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 당수인 보리스 존슨 총리(왼쪽) 제러미 코빈 노동당 당수 ⓒphoto 뉴시스
보수당 당수인 보리스 존슨 총리(왼쪽) 제러미 코빈 노동당 당수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12일 총선이 끝난 이틀 뒤 영국 최고의 정론지 더타임스 표지기사 제목은 ‘이제 치유를 시작하자(Let the healing begin)’였다. 2016년 6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이후 3년 반 동안 나라가 갈가리 찢어져서 분리와 분열로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뜻이다. 이번 총선 결과 보리스 존슨 총리의 보수당은 사전 여론조사보다 훨씬 더 많은 하원의석 650석 중 365석을 얻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1983년 마거릿 대처 총리의 재선 시 이룬 397석 승리에 버금갈 만한 결과이다. 그에 반해 노동당은 202석을 얻어 1930년 이후 최악의 대패를 기록했다. 이로써 존슨 총리는 보수당 총선 구호였던 ‘브렉시트 완수(Get Brexit Done)’를 계획대로 2020년 1월 31일까지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총선을 치른 지 2년 만에 꺼내든 조기총선이란 승부수가 보기 좋게 성공하여 존슨 총리는 마거릿 대처 이후 최고 강력한 지도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보수당이 얻은 365석은 하원 과반수 326석보다 무려 39석이나 더 많은 숫자이다. 결국 존슨 총리는 하원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안건을 야당의 방해가 있어도 통과시킬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가 총선 전 항명 의원을 모두 정리하여 보수당은 이견(異見)이 없는 당이 되었으니 존슨 총리 앞에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더군다나 이번에 당선된 보수당 의원 365명 중 109명은 존슨 덕분에 당선된 초선의원이라 당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보수당의 대승과 브렉시트 추진보다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영국 정치가 2019년 12월 12일 총선 전과 후로 갈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요한 사실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이번 총선 결과 영국 정치를 양분하는 보수·노동 양당의 정체성에 변화가 왔다는 점이다. 태생부터 양당은 확실한 목적과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당은 언제나 부유층과 기득권층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당이었다. 그에 맞는 정책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추진해왔다. 그에 반해 노동당은 당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노동자와 서민층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정당으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두 당의 그런 정체성에 큰 혼란이 올 정도로 초유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노동당 텃밭 ‘붉은 장벽’ 무너뜨린 보수당

우선 보수당의 변화 노력이다. 보수당은 이번에 전혀 예상치 않았던 노동자 계급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보수당은 이를 계속 확보하려고 체질 변화에 시동을 걸었다. 기존의 부유층과 기득권층 정당을 벗어나 서민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바뀌려는 노력을 이번 총선을 계기로 시작한 것이다. 보수당은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노동당의 텃밭이어서 ‘붉은 장벽(Red Wall)’이라 불리던 영국 중부와 동북부 지역 27개 선거구에서 승리했다. 이들 지역구는 1920년 이후 한번도 보수당에 의석을 내준 적이 없던 곳이다. 아직도 보수당의 정신적 지주인 대처 전 총리의 노동조합 탄압, 석탄 탄광 폐쇄, 국영기업 민영화 등으로 직장을 잃고 고통을 겪은 당사자들이 주민들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노동당을 버리고 원수 같은 보수당에 표를 던졌다는 뜻이다. 대처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마녀가 지옥으로 갔다’고 길거리 파티를 벌이던 사람들이 말이다.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일이 벌어진 셈이다. 보수당으로서는 정말 놀랍고 기쁜 일이어서 이런 곳들을 자신들의 텃밭으로 계속 삼기 위한 노력을 바로 시작했다.

그래서 존슨 총리는 총선 대승 결과가 나온 바로 다음 날인 12월 14일 2기 첫 공식 일정을 영국 중북부 세지필드 선거구 방문으로 잡았다. 세지필드는 바로 노동당의 세 차례 총선 승리를 만들어낸 노동당의 영원한 영웅 토니 블레어 전 총리 지역구였다. 불과 2년 전인 2017년 총선에서는 2만2202표(53.4%) 대 1만6143표(38.8%)로 노동당 의원이 당선된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노동당 1만5096표(36.3%), 보수당 1만9609표(47.2%)로 바뀌었다. 비율로는 노동당이 무려 17.1%를 잃고 보수당은 8.4%를 얻었다. 이번에 당선된 보수당 의원은 정치 경험이 전무한 은퇴한 회계사 출신이다. 실제 본인이나 보수당도 당선이 되리라는 기대 없이 단순히 후보를 낸다는 의미의 ‘종이 후보(paper candidate)’로 입후보했다. 그런데 브렉시트 바람과 함께 불기 시작한 반노동당 정서로 인해 84년 만에 처음으로 덜컥 당선이 되었다. 사실 다른 노동당 텃밭에서 당선된 보수당 후보도 모두 이런 식이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사실 이런 일은 토니 블레어가 418석으로 대승을 하던 1997년 총선 때와 같은 현상이다.

