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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
[2534호] 2018.11.26

적의 적은 동지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의 해빙

노석조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 지난 10월 25~26일 오만을 방문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오른쪽)가 카부스 빈 사이드 알 사이드 술탄을 만나고 있다. photo 뉴시스
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흑흑” 소리를 내던 그녀는 끝내 “엉엉”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미리 레게브(53) 이스라엘 문화체육부 장관은 지난 10월 28일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아부다비에서 열린 국제유도대회 시상식에서 이스라엘 국가(國歌) ‘하 티크바’가 울려퍼지자,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몸을 들썩들썩하다 눈물을 쏟아냈다. 순간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는 금메달을 딴 이스라엘 유도선수에서 레게브 장관으로 일제히 쏠렸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왕따 국가다. 중동 대부분의 나라가 1948년 팔레스타인을 제치고 건국 선언을 한 이스라엘을 적대시하고 외교 관계도 맺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요즘도 툭하면 팔레스타인과 무력 충돌을 하고, 아랍·이슬람권 세계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는다. 그런 ‘적성국’ 이스라엘의 국가가 아부다비 공식 행사장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역사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레게브 장관뿐 아니라 이 모습을 지켜본 이스라엘인들 그리고 세계의 유대인들이 그간의 설움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하기에 충분했다. ‘하 티크바’는 히브리어로 ‘그 희망’이란 뜻이다. 2000년의 유랑 생활을 마치고 언젠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란 유대인의 염원이 담긴 노래로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불렸다.
   
   
   아부다비에 울려퍼진 이스라엘 국가
   
   아부다비에서 울려퍼진 ‘하 티크바’는 이스라엘이 지난 70년간 왕따 생활의 끝을 알리는 ‘희망’의 서곡인 걸까? 최근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의 관계가 해빙(解氷)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만한 일들이 잇따르고 있다. 대표적인 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오만 방문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10월 25~26일 오만을 방문해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78) 술탄(오만의 국왕 명칭)을 만났다. 이번 방문에 국외 첩보기관 모사드의 요시 코헨 국장도 동행했다. 이스라엘 총리의 오만 방문은 1996년 시몬 페레스 총리 이후 22년 만에 처음이다. 오만은 ‘중동의 스위스’라 불릴 정도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나라이지만, 이스라엘과는 국교(國交)를 맺지 않았다. 오만도 결국은 아랍·이슬람권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대(對)아랍 강경파인 비비(Bibi·네타냐후의 별칭)가 걸프 아랍국가 오만의 술탄을 웃는 얼굴로 만나 두 손을 꼭 잡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면서 “생각하기도 어려운 장면이 연출됐다”고 했다. 이스라엘 일간 예디옷아흐로놋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며칠 뒤 또 하나의 이례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스라엘 교통부의 이스라엘 카츠 장관이 지난 11월 7일 오만 수도 무스카트에서 열린 국제철로운송대회에 참석해 이스라엘의 지중해 항구 도시 하이파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의 예닌, 요르단 수도 암만, 사우디 수도 리야드를 지나 오만의 무스카트까지 2500여㎞에 달하는 거리를 하나의 철로로 잇는 ‘평화 철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카츠 장관은 “각국이 이미 갖추고 있거나 새로 건설하려는 철로에 국경을 넘는 철로만 추가 건설하면 ‘평화 철로’ 프로젝트를 어렵지 않게 실현할 수 있다”면서 “걸프 아랍국가들은 이 철로를 통해 지중해와 바로 연결될 수 있다”고 했다. 서로 손을 잡으면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며 양측 관계 개선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아라비아반도·지중해의 한 가운데 있어 국경이 열리면 허브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다. 주변 아랍국가들도 육로를 통한 국가 간 이동이 수월해진다. 이스라엘은 ‘평화 철로’가 완성되면 2030년까지 이 철로로 2500억달러(약 282조1250억원) 규모의 물동량이 지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자리에서 아랍국가들이 ‘평화 철로’ 프로젝트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이 같은 제안에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거부하는 의사도 밝히지 않았다. 이대로 해빙 무드가 계속되면 ‘평화 철로’ 이상의 프로젝트도 얼마든지 추진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선 시나이반도와 아라비아반도 사이의 아카바만 일대 홍해 연안을 공유하는 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사우디가 공동으로 대규모 복합 휴양시설을 건설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를 방문한 마리 레게브 이스라엘 문화체육부 장관(가운데). photo 뉴시스

   이스라엘·아랍 관통 2500㎞ 평화 철로
   
   이스라엘과 아랍은 과거 4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UAE 두바이의 한 호텔에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간부를 암살하고, 이라크·시리아의 핵시설들을 전투기로 기습 폭격·파괴하는 등 온갖 첩보·군사 활동을 펼쳐왔다. 그런데도 왜 아랍국가들은 이런 과거사까지 덮어가며 이스라엘과 잘해보려는 걸까?
   
