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에 축소 복원된 데지마. ⓒphoto 이승연
나가사키에 축소 복원된 데지마. ⓒphoto 이승연

15세기 말부터 한 세기 이상 유라시아 대륙 남부의 바다를 지배한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양의 상업 질서를 무력으로 깨뜨리면서 시작된 포르투갈의 이 지역에서의 우위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설립한 동인도회사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우월한 군사력으로 아프리카와 인도 연안을 장악한 포르투갈은, 동남아시아·중국·일본과의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동남아시아의 상업 거점이었던 말라카왕국을 1511년에 정복했다. 이 사건 뒤에 누군가 이렇게 기록했다. “누구든지 말라카를 지배하는 자가 베네치아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R. A. 스켈톤 ‘탐험지도의 역사’, 새날, 204쪽에서 재인용) 이 말은 유럽과 유럽 바깥의 세계를 잇는 주요한 바다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인도양으로 넘어왔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포르투갈 세력은 중국의 비단·도자기·생사(生絲) 및 일본의 은(銀)을 노리고 동중국해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전해진 새로운 은 제련법 덕분에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기존에 유럽의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지탱하던 남부 독일의 은이 바닥난 상황에서, 오늘날의 볼리비아에 있는 포토시(Potosi) 은광과 일본의 이와미(岩見) 은광에서 채굴되는 은은 17세기 초에 각기 세계 은 생산의 절반과 1/3~1/4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다.(야마구치 게이지 ‘일본 근세의 쇄국과 개국’, 혜안, 30~33쪽, 참고로 이들 두 지역의 은광 채굴 유적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지역의 은으로 중국의 물산을 구입하면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포르투갈 세력은, 아프리카·인도·동남아시아 연안에서 그러했듯이 동중국해에서도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무역을 독점하려 했다. 그러나 16세기 당시 중국과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포르투갈의 무력 시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이들은 전략을 바꾸어 중국의 중앙정부에 대해 공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오늘날의 광동(廣東) 마카오(澳門)에 상업 거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후일 포르투갈이 네덜란드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 의해 동중국해에서 밀려나고 중국의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바뀐 뒤에도, 광동을 유일한 거점으로 하여 중국-일본-동남아시아를 잇는 서양 국가들의 무역 체제는 유지되었다. 1841~1842년의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서양 국가들의 중국 무역이 사실상 자유화될 때까지 유지된 이 무역 시스템을 광동 시스템(Canton System)이라고 한다. ‘중국 광동 무역의 흥망’( ‘MIT Visualizing Cultures: Rise & Fall of the Canton Trade System’·http://ocw.mit.edu/ans7870/21f/21f.027/rise_fall_canton_01/index.html)에는 이 시기 광동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각자료가 다수 공개되어 있다. 박연(朴淵·Jan Jansz Weltevree)이나 하멜(Hendrick Hamel)과 같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이 한반도에 표류한 것 역시, 동중국해에서 이러한 세계 경제 시스템이 작동하던 가운데 생긴 불상사였다.

광동 시스템은 조선왕조가 한반도 남부의 왜관(倭館)에서만 일본인의 거주와 상업 활동을 허가한 것과 근본적으로 마찬가지 철학에서 비롯된 무역 방식이었다. 예수회를 앞세워 대일본 무역에 집중하던 포르투갈이 밀려나고,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기독교 포교 금지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네덜란드가 17세기 중엽에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라는 인공섬에 상관(商館) 개설을 허가받은 것도 이와 상통하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17~19세기 사이에 동중국해에서는 조선·청·일본이 각기 왜관·광동·나가사키라는 해외 무역 거점을 설치하여 해외와 교통하고 있었으며, 이들 무역 거점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조선·청·일본 등의 유라시아 동부 국가들에 있었다.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에서 학살을 자행하며 무역 이익을 추구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동중국해에서는 막대한 상업적 이익을 얻기 위해 이 지역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들의 방침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하네다 마사시 ‘동인도회사와 아시아의 바다’, 선인, 130쪽) 중국과 일본이 각기 광동과 나가사키라는 거점을 통해 풍부한 물산과 은을 거래하면서 세계 경제 시스템에 편입되어 가던 때, 조선이 양적·질적으로 어느 정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었는지의 문제도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광주여자대학교의 정성일 선생 등 여러 연구자가 이 거대한 문제를 추적해 온 바 있고, 최근에는 성균관대학교 안대회 선생이 온라인상으로 ‘담바고의 문화사’를 연재하면서 담배의 국제적 맥락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하는 등 관련 연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반도와 세계 경제 시스템의 관계가 이 정도로 그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거대한 저류(底流)가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 필자는 여전히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다.

