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민 마을의 굴피집. 지붕을 이으려면 참나무 수십 그루의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photo 뉴시스
화전민 마을의 굴피집. 지붕을 이으려면 참나무 수십 그루의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photo 뉴시스

인적 없는 깊은 산골이나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자연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영상에 비친 자연인의 거칠고 위험하고 비위생적인 삶에서 묘한 여유와 힐링의 가능성을 찾는 ‘도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어느 종합편성채널이 2012년에 시작한 프로그램이 이제는 지상파까지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현대문명을 외면한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생활방식을 엉뚱하게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잊혀버린 약탈적 화전의 기억

언론에 소개되는 자연인의 삶은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EBS에 소개된 ‘마지막 화전민’도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자연 속에서의 소박하고 정직한 삶을 향유(享有)하는 모습으로 이해했다면 온전한 착각이다.

진실은 정반대다. 정부의 이주 보상금을 어쭙잖게 거부했던 젊은 시절의 객기가 남긴 깊은 회한(悔恨)이 진짜 핵심일 수 있다.

이제는 변변한 공부도 시켜주지 못했던 자식들과 함께 살 염치도 없어졌지만, 삭풍이 부는 겨울에는 ‘시내’에 사는 자식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인의 당혹스러운 현실일지 모른다.

자연인의 삶이 자연친화적이라는 인식도 황당한 착각이다. 굴피집의 지붕을 이으려면 참나무 수십 그루의 껍질을 벗겨내야만 한다.

물론 껍질을 벗겨내 생명력을 잃어버린 참나무는 아궁이의 땔감으로나 써야 한다. 굴피의 수명이 긴 것도 아니다. 자연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도시인에게 밀려난 멧돼지·고라니·토끼도 잡아먹어야 한다. 플라스틱·합성섬유·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자연인도 생각보다 훨씬 많다.

자연인의 거칠고 힘겨운 삶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화전민(火田民)’이 바로 자연인의 원조다.

가장 원시적인 약탈(掠奪) 농법이었던 화전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어져버린 사회적 약자들에게 허락된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자연과의 조화나 풍요와는 거리가 먼 자연 파괴적이고 고단한 생활방식이었다.

실제로 화전의 역사는 매우 길다. 1만2000년 전 정착 생활에 필요한 농경 기술을 습득한 인류가 처음 선택한 생활방식이 바로 화전이었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곳의 나무와 풀을 불태워서 경작지를 마련했다. 신라 진흥왕 때의 기록에도 화전이 등장한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대거 화전민으로 전락해버렸다.

지금도 산업화가 뒤처진 아프리카·동남아시아·남미에서는 화전이 성행하고 있다.

비탈지고 척박한 화전에서 경작할 수 있는 작물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좁쌀·메밀·기장·콩·보리·옥수수·육도(陸稻)와 같은 잡곡이 고작이다. 거름을 넉넉하게 줄 수 없었던 화전에서는 넉넉한 추수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몇 년 동안의 농사로 지력(地力)이 고갈되면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 화전을 일궈야만 했다.

화전의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정부 차원에서의 관리도 불가능했고, 조세·병역·교육의 의무도 부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의 훼손이 매우 심각했다.

실제로 화전은 민둥산이 불러일으키는 홍수와 산사태 예방 등을 위해 절박하게 필요했던 ‘산림녹화’의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었다.

결국 정부가 1966년부터 강력한 ‘화전 정리에 관한 법률’을 시행했다. 국토의 ‘황폐화’를 방지하고, ‘산림자원’을 조성하고, 화전민의 ‘생활안정’을 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전국에는 무려 42만명의 화전민이 4만㏊의 화전에 의존해서 궁핍하고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부의 화전민 정착 사업은 1976년에 마무리되었고, 화전정리법은 1999년에 폐지되었다. 때마침 시작된 산업화의 물결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화전을 정리해버린 일을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정부의 강력한 화전정리 사업은 세계가 놀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2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우리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로 평가했고, 2008년 유엔환경계획(UNEP)도 한국의 조림사업을 높이 평가했다.

허무맹랑한 자연인 광풍(狂風)이 혹시라도 애써 가꿔놓은 숲을 망가뜨리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안 그래도 정부의 무분별한 탈원전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숲의 사회적 가치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숲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지구온난화를 막아주는 유일한 대안이다.

경제 발전과 함께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숲은 우리 모두에게 쾌적하고 안락한 휴식의 공간을 제공해주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지키고 가꿔야 할 소중한 숲을 소수 자연인들의 개인적인 호사(豪奢)를 위해 함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곡된 자연과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은 말처럼 간단치 않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77억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런데 한 세기 전인 1927년의 세계 인구는 20억명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의 우리나라 인구는 1600만명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인구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질도 향상되었다. 도시와 공장도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식량 생산을 위한 농지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휴식을 위한 공간도 필요하고, 야생동물이 살아갈 ‘자연’도 마련해줘야 한다. 지구상에서 자연인을 위해 남겨줄 수 있는 공간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는 뜻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自然)’이 우리에게 결코 만만한 곳도 아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野生)’의 진짜 모습은 우리의 환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실제로 자연인이 극복해야 할 야생은 맹수와 해충이 우글거리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거칠고 위험한 곳이다. TV 프로그램이 의도적으로 시청자들에게 감추고 싶어 하는 숨겨진 모습이기도 하다.

도시인이 무턱대고 가방 싸서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자연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시생활의 많은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고, 건강과 상당한 체력도 갖춰야 한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독초(毒草)와 해충(害蟲)을 분별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훨씬 낫다는 말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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