존슨 총리는 세지필드를 보수당 승리의 상징으로 여기면서 블레어 전 총리 지역구에 쳐들어가 승리의 샴페인을 들었다. 세지필드를 제일 먼저 찾은 또 다른 이유는 무너진 붉은 장벽 안에 승리의 깃발을 확실하게 꽂은 후 다음 총선까지 승기를 이어가자는 뜻이다. 이것은 그냥 말로만 하는 다짐이 아니다. 낙후된 영국 북부 지방의 도로와 교량 등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확실하게 해서 북부인들이 변화를 느끼게 하겠다는 확약을 총선 바로 다음 날부터 쏟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총선 공약인 병원 40개 신설, 간호사 5만명, 경찰관 2만명 증원을 다시 약속했다. 존슨은 세지필드 크리켓 클럽에서 행한 총선 승리 후 첫 연설(maiden speech)에서 “당신들이 펜을 투표용지 위에 들고 어디를 찍을지 망설이다가 세기에 걸친 투표 성향을 버리고 우리 당과 나를 믿어준 것을 절대 잊지 않겠다. 당신들이 보여준 신뢰를 우리가 갚겠다는 걸 동북부 지방 유권자들이 알아주기 바란다”고 했다.

존슨의 보수당 개조 선언

그리고는 바로 보수당을 개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가디언의 논객이 ‘보통 이런 당 개조 이야기는 패배한 당에서 나오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승리한 당이 먼저 하고 있어서 존슨의 각오가 대단함을 느낀다’라고 쓸 정도다. 거기에 더해 존슨은 행정부 개혁 각오도 총선 승리 첫 각료 모임에서 꺼냈다. 존슨은 그동안 ‘화이트홀(Whitehall)’이란 통칭으로 불리는 행정부 관료들을 향해 이렇게 폭탄선언을 했다. “한번도 해고당해 보지 않았고 부서도 통폐합당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새 시대에 맞게 화이트홀을 바꾸려고 한다. 해고가 가능하게 하고 민간 전문가 등 새로운 인재를 외부에서 채용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부서는 통폐합하겠다.” 당과 의회를 완전하게 장악했으니 이제 행정부마저 손아귀에 넣겠다는 각오이다.

거기다가 존슨은 평소에 손을 보았으면 하는 상대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존슨은 평소 진보 성향의 보도를 하는 공영방송 BBC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과거 대처 정권부터 보수당은 BBC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런데 존슨은 이번에 맘을 먹고 ‘시청료 체납을 BBC가 형사범으로 취급하지 않게 법을 개정하겠다’고 총선 후 선언했다. BBC의 제일 큰 힘인 시청료에 손을 대서 힘을 빼고 국민들로부터도 환영받겠다는 것이다.

존슨은 첫 내각회의에서 자신은 물론 각료들까지 1월 21일부터 열리는 스위스 다보스포럼 참석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에 대해 더타임스는 ‘권력을 다시 잡게 밀어준 전 노동당 지지자들에게 목례하는 의미(in a nod to the former Labour voters who propelled him to office)’라는 표현을 썼다. 자본가들과 기득권층의 모임부터 멀리하겠다는 각오를 존슨이 다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존슨 총리의 이런 시도는 성공할 수도 있다. 우선 존슨 총리는 기존의 보수당 지도자들과는 너무 다르다. 두 번이나 이혼한 후 현재는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애인과 총리관저에서 사는 것도 영국 총리로서는 처음인 데다 혼외자식까지 두고 있다. 초보기자 시절 허위 기사를 써서 더타임스에서 해고된 그는 그동안 허튼 농담과 거의 개그 수준의 엉뚱한 행동, 시정잡배 같은 말투, 헝클어진 헤어스타일 등으로 일반 영국인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서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의 이런 모습은 앞으로 좀 더 진지한 쪽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그는 이번 보수당 승리가 거의 확실해질 때쯤 자신의 지역구에 나타나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보지 못한 진지한 표정을 지은 당선 소감도 생경했고 총선 승리에 대한 억제된 연설도 전혀 존슨답지 않았다는 평도 나왔다. 정상의 자리까지는 광대짓으로 올랐으니 이제는 진지하게 일을 하겠다는 뜻 같다는 평도 나왔다.

이번 총선 승리 후 보수당은 노동당 지지표를 계속 묶어놓기 위해 몸을 낮추고 전통적인 부자당, 상류층당, 기득권당, 지배층당이 아닌 인민들의 당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시작했다. 뜻밖에 노동자층의 지지를 받은 결과 ‘의도치 않게 중도(Accidental Centrist)’ 당이 되어 집토끼와 산토끼를 다 잡으려는 ‘행복한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셈이다.