이 연재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16~17세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는 포르투갈·스페인 등의 가톨릭 세력과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종교적·경제적 문제로 충돌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네덜란드는 명나라에 접근했다가는 교섭에 실패하여 대만에 근거지를 구축했고, 일본열도의 정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바뀌자 신정권에 접근하여 히라도(平戶)에 상관 개설을 허가받았다. 원래 네덜란드는 일본의 은과 중국의 생사를 대만의 거점에서 동남아시아로 보내는 무역 시스템을 구축했던 것인데, 1626년에 대만의 네덜란드 항구 이용 문제를 두고 일본의 하마다 야효에(浜田彌兵衛)라는 선장이 네덜란드 상관을 습격하고, 1662년에 정성공이 대만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서 네덜란드는 동중국해의 중요한 거점인 대만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불리한 상황에 처하여 네덜란드는 하마다 야효에 사건에 대해 도쿠가와 막부에 사죄하고, 1637년에 일본 규슈 시마바라(島原)에서 일어난 가톨릭교도 농민들의 봉기 때에도 막부를 도와 가톨릭교도 반군이 농성한 성에 포격을 하는 등의 액션을 취하여 막부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측에 대해 잇달아 일방적인 요구를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히라도에 있던 상관을 데지마라는 좁은 인공섬으로 옮기고 섬 밖으로 나가지 말라거나, 데지마 안에서 종교 의례를 하지 말라거나, 대포 및 병사를 포함한 일체의 무장을 하면 안 된다는 등이 그것이었다. 인도양에서 무자비한 실력행사로 무역 거점을 구축해 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지만, 일본에서는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고자 공손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데지마로 한정된 것이었기는 하지만 유럽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네덜란드만이 일본과의 무역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도쿠가와 막부 측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부과한 의무 가운데에는, 일본어로 ‘카피탄(カピタン)’이라고 부르는 데지마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장(VOC-opperhoofden in Japan)이 한 해에 한 번씩 막부가 위치한 에도(江戶)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상관장이 제공하는 ‘풍설서(風說書)’라 불리는 해외 정보를 통해 막부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이 연재의 후반에 다시 언급될 터이지만, 상관장이 제공한 정보 가운데에는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Matthew Calbraith Perry)이 일본에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준 1852년의 풍설서가 특히 유명하다.

1818년에 간행된 쓰루미네 시게노부(鶴峯戊申)의 ‘묵색소전(墨色小筌)’. 일본어 발음을 히라가나, 가타카나, 알파벳, 한글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막부가 성립할 당시에는 알파벳이 적혀있다는 이유만으로 책이 판금되고 그 책의 저자가 처벌받는 일이 빈번했지만, 난학 붐이 한창이던 19세기 초기에는 세상이 이처럼 바뀌었다. 이러한 느슨한 분위기는 서양 열강의 압박이 심해지는 19세기 중기 이후에는 다시 일변한다. ⓒ김시덕 소장
1818년에 간행된 쓰루미네 시게노부(鶴峯戊申)의 ‘묵색소전(墨色小筌)’. 일본어 발음을 히라가나, 가타카나, 알파벳, 한글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막부가 성립할 당시에는 알파벳이 적혀있다는 이유만으로 책이 판금되고 그 책의 저자가 처벌받는 일이 빈번했지만, 난학 붐이 한창이던 19세기 초기에는 세상이 이처럼 바뀌었다. 이러한 느슨한 분위기는 서양 열강의 압박이 심해지는 19세기 중기 이후에는 다시 일변한다. ⓒ김시덕 소장

