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도림역 승강장에 채무 관련 변호사 광고가 붙어 있다. ⓒphoto 연합
서울 신도림역 승강장에 채무 관련 변호사 광고가 붙어 있다. ⓒphoto 연합

금융위원회가 주도하는 일명 ‘신용사면’ 대책을 두고 금융권에서 볼멘소리가 나온다. ‘신용사면’은 금융권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2000만원 이하 채무를 연체하더라도 올해 안으로 전액 상환하는 개인과 개인사업자는 신용도 하락에 따른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한 대책이다. 연체 이력 정보를 금융사 간에 공유하는 것을 제한하는 게 핵심이다. 정식 명칭은 ‘코로나19 관련 신용회복지원 협약’. 이 ‘신용사면’ 대책은 오는 10월 초부터 시행된다. 이로 인한 혜택을 받는 이들은 개인과 개인사업자를 합쳐 약 230만명 수준으로 추정된다는 게 금융위의 분석이다.

지난 8월 11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서울 여의도 은행연합회에서 은행연합회·여신금융협회·저축은행중앙회 등 주요 금융권 협회 대표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다음 날 금융권 협회·중앙회와 신용정보원, 6개 신용평가회사가 ‘코로나19 관련 신용회복지원 협약’을 체결했다. 은 위원장은 “코로나19 대유행의 장기화로 영업제한, 소득감소 등 서민경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고, 채무연체로 인해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신용점수 하락, 금융거래 조건 악화 및 대출 거절 등 금융 접근성 저하가 우려된다”며 “위기극복은 물론 정상적인 경제생활 복귀를 위한 신용회복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번 대책의 도입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번 대책은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으며 채무상환 과정에서 연체가 발생한 분들 가운데 그동안 성실하게 상환해온 분들에 대해서는 신용회복을 지원할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문제는 의도는 좋지만 관이 금융을 주도하면서 발생하는 리스크는 고스란히 민간업체의 몫이 된다는 점이다. 금융위 등도 이런 비판을 의식해 이번 대책이 철저하게 민간 주도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 때문인지 지난 8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정책의 취지를 설명한 은 위원장은 정작 다음 날 협약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신용평가업계에서는 ‘신용사면’ 대책이 시행되면 CB평점(신용점수)의 기존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고 본다. 대책이 현실화하면 일단 신용점수가 변동된다. 이 대책의 대상이 되는 개인과 개인사업자는 연체이력이 있어서 점수가 낮게 나와야 하는데, 그게 반영되지 않으면 신용점수가 높아진다. 신용점수가 변동되면 이 점수를 활용하는 금융기관도 자연히 영향을 받는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이 대책의 실행으로 발생 가능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심플하게 신용점수 500점 이하는 기존에 대출 거절이었다고 하자. 이 정책으로 인해 기존 연체이력이 있던 사람의 점수가 오를 테니 금융기관은 이 점수 구간을 상향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600점 이하에 대한 대출을 거절하는 형식이다. 그러면 연체이력 없이 기존에 500~600점 사이에 있던 사람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연체 안 하려고 하위업권에서 대환대출을 받으면서 성실히 채무를 갚아온 사람은 뭐가 되겠나. 그렇게 열심히 갚아온 이력들을 통계적으로 반영한 게 신용점수다. 그런데 정부에서 이런 식으로 내려찍으면 신용점수의 개념이 이상해진다.”

‘신용사면’ 대책에 대한 불만은 카드사에서도 나오고 있다. 한 대기업 계열 카드사 관계자는 “연체가 발생한 저신용자, 고위험군 DB를 삭제하고 카드발급과 현금서비스 등을 해 주라는 건데 그건 결국 카드사 리스크로 돌아온다. 그걸 강제하는 것”이라며 “연체이력 삭제해주고 대출을 내주는 건 카드사 사업손실로 잡힐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기존에 대출을 받지 못할 만큼 리스크가 높은 이들을 대상으로 대출을 내주기 때문에 부실이 날 가능성이 높고 카드사는 이로 인한 손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설명이다.

지난 8월 10일 은성수 금융위원장(가운데)이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 뱅커스클럽에서 금융권 민생지원 및 일자리 창출 점검 간담회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8월 10일 은성수 금융위원장(가운데)이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 뱅커스클럽에서 금융권 민생지원 및 일자리 창출 점검 간담회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정책적 특수성 감안해야 한다는 반론도

