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이후 미국 대선판이 억만장자 대결장이 된 것 같은 분위기이다. 블룸버그 전 시장의 홍보 웹사이트에 들어가보니 ‘미국을 재건하자’ ‘미래를 위해 싸우자’란 슬로건을 걸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 재산이 약 3조원이라는데 블룸버그는 58조원쯤 된다고 한다. 한 주간지는 최근 블룸버그의 선거전략이란 트럼프에게 10조원쯤 뚝 떼어주고 백악관에서 나가라고 하는 게 아니겠냐는 농담을 싣기도 했다.

TV 리얼리티쇼 진행자이자 억만장자 사업가에서 아무런 공직 경험 없이 곧장 백악관으로 뛰어든 트럼프의 성공은 과거의 대선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걸 증명했다. 미국 대선이 쌓아온 여러 가지 경험칙들, 예를 들면 최근에는 의원보다는 주지사 출신이 당선 가능성이 높았다든지, 정치인이 연방의원이나 주지사 등에 당선된 후 10여년이 지나면 대선 승리 가능성이 떨어진다든지 하는 말들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이혼경력, 고령 등의 감점 요인에 대한 얘기도 쑥 들어갔다.

조직을 활용하는 선거운동 역시 트럼프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트럼프는 당 조직을 활용해 이삭 줍기 하듯 표를 긁어모으는 방식 대신 혼자서 쇼를 하듯 바람을 일으켜 당선됐다. 사업가 출신의 블룸버그 역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쓰고 있다. 일단 내년 초 각 주별로 시작되는 민주당 경선 중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등 4개 경선을 건너뛰기로 했다고 한다.

미국 대선은 민주·공화 양당이 주별로 자신들의 후보를 뽑는 경선을 치르는 데서 시작한다. 주별로 일정이 다른데, 내년 2월 초에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주가 가장 먼저 경선을 치른다. 첫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워낙 커서 후보들은 이들 지역에 오랫동안 공을 들인다. 거기서 승리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늦게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블룸버그는 이 과정을 생략하고 20여개주가 경선을 치르는 3월을 겨냥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은 블룸버그의 재력 덕분이다. 민주당 경선에 나왔던 많은 후보들이 이미 중도포기했다. 유권자 지지와 지원을 끌어낼 만한 콘텐츠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고, 이에 따라 후원금이 급격히 줄어 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최근 워싱턴포스트 보도를 보면, 블룸버그는 지난 11월 말 선거캠프를 공식 가동하기 시작한 후 TV와 라디오 광고에 기록적인 돈을 살포하고 있다. 그 액수가 민주당 상위권 후보들이 일 년 내내 쏟아부은 액수보다 더 많다고 한다. 덕분에 블룸버그의 지지율이 꿈틀거리고 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미국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첫째가 돈, 둘째가 자금, 셋째가 후원금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럼 가장 돈 많은 후보가 가장 유리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억만장자 로스 페로, 스티브 포브스, 그리고 록펠러 가문의 넬슨 록펠러도 백악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결국 돈은 중요하지만 결정적이진 않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유권자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시대의 고민과 비전을 읽어내는 일이다. 마치 트럼프가 미국 역사의 주인공이었으되 세계화되고 다원화되는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뒤처진 백인들의 마음을 읽었던 것처럼.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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