또한 상관장 일행이 에도에 도착하면 당대 일본의 호기심 많은 지식인들이 이들의 숙소로 찾아와 유럽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상례였다. 도쿠가와 일본이 열렬히 배우고자 한 서양의 지식은 대략 19세기를 전후로 하여 크게 둘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는데, 앞 시기는 의학 특히 해부학이었고, 뒤 시기는 군사학 특히 배와 대포에 관한 지식이었다. 포르투갈 세력이 일본과 교섭하던 16세기에는 이미 유럽의 의학 지식이 전해져 있어서, 일본과 교섭하는 서양 세력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바뀐 뒤에도 ‘남만류(南蠻流)’라 불리는 의사들이 활동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가 전해주는 근대 서양의학을 받아들일 준비는 이미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인 의사들과 접촉할 기회가 잦았던 모토키 료이(本木良意), 나라바야시 진잔(楢林鎭山)과 같은 일본인 통역관들이 17세기 후기부터 네덜란드어 해부학·외과 서적을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한편, 실험을 중시하는 한의학 유파인 고방파(古方派) 의사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는 15년간의 고뇌 끝에 1754년에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고 그 결과를 ‘장지(藏志)’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일본 최초의 해부학서라 할 이 책에서 야마와키 도요는 자신이 해부한 시체의 내부가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유럽 해부학서와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적는다. “논리는 때로 뒤집힐 수 있지만 실물에 어찌 거짓이 있겠는가? 논리를 앞세우고 실물을 무시하면 아무리 큰 지혜라도 잃는 수가 있고, 실물을 실험한 뒤에 논리를 만들면 범용한 사람이라도 뜻을 펼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성인인 요(堯)도, 고대 중국의 폭군인 걸(桀)도, 오랑캐도 그 장(藏)은 모두 똑같다. 소나무는 자연히 소나무고 측백나무는 자연히 측백나무며 나는 것은 날고 달리는 것은 달리니, 그 도리는 천고에 변함이 없고 외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스기모토 쓰토무 ‘서양문화 시작 십강’, スリ- エ- ネットワ- ク, 189~218쪽) 즉 옛날 사람이든 지금 사람이든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유럽인이든 물질적인 신체 구조는 똑같으며, 이러한 물질적인 증거에 바탕하지 않은 논리는 헛되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이 생각이 1754년에 네덜란드라는 창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처음으로 생겨났다.

이와 같은 기운에 힘입어 드디어 도쿠가와 막부의 거점인 에도에서도 유럽 의학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게이오대학의 창시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난학사시(蘭學事始)’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여 유명해진 ‘난동사시(蘭東事始)’라는 책은 바로 이 시기 에도에서 ‘네덜란드학’, 즉 ‘난학(蘭學)’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증언하고 있다. 적잖이 과장벽 있는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라는 사람이 노년에 집필한 이 책에 대해서는, 그 후의 연구를 통해 스기타가 과장한 부분과 오류가 꼼꼼하게 확인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을 무조건 믿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절한 과장과 피끓는 문장으로 기록된 ‘난동사시’는 일종의 ‘일본 난학 창세기’로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을 감동케 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난동사시’에 등장하는 난의(蘭醫) 고이시 겐(小石元俊)의 후손 집안에 전해지는 필사본을 저본으로 한 ‘일본 고전문학 대계’ 수록본을 따라 읽으면서 필자가 코멘트를 하는 것으로 연재 이번 회를 마치고자 한다. 인용문 뒤의 숫자는 ‘일본 고전문학 대계’ 수록 페이지를 뜻한다. 참고로 ‘난학사시’는 최근에 한국어 번역본이 나오기도 했다.

책의 첫머리에서 스기타 겐파쿠는, 일본에서 중국 학문(漢學)은 국가 사절단이나 영민한 승려들이 중국에서 배워 와 차츰 유행하게 된 데 반해, 난학이 순식간에 붐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묻고는 “의사의 일은 그 가르침이 모두 실제에 근거하는 것을 앞세우기 때문에 순식간에 이해가 되기(夫醫家の事は其敎かた総 て實に就くを以て先とする事故, 却て領會する事速かなる, 473쪽)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그 후 위에서 소개한 16세기 이래 포르투갈에서 일본에 전래된 ‘남만류’ 의학의 여러 유파를 소개하고 나서, 네덜란드어 의학서가 전래되자 그 세밀한 해부도가 당시 일본 의사들의 이목을 끌었음을 증언한다. 그렇게 유럽의 의학에 대한 관심이 일본에서 높아지던 중, 훗날 일본에 난학의 기틀을 세우는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어릴 때 고아가 된 그를 길러준 큰 아버지 미야타 젠타쿠(宮田全澤)라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은 교육 방침으로 료타쿠를 지도했다고 한다. 그 방침이란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쇠할 것 같은 예능을 배워 둬서 후세에 그 예능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당대 사람들이 외면해서 아무도 하지 않는 그런 일을 해서 세상을 위해 훗날까지 그 일이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人と云者は, 世に廢れんと思ふ藝能は習置て, 末タ までも不絶樣にし, 當時人のすてはてて, せぬことになりしをば, これを爲して, 世のために, 後にも其事の殘る樣にすべし, 479쪽)는 것이었다. 과연 마에노 료타쿠는 큰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위해 큰일을 했다 하겠다.