   실마리는 이스라엘과 손잡은 대부분의 아랍국가가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수니·시아파 가운데 수니파 국가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UAE·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세력이 정치·종교적 원수인 시아파의 맹주 이란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 역시 이란과 앙숙인 이스라엘을 아군으로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란을 ‘공동의 적’으로 둔 수니파 세력과 이스라엘의 이해(利害) 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대이란 공동 전선(戰線)’이 빠르게 형성됐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속담이 이들 사이에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란을 싫어하는 걸까? 하필 왜 지금 대동단결(大同團結)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타결한 이란 핵협상에 주목한다. 당시 오바마는 미국의 전통적인 중동 우방인 이스라엘과 사우디 등 수니파 국가의 반대에도 이란 핵협상을 밀어붙였고, 결국 성사시켰다. 이에 2016년 1월 이란은 30여년간 묶여 있던 경제제재라는 ‘그물망’을 벗어던지고 중동의 패권국가로 발돋움할 계기를 마련했다. 동결(凍結)된 거액의 해외 자산을 되찾을 수 있게 됐으며, 제한됐던 석유 수출도 자유로워졌다. 인구 8000만명의 대국 이란이 30여년간의 결박에서 풀려나 크게 기지개를 켜고, 마음대로 손발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이란이 제재받을 때도 상대하기 버거웠던 사우디 등 수니파 국가와 이스라엘로서는, 오바마의 이란 핵합의는 대(大)재앙과 같았다. 그간 이란은 반이스라엘 정책을 통해 국내외 정치 세력을 규합하고, 레바논 시아파 무장 정치조직 ‘헤즈볼라’를 ‘대리인’ 삼아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공격을 직간접적으로 주도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 국경과 인접한 레바논 남부 일대를 실질 점유하고 있는데, 이곳을 거점 삼아 미사일 공격을 하는 등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했다. 제재 해제로 ‘오일머니’가 넉넉해진 이란이 헤즈볼라 지원과 이스라엘 공세를 가속할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다. 이란·헤즈볼라에 의한 안보 위협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선 오바마의 이란 핵협상 타결·제재 해제로 그 위협이 더 심각해졌다고 판단했다.
   
   사우디는 이란 제재 해제로 세계 석유 시장의 주도권을 이란에 빼앗길 뿐 아니라 중동의 정치·종교적 패권 싸움에서 밀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사우디는 미국으로부터 최첨단 무기를 수입하는 등 국방력 증진에 힘을 쏟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구가 2000만명으로 이란의 25%에 불과해 지상 병력도 규모 면에서 밀린다. 또 이란은 1980년대 8년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고 버텨낸 전쟁 유경험 국가지만, 사우디는 사실상 전쟁 경험이 없다. 사우디는 현재 우방인 예멘 정부를 지켜주기 위해 예멘 내전에 개입하고 있지만, 재래식 무기 외엔 별다른 장비도 없는 후티 반군을 상대로 이들이 점령한 예멘 수도 사나를 3년째 탈환하지 못할 정도로 전쟁 수행 능력이 낙제생 수준이다.
   
   이란의 부상(浮上)은 무엇보다 사우디 왕실에 정치적 위협이 된다. 이란은 1979년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시아파 성직자가 주동한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혁명으로 ‘이슬람공화국’이 들어선 나라다. “신(新)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이슬람 성직자(율법학자)가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호메이니 사상’은 이슬람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사우디 정권을 흔들었다. 사우디는 이슬람 성직자도 아닌 일개 가문이 세습 통치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우디가 이란을 싫어하고 근본적으로 이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이스라엘, 친구 더 늘려갈 듯
   
   이런 와중에 사우디·이스라엘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2016년 11월 미 대선에서 오바마의 후임으로 힐러리 클린턴이 아닌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는 정권 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트럼프는 앞뒤도 안 재는 대이란 강경파였다. 사우디·이스라엘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트럼프의 힘을 빌려 이란을 완전히 제압하기로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이들 사이에 훈풍이 부는 또 하나의 요인은 경제다. ‘석유 시대’에 사우디 등 아랍 산유국은 ‘오일머니’가 넉넉했기에 기술 산업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저유가·탈석유 시대가 도래하면서 아랍 산유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석유 없이도 부를 유지할 미래 먹거리 발굴이 시급해진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인구 800만명으로 내수시장은 작지만, 최첨단 인터넷 기술을 보유한 미래산업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나라다. 양측이 손을 잡으면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등 협업의 효과를 누릴 여지가 많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랍 산유국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받을 뿐 아니라 미개척지였던 아랍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더 나아가 아랍·이슬람권 국가가 주도하는 ‘이스라엘과 거래하지 말기 운동’을 중단하는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이 같은 운동으로 유럽 국가는 물론 아시아 국가에 각종 상품·기술을 수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스라엘 저명 외교·안보 전문기자 로넨 베르그만은 “이스라엘 총리의 공식 오만 방문은 세계 다른 나라들을 향해 ‘이거 봐라, 이제 아랍국가 반대가 겁나서 우리(이스라엘)랑 교류하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간 사우디 눈치를 보는 바람에 이스라엘에 정상 국빈 방문을 하지 못했던 나라들이 이제 하나둘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확대할 수 있다.
   
   아랍·이스라엘의 해빙 무드가 언제까지 지속할지는 예단할 수 없다. 여전히 팔레스타인 이슈는 아랍 어느 나라도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주요 현안이다. 팔레스타인 강경세력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무장충돌이 툭하면 벌어지고 이 과정에서 양측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11월 11~13일에도 하마스는 로켓·박격포 400발을 발사하고, 이스라엘은 헬기·탱크·전투기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에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아랍권 전역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졌다.
   
   하지만 2017년 말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라고 선언하는 친이스라엘 정책에도 사우디 등이 거센 반발을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팔레스타인 이슈가 아랍과 이스라엘의 해빙 무드를 중단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져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이슈는 이제 웬만해선 국제사회의 시선을 끌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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