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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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규(51) 경기 시흥 강남병원장은 출퇴근시간이 여느 직장인보다 좀 바쁘다. 야생화 때문이다. 그는 보도블록·낡은 건물 계단·도로 옆 경사로 따위에 무심히 피어 있는 ‘도시 야생화’에 시선이 머물 때면 꼭 걸음을 멈추고 휴대용 디지털 카메라를 꺼낸다. 며칠 전에도 집 앞 길가 콘크리트 틈새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노란색 꽃을 피운 개쑥갓을 한참 웅크리고 앉아 바라봤다.

그가 처음 야생화에 관심 갖기 시작한 건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1995년이었다. “버스에서 우연히 라디오 뉴스를 들었어요. 국내 유일의 종묘전문회사 한농이 적대적 M&A로 대기업(동부그룹)에 넘어가게 됐다는 내용이었죠. 가뜩이나 열악한 국내 종묘산업이 위기에 처했다는 얘길 듣고 꽤나 충격을 받았어요. 한창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유행할 때였거든요. 그후부터 우리 작물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제대 후 병원에 취직한 지 얼마 안됐을 때 그는 출근길에 야생화 한 송이를 발견했다. 많이 보던 꽃인데 이름조차 모르는 자신이 창피했다. 당장 식물도감을 한 권 샀다. 개망초였다. 예쁜 한글이름과 달리 1950년대에 국내에 들어온 귀화식물이었다. 며칠 후 마주친 달맞이꽃 역시 100년 전 멕시코서 유입된 외국 종(種)이었다. ‘진짜 우리 꽃은 뭘까?’ 답답한 맘에 자료를 뒤져가며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토종 꽃이었던 백합·라일락이 외국에 넘어간 후 역수출된 사실도 알게 됐다. 아쉬운 대로 집과 회사, 동네를 중심으로 야생화 발굴에 나섰다. 1998년부턴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12년간 찍은 사진은 2000장을 넘어섰다. 짬이 날 때마다 야사모(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wildplant.kr) 같은 동호회 사이트를 방문해 야생화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야생화에 빠진 후 그에겐 사람들에게 야생화 별명 붙여주는 취미가 생겼다. “유난히 붉고 도톰한 입술을 가진 여직원에겐 ‘며느리밥풀꽃’이란 별명을 지어줬어요. 빨간 꽃잎이 흰 꽃술 두 개를 품은 생김새가 입술모양과 닮아서요. 한번은 말수가 적어 친해지기 어려웠던 직원이 병원 게시판에 올린 제 글에 댓글을 달았는데 굉장히 신중하고 생각이 깊더라고요. 그래서 작지만 기품 있는 꽃 ‘물매화풀’을 별명으로 선물했죠.”

그는 내로라하는 화상치료 전문의다. 화상치료는 비인기 전공인 외과 중에서도 대표적 ‘3D’ 분야다. 엄청난 공력을 요구하는 데다 결과를 확신할 수 없고 큰돈도 못 벌기 때문이다.

시흥 강남병원은 2008년 10월 최 원장을 비롯한 의사 넷이 공동개원했다. 병원은 365일 무휴(無休)다. 원장들은 교대로 24시간 당직근무를 선다. 최 원장의 연간 수술횟수는 300건 내외. 평일 기준 거의 매일 메스를 드는 셈이다.

그는 조만간 이제껏 모은 야생화 사진에 가벼운 글을 더해 포토 에세이 형태의 책을 낼 계획이다. 그가 소개하는 ‘도시 야생화 감상요령’ 한 토막. “민들레 아시죠? 다른 야생화에 비해 좀 까다로운 꽃이에요. 그래서 민들레 주변 5미터만 뒤지면 야생화 10종은 너끈히 찾을 수 있답니다. 작고 볼품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보다 훨씬 강한 그네들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월드컵 기간 동안 마음을 졸였다. “거리응원 때문에 곳곳에 만개한 야생화들이 죄다 꺾일까 봐 마음이 무거웠어요. 야생화는 6월이 절정인데…. 반줌도 안 되는 먼지흙에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우려고 그 작은 생명이 얼마나 애를 썼겠어요. 한번쯤은 이 도시에 우리 말고 그들도 살고 있다는 걸 떠올려줬으면 좋겠어요.”

최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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