한편 저자인 스기타 겐파쿠는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이라는 의사가 네덜란드인에게서 입수한 해부학 서적을 보고는, 그 내용은 한 글자도 모르지만 하여간 그 책에 실린 해부도에 한눈에 반한다. 자기가 일하던 번(藩)의 책임자에게 이 책의 구입에 대해 상담하니, 책임자는 “그 책은 사둘 만한 것인가? 쓸모가 있다면 번주(藩主)님께 필요한 금액을 받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스기타가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확언은 못하겠지만, 반드시 쓸모있는 것으로 삼아 보이겠습니다”라고 답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스기타님은 이 책을 헛되이 할 사람이 아닙니다”(이상, 487쪽)라고 거들었기에 무사히 책을 입수하게 되었다. 이때 스기타가 입수한 책은 독일인 의사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의 저서 ‘해부학 도표(Anatomische Tabellen)’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 이 책을 중심으로 하여 번역 출판된 것이 일본 최초의 본격적 해부학서 ‘해체신서(解體新書)’이다. 쿨무스의 책은 실제로는 해부학자를 대상으로 한 전문서가 아니라 일반 독자를 위한 계몽서였기 때문에 이 책을 가지고 실제로 외과 수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지만(타이먼 스크리치 ‘에도의 몸을 열다’, 그린비, 174쪽), 그래도 당시까지 일본에서 유통되던 서적 가운데에는 가장 상세한 축에 속했다.

책을 입수했으니 번역을 하면 ‘큰 국익이 될 터’(大ひなる國益とも成べし, 488쪽)라며 고민하던 그는 일본 최초의 해부서인 야마와키 도요의 ‘장지’에서 자극을 받기도 해서, 유럽의 해부도를 입수했으니 실물과 대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막부의 허가를 받아 사형수의 몸을 해부해 보니, 과연 인간의 몸은 한의학서의 설명과는 다르고 유럽 해부학서의 도판과 같았다는 것이다. 중국책과 유럽책에 그려진 인체구조가 이렇게 다르니, 언젠가 읽은 책에서 저자가 ‘중국인과 중국인 아닌 사람 간에는 (몸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華夷人物違ありや, 491쪽)라고 고민한 것도 이해가 가는 바였다. 이리하여 자신이 가진 유럽 해부학서가 사실에 합치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스기타는, 뜻 맞는 사람들을 모아 네덜란드어판 쿨무스의 해부학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모인 사람들은 네덜란드어 통역관도 아니고, 당시까지 네덜란드어 사전이 일본에서 출판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번역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고 스기타는 회상한다. 예를 들어 ‘눈썹은 눈 위에 난 털이다(雙眉, 毛斜生者也)’라는 한 문장을 번역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식이었다는 것이다.(493쪽) 다만, ‘눈썹 운운’하는 스기타의 말에 해당하는 정확한 문장은 실제로는 쿨무스의 해부학서 네덜란드어판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이 대목이 스기타의 자신들의 고생을 과장하기 위한 창작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해서 ‘난동사시’와 근세 일본의 난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눈썹 운운’ 하는 고생담을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스기타는 자기 그룹이 쿨무스의 해부학서를 ‘해체신서’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하면서 에도에 난학 붐이 불었다고 주장하고는, 그룹 멤버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개성을 보인 사람은 앞서 소개한 마에노 료타쿠였다고 한다. 고아가 된 뒤에 큰아버지의 독특한 교육관에 입각하여 자라난 마에노는, 네덜란드어로 된 책을 모두 읽고 싶다는 뜻을 품은 뒤로 사람들과의 교유를 끊고 공부에 전념했다. 원래는 번(藩)에서 부여받은 의사로서의 업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가신(家臣)으로서의 의무일 터이나, 마에노의 주군인 오쿠다이라 마사카(奧平昌鹿)는 “그는 원래 특이한 사람이야(彼は元來異人なり)”라며 크게 혼내지 않았다. 마에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비방해도, “매일 의업(醫業)에 전념하는 것도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이고, 그 업을 위한 일을 하여 마침내 천하 후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자 하려는 것도 분명히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이다. 그는 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것 같으니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어라(日日の治業を勤るもつとめなり. 又, 其業のためをなし, 終には天下後世生民の有益たる事を爲さんとするも, 取も直さず, 其業を勤るなり. 彼は欲する所ありと見ゆれば, 其好む所に任せ置べし)”라며, 마에노가 하고 싶은 네덜란드어 공부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세상 어디에나 자신이 뜻하는 바를 하려는 사람을 비방하고 방해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사회질서를 일탈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 ‘괴짜’를 내버려둘 수 있는 아량을 지닌 사람은 늘 있는 법이 아닌 것 같다. 마에노는 훗날 자신의 호를 ‘난화(蘭化)’라고 하였으니, 이는 주군이 늘상 자신을 가리켜 “마에노는 네덜란드인이 둔갑한 사람이다”(良澤は阿蘭陀人の化物なり, 498~499쪽)라고 농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유학이나 불교와 달리 난학이 순식간에 일본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난동사시’의 저자 스기타 겐파쿠의 결론이리라.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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