을 앞으로도 경쟁사 대비 원가경쟁력이 있는 사업장으로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6·25전쟁으로 개성이 북한에 편입되면서 송도중학교가 사라진 후 인천에 사는 개성 출신 인사들이 뜻을 모아 1952년 송도중학교의 문을 다시 열었다. 개성상인으로서 배움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가진 송암은 1982년 송도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송도중·고교를 운영하면서 건물 건축과 복지까지 일체를 지원해왔다. 이 학교에는 ‘사람이 먼저 되라’는 교시가 있는데, 기업가이기에 앞서 후배들에게 항상 ‘사람’이 되기를 주문했던 송암의 얼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송암은 2007년 7월 18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선영에 안장됐다.
   

   송암의 가계
   
   송암은 부인 박화실과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다. 장남 수영(작고·OCI 회장 역임)씨는 김경자(79·송암문화재단 이사장)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이 중 장남 우현(53·OCI 부회장)씨는 김수연(44·김범영 전 국회의원 장녀)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우정(52·넥솔론 전 대표)씨는 이성은(51)씨와 결혼하였다. 또 딸 지현(47·OCI 미술관장)씨는 김성준(47)씨와 결혼했다.
   
   송암의 차남 복영(74·SGC그룹 회장)씨는 박형인(69)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이 중 장남 우성(43·SGC에너지·SGC이테크건설 부사장)씨는 구은아(39·구자열 LS그룹 회장 장녀)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은 원준(37·SGC에너지 전무)씨이며, 장녀 정현(44)씨는 김주용(53·제이씨데코코리아 대표)씨와 결혼했다.
   
   송암의 3남 화영(70·유니드 회장)씨는 이은영(66·이철승 전 상공부 차관 딸)씨와 결혼하여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우일(40·유니드 전무)씨는 문영규(32)씨와 결혼하였으며, 딸 희연(42)씨는 한상준(49·유니드 부사장, 한승수 전 총리 장남)씨와 결혼했다.
   
   송암의 장녀 숙인(84)씨는 김일(재미교포)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숙희(81)씨는 이응선(85·전 국회의원)씨와 결혼하여 주연(55)·우연(48)씨 남매를 두었다. 송암의 3녀 정자(77)씨는 이병무(80·아세아그룹 회장)씨와 결혼하여 훈범(52)·훈승(51)씨 형제를 두었다.
   

   

   내가 본 송암 이회림
   “정으로 쪼갤 수 있는 바위의 눈을 가르쳐주신 분”
   

김용정 전 동양화학그룹 유니드 회장

회사에 입사해서 이회림 회장님을 한창 사업에 성공하고 계셨던 48세에 처음 뵈었다. 이후 회장님을 곁에서 보필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35년이라는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회사의 상사로서, 사업을 가르쳐주신 은사로서, 개인적으로는 부모님같이 많은 은혜를 입었다.
   전통적인 개성상인의 도를, 그것도 33년간이나 가까이에서 모시고 일하며 배울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나의 일생에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사업이나 일을 잘 풀어 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회림 회장님은 일의 핵심을 빨리 파악하여 가르쳐 주신다.
   처음에는 그 뜻을 잘 모르고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을 지시하는가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 모시고 사업을 하다 보면 그 방법이 일을 푸는 데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위에도 눈이 있다. 그 눈을 찾아서 정으로 쪼개야만 쉽게 깨져서 훌륭한 조각품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바위의 눈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경륜을 통한 심안(心眼)에서만 보여지고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이 사업을 하지만 하는 사업마다 성공하여 커다란 기업을 형성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동양화학그룹이야말로 이회림 회장님이 이룩해 놓은 큰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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