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백’의 한 장면
영화 ‘고백’의 한 장면

고백이라는 말만큼 무서운 것도 드물다. 가령 갑자기 내 곁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아내가 “고백할 게 있다”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고백이라는 말은 무거운 비밀을 내포한다. 고백할 내용은 “사실 요리하다 냄비를 태웠어” 정도의 가벼운 생활적 실수는 아니라는 뜻이다. 나카시마 데쓰야(中島哲也) 감독의 ‘고백’ 역시 이 무거움에서 출발한다. 어느 날 여교사 모리구치 유코가 학생들 앞에서 ‘고백’을 한다. 입에 담고, 옮기기조차 무서운 사실,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이다.

‘고백’은 일본 영화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첫째 이유는 작품의 소재가 주는 무거움 때문이었다. ‘고백’은 교실을 배경으로 한다. 얼핏 보면 난장판인 학생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프랑스 영화 ‘클래스’나 ‘죽은 시인의 사회’가 연상된다. ‘클래스’는 걸핏하면 학생의 권리로 교사의 권위를 짓밟는 교실에서 시작된다. 학생들을 존중하는 교사의 태도를 일종의 약점으로 비춘다. 약자로 분류된 교사는 교실 피라미드의 맨 밑에 놓인다. ‘고백’의 교실도 다르지 않다. 담임교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이들은 우유를 던지고 음악을 듣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심지어 교실을 비운다. 교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교사의 말을 귀담아듣는 학생은 한 명도 없어 보인다. 이 영화의 두 번째 논점이 바로 이즈음 등장한다. 담임교사 유코는 자신의 사생활을 고백한다. 자신의 남편은 HIV(에이즈를 유발하는 바이러스) 보균자였고 그래서 아이를 혼자 키울 수밖에 없었다고. 게다가 남편은 일본 교육계의 신화로 떠올랐던 사쿠라야마 선생이다. 아이들은 곧잘 사쿠라야마와 담임을 비교하며 무시했는데 그 사쿠라야마가 담임의 남편이며 게다가 HIV 보균자였다.

이쯤의 고백은 놀라운 것도 아니다. 담임교사 유코는 마지막 사실을 하나 더 고백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딸이 이 학교 수영장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고 그 죽음이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범인은 이 교실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아이들에게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13세 이하인 그들은 소년법의 보호 아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 그 아이들, 소년 A와 소년 B의 우유에 제 남편인 사쿠라야마의 혈액을 주입했습니다. 두 소년은 방금 우유를 다 마셨습니다. 감염 여부는 2~3개월 후에 확인될 것입니다. 그동안 생명의 무거움에 대해서 고민하기 바랍니다.”

영화 시작 후 30분 정도 이어지는 모리구치 유코의 고백은 관객들을 흡수하기에 충분하다. 그 고백은 자기 비밀의 누설이면서 한편으로는 엄청난 범죄의 고발이다. 문제적인 것은 앞서 말한 바처럼 이 사건이 학교에서, 학생들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간혹 일본 신문 지면을 장식했던 소년범들의 이야기가 바로 영화 ‘고백’의 주된 사건인 셈이다.

더 논쟁적인 것은 ‘고백’이 바로 ‘복수’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이다. 어떤 복수일까? 당연히 모리구치 유코 선생이 자신의 딸을 죽인 소년 A와 B에게 복수한다. 논쟁의 이유는 예상하다시피이다. 우선 담임선생님이 제자인 아이들에게 복수를 해도 될까? 아무리 살인을 저질렀다 해도 그들은 아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두 번째 논쟁점도 여기서 멀지 않다. 그래도 유키 선생은 성인인데 아이들을 대상으로, 법이 보호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수해도 될까?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은 관객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소년의 범죄라고 보기엔 소년 A와 B의 살인 행위는 너무도 계획적이며 무자비하다. 그들은 자신의 실험을 성공시키기 위해 더 어리고 약한 대상을 물색한다. 우발적 실수가 아니라 애초부터 그들은 범죄 대상을 고르고 고른다. 약한 아이를 왕따하고 괴롭히듯이 선택의 대상은 나약함에 따라 6살의 미취학 소녀로 정해진다.

두 번째는 대개 소년법이 내 아이의 실수를 감싸는 변명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영화 속 소년 B, 나오키군의 엄마는 범죄 사실을 듣는 내내 “가엾은 것”이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하지만 이 ‘가엾은’의 대상은 세상을 떠난 유코의 딸이 아니라 범죄에 가담하게 된 자신의 아들 ‘나오키’이다. 어쩌다 범죄를 저질렀을까, 살인을 하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라며 자기 아들을 감싸기에 급급하다. 피해자에 대한 배려나 속죄는 이기심 앞에서 사라진다.

세 번째는 소년 A의 잔혹성이 소년의 순수성으로 보호받을 범위 너머에 있다는 점이다. 소년 A 수야는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심지어 자신의 동급생마저 살해한다. 자신을 특별히 우월한 개인으로 여기는 수야는 다른 사람들을 열등한 바보로 여기고 무시한다.

영화가 소년 A와 B를 사이코패스식의 괴물로 몰아가는 데 주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백’은 왜 이 소년들이 사이코패스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간다. 그 추적의 끝에는 역시 기성세대의 잘못이 자리잡고 있다. 소년 A의 범죄 뒤에는 엄마에게서 버림받은 결핍감이 자리잡고 있다. 수야는 엄마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범죄를 계획한다.

소년 A와 B는 담임선생님 유코가 낸 마지막 숙제를 잘못 푼다. 유코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는 숙제를 주었지만 소년 A 수야는 생명이란 가벼운 거야, 라고 비웃고 소년 B는 난 아무 잘못 없어, 라며 책임을 회피한다. 둘 다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반성과 숙고, 속죄에 있으니 말이다.

세상이 잔혹해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의 무서움은 ‘아이들’을 통해 들었을 때 더 실감난다. 우리는 아이들은 순수하다고 여긴다. 착하게 태어나 세상에서 때를 입고 악을 배운다고 여긴다. 하지만 간혹 발생하는 소년들의 범죄는 우리의 기대가 순진한 것은 아닐까 의심케 한다. 세상이 점점 현대화되고 발전할수록 소년들의 범죄도 무서워진다.

교사 유코가 자조적으로 내뱉는 교사들의 실태도 놀랍다. 아이들의 거짓말 앞에 교사의 열정은 속절없이 유린된다. 심지어 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법의 덫에 걸려 엉뚱하게 희생되기도 한다. 자살하겠노라 우는 아이를 구하러 러브호텔에 간 담임선생님은 원조교제 누명을 쓴다. 벌점을 받은 학생의 복수치고는 지나치게 교묘하다.

‘고백’에 그려진 학교는 더 이상 배움의 장이 아니다. 과장도 있겠지만 우리의 학교도 여기서 크게 멀지는 않을 듯싶다. 힘이 약한 아이는 ‘빵 셔틀’로 불리고 학생의 권익은 때로 남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담임선생님, 유코의 복수를 보면서 그다지 통쾌할 수만은 없다. 복수 영화에서 복수가 이뤄졌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일 테다. ‘고백’의 공간이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이다.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2005년 조선·경향·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고려대 국어국문과 박사 졸업,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고려대에서 강의 중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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