노동당의 우울한 정체성 혼란

거기에 비해 노동당은 ‘우울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노동자와 서민의 당이라고 자부하고 그렇게 믿어왔는데 총선 결과 노동자들이 노동당을 자신들의 당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텃밭이었던 영국 중부와 동북부 27개 선거구가 보수당으로 넘어가 노동당은 거의 괴멸 상태에 빠져 있다. 제러미 코빈 당수가 “노동당을 비판만 했던 언론과 이번 총선을 완전히 장악한 브렉시트 때문에 졌다”고 외부 핑계를 댔다가 노동당 내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언론으로부터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무지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코빈은 총선에서 패배하면 바로 사임하는 과거의 전통과 달리 후임 당수 선출까지 마쳐놓고 사임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그가 사임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과 같은 극좌 성향 당수를 뽑아놓고 물러나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시각이 노동당 내에서도 많다. 블레어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던 노동당 중진 중 한 명은 자신들의 패배 이유를 이렇게 분석하기도 했다. “영국은 기본적으로 보수 성향의 국가이다. 1900년 노동당이 창당되어 기존의 양당 제도의 한 축이던 자유당을 대신해 보수당과 정권을 주고받았지만 결코 균등하게 시계추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한 건 아니었다. 보수당이 정말 못하면 가끔 한 번씩 국민들이 정권을 노동당에 주었다가 다시 보수당에 돌려주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유일하게 블레어 전 총리 때 처음으로 연달아 3번 집권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노동당이 왼쪽 끝이 아닌 중원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빈이 다시 당을 거의 왼쪽 끝으로 끌고 가 총선 전에 이미 유권자들의 신임을 잃었다. 브렉시트로부터 시작해서 브렉시트로 끝나는 이번 총선에서 어정쩡한 브렉시트 정책으로 전통의 지지자를 보수당 쪽으로 밀어버렸다.”

보수당은 좋은 쪽으로 정체성을 바꾸려고 하고 있지만 노동당은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하고 있다는 것이 언론의 평이다. 지금까지 노동당의 텃밭은 이번에 대거 낙선한 영국 중부·동북부 지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였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번에 7석에서 1석으로 거의 전멸하다시피했다. 1997년 블레어 정부 때는 스코틀랜드 의석 72석 중 56석이 노동당이었을 정도로 스코틀랜드는 노동당 영토였다. 그런데 노동당은 이제 스코틀랜드에서도, 영국 중부·동북부에서도 힘을 잃어버렸다. 결국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만 선전했다. 결국 노동자의 당이 아니라 도시 지식인 중산층의 당이 되고 말았다.

노동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블레어 때는 중도 성향의 중산층을 끌어들이면 됐는데 이제는 중산층에 노동자를 끌어들여야 할 반대 상황으로 바뀌었다. “영국 노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경영자가 아니라 보수당”이라는 말이 있는데 일단 보수당에 투표한 노동자들을 다시 끌어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당은 2017년 총선과 2019년 총선 사이에 지지자 250만명을 잃었다. 그런데도 총선 대패의 원인을 놓고 서로를 비난하면서 내부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거기다가 코빈 당수 친위부대인 당내 극좌 단체 '모맨튬'이란 홍위병이 당을 장악하고 있어 중도파 의견이 당 정책에 반영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현재 노동당은 좌로 너무 많이 가 있고 중앙으로 오려는 시도도 없고 그럴 가능성이 없다.

사실 노동당 지지도는 브렉시트 탈퇴 지역에서만 빠진 것이 아니다. 잔류 지역에서도 거의 같은 비율로 지지도가 빠졌다. 그 이유를 언론의 분석가들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코빈의 비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대처 정부 때 민영화된 철도·전기·가스 같은 대형 공공서비스 기업의 재국유화 정책과 전국에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한다는 식의 선심 공약에 유권자들이 동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행이 지난 비현실적인 정강정책보다 훨씬 스마트해진 유권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이번 영국 총선의 가장 큰 의문은 왜 야당들이 총선에 찬성했느냐다. 여론조사가 분명 보수당의 대승을 전망하고 있었는데 전략 면에서 야당들이 조기총선에 합의해줄 이유가 없었다. 영국 조기총선은 의회의 3분의 2 찬성을 얻어야 한다. 과반수도 안 되는 보수당은 야당의 찬성 없이는 조기총선을 도저히 시작할 수가 없었다. 노동당이 2017년 총선 때처럼 여론조사와는 다른 결과를 예상하고 조기총선에 응했을 것이라는 사후 분석도 상당히 있다. 무턱대고 이길 거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조기총선에 동의했다는 의미다. 실제 총선을 합의하는 시점에서 코빈과 홍위병들은 “보수당이 만들어놓은 혼란을 끝낼 일생일대의 기회다.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가 한번도 보지 못한 변화를 일으킬 야심에 차고 과격한 선거운동을 시작한다”라고까지 했다. 정말 그들은 그렇게 될 거라고 믿은 모양이다.

자민당은 더하다. 전임 당수 빈스 케이블을 비롯해 중진들이 신임 당수 조 스윈슨에게 조기총선에 찬성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스윈슨은 찬성했다. 야당으로서는 선거를 미루다가 2020년 봄쯤에 했으면 훨씬 더 유리할 뻔했다. 더군다나 총선이 치러진 12월 12일은 이미 학생들이 방학을 하는 시점이라 야당 지지 혹은 잔류파 젊은이들의 투표 참여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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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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