대부분의 금융회사들은 자체적인 신용평가 모델 없이 신용평가회사 데이터를 가져다 쓰고 있다. 카드사의 경우 이 데이터로 카드 발급과 카드론, 현금서비스 등을 운영한다. 그런데 신용평가회사가 연체 데이터베이스를 삭제하고 중신용자로 바꿔 주면 이들이 주는 대로 업무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카드사 관계자들의 하소연이다. CB사 정보 관리를 담당하는 한 대기업 계열 카드사 담당자는 “연체이력이 삭제되면 점수가 오르고 기존에 카드 발급이나 대출이 불가하던 고객이 가능하도록 되면서 모든 금융 서비스에 왜곡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신용평가사의 한 관계자는 “금융기관들은 기존에 대출 낼 때 보던 심사 항목이 예컨대 3개였으면 4개로 늘리는 식으로 심사를 강화해 부실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대출을 내줄 때 위험이 높은 이들을 가려낼 방법이 줄어드는 만큼, 다른 심사 항목을 늘리는 방식으로 일종의 선별 작업을 강화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금융기관들은 어떻게든 사업손실을 피해갈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며 “결국 피해는 힘이 약한 서민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코로나19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피해가 컸던 계층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기 때문에 이 정도 리스크는 감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특수 상황에서 위험에 오래 노출된 개인사업자들에게는 이런 대책이 필요하다는 관측이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주간조선에 “위기상황이 되면 신용도가 취약한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충격을 받으니 과도한 부담을 완화해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며 “위기적 상황에서 충격을 받았던 걸 신용평가 항목에 그대로 반영한다고 하면 기존에 취약했던 상황을 더 고착화하고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의 엄격한 질서에서 보면 괴리가 있는 건 사실”이라며 “그러나 위기극복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계층에 대한 회복의 여지를 준다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전직 고위 정책당국자로서 보면 금융정책은 시장질서와 복지적 측면에서의 노력이 섞여 있는 부분이 있는데 냉정한 시장 논리의 기준에서 보면 “맞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위기극복을 위한 대책 역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경제 문제에 있어 이념적 접근을 하다 보니 시장질서를 무너뜨리거나 혼란을 주는 금융정책이 나오고 있다는 비판 역시 힘을 얻고 있다. 신용평가사 한 관계자는 “금융 소외자에게 합리적 기준, 예컨대 통신요금 잘 갚고 공과금 잘 납부했으니 가점으로 혜택을 주라는 식이면 이해가 가는데 다짜고짜 연체이력을 반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좀 막무가내로 보인다”며 “연체한 사람=정부가 구제해줘야 하는 대상이라고 단순하게 인식해버리니 이런 정책이 나오는 것 아니겠나”라고 분석했다. 전광우 전 위원장 역시 “정책이란 게 그렇듯 양쪽 측면을 모두 봐야 한다”며 “선별적으로 해야 할 부분이지만, 위기극복 과정에서 기존의 리스크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리스크 프라이싱’이라는 정상적인 시장작동원리를 훼손시키는 부분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정치적 여파 주목하는 시각도

엄밀히 말하면 ‘신용사면’ 대책은 정부 정책이 아닌 민간 협약이다. 금융위 역시 “이번 신용회복 대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금융위가 아닌 금융권의 민간 영역이 자율적으로 정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금융위의 한 관계자는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 금융권 협의를 거쳤고 그런 우려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했다”며 “다음 날 발표한 내용은 은행연합회나 CB사 등 금융권이 자율적으로 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 정책의 정치적 여파를 주목하고 있다. 매번 대선 때면 부동층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쳐온 자영업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정책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한 전직 의원은 “역대 대선을 보면 자영업자들이 항상 부동층이었다. 2007년에는 이명박에 확 쏠렸고 2012년에는 박근혜와 문재인에 반반씩 쏠렸다”며 “이들이 2017년에는 문재인을 찍은 것으로 나는 파악한다”고 했다. 대선 등 큰 선거 때는 결국 중도층으로 통하는 부동층을 누가 잡느냐가 승부를 가를 때가 많은데, 자영업자들은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 쪽에 표를 던지는 성향이 높은 게 사실이다. 특히 자영업자 등 경기와 정책에 민감한 부동층의 경우는 이 같은 쏠림현상이 더욱 심하다는 분석이다. 이 전직 의원은 “이전 총선 때는 민주당이 강남·송파 쪽도 이겼었지만 4월 서울시장 선거 때는 이 지역에서 완전히 표를 잃었다”며 “왜 그랬겠나. 종부세 이슈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의 금융지원책을 자영업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정책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는 설명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도 국민행복기금을 이용해 1997년 외환위기 탓에 신용불량자가 된 236만명 중 연대보증으로 채무를 진 사람 등을 선별적으로 사후 구제해준 적이 있다. 국민행복기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이번 ‘신용사면’ 정책의 실효성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이런 분석에 힘을 더한다. 한 국책기관 연구원은 “이번 정책목표 대상이 어차피 대출 안 나오던 사람들 아니냐. 그거 한다고 대출 안 나오던 사람들에게 대출이 나오겠나”라며 “실제론 영향이 별로 없는 요식행위이고 자영업자들을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걸 수도 있다”고 했다. 이번 정책이 현실화하더라도 대부분의 대상자들은 새로 대출을 받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 만큼 실제 금융권에 미치는 파장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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