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한 장면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한 장면

강풀 원작의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는 노년의 사랑을 그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노인과 사랑이라는 결합이 의당 옳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쉽사리 같은 문장에 놓지는 못했다. 노인이 되면 사랑이라는, 그런 폭풍 같은 감정은 말갛게 가라앉지 않을까? 희부옇게 온통 어지러운 청춘이 지나고 육아와 살림에 혼이 빠지는 중년도 지나고 나면 그렇게, 퇴적층처럼 삶의 흔적을 보이며 조용히 살아가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노인’에게도 사랑이라는 명제보다 먼저 삶이 있다고 말한다.

하기야 맞는 이야기이다. 20살부터 성인이라고 법이 정해주지만 몇 살부터 늙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달라진 신체반응으로 나이를 셈하고 누군가는 은퇴와 같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노년을 목격한다. 하지만 막상 감정이라는 것에는 어떤 계기나 과정이 없어서 어디서부터 늙은 것이고 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게 있는지나 모르겠다.

고령화사회가 되어간다는 말은 넘쳐나지만 노인을 바라보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우리 문학에는 최근 노인의 이야기가 한 편, 두 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민규의 ‘누런 강, 배 한 척’(‘더블’, 2010, 창작과 비평사)도 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난 아직 노인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고 며느리, 아들과 불편한 동거를 하는 모습을 보면 분명 젊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내는 치매다. 아직 초기라고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내의 증상은 심해진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건강의 악화일 것이다. 나의 질병도 두렵지만 반생을 함께 해온 반려자의 육체적 몰락을 목격하기가 더 힘들다. 반려자의 현재는 어쩌면 나의 미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치매가 어떤 병인지 공부를 한다 해도 그다지 나아질 바가 없다. 그건 ‘납득하기 힘들지만 당연한 운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들 집에 들르지만 뭔가 쉽사리 말하지 못하고 며느리는 언제나 ‘서운한 것 있습니다’라는 표정만 보인다. 그나마도 시어머니의 간병을 끝내 맡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시아버지의 건강을 빈다. 딸도 다르지 않다. 딸은 한 번만 도와 달라며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에게 돈을 부탁한다.

김숨의 소설 ‘간과 쓸개’(‘간과 쓸개’, 2011, 문학과 지성사) 역시 노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지만 소설의 주인공 ‘나’ 역시도 간암 진단을 받았다. 소설은 30년 동안 소유하고 있던 땅을 아들과 딸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몸으로 생을 시작했듯이 자식들이 아버지가 평생 만들어 놓은 재산을 나누어 제2의 삶을 시작한다. 둘째아들은 식당을 시작하고, 딸애는 융자 빚 일부를 갚았다. 땅을 나누어주던 날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30년 동안 나는 그저 소유주라는 명목만 허울 좋게 가지고 있었을 뿐, 그 땅에 고추 모종 한 그루 심어본 적이 없었다. 씨앗 한 알 뿌려본 적도….”

어차피 삶이라는 게 일종의 대여 같은 개념일 수도 있지만 막상 자신의 삶을 정리할 때가 되자 남아있는 것은 병에 걸린 몸뚱이 하나뿐이다. 암은 살아 있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확인시켜 주지만 그보다도 더 죽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감케 한다. 죽음을 예고하는 고통은 삶의 증거이기도 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감각은 더 예민해지기도 한다.

간암 진단을 받은 이후로, 그는 5년째 하루 세 번 꼬박 약을 챙겨 먹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누나도 담낭관에 생긴 담석 때문에 편치 않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간, 누나는 쓸개, 이상하게도 그는 신체의 쇠약으로 맞이해야 하는 노년의 삶에 처연하다. 수술도 할 수 없다는 누나의 증상을 듣자니 자신의 병보다도 더 답답하다. 나이가 들면 별것도 아닌 병으로 속절없이 세상을 뜨기도 한다. 죽음의 핑계처럼 그렇게 병은 찾아온다.

남자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기 힘들어 한다. 식당을 새로 차려 바쁜 아들 내외에게도, 살아가는 것 자체를 버거워하는 딸에게도 병간호나 부탁하는 치사한 말처럼 들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라는 마음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약해지는 체력 앞에서 속수무책의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그는 미루고 미루다 누나를 찾아가 어린 시절 함께 들여다보던 검은 저수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 검은 저수지는 담즙으로 가득 찬 그들 두 남매의 간이기도 하지만 한편 언젠가 빠져들게 될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그렇게 우리 곁에 검은 저수지처럼 있어왔지만 아무도 곁에 있는지 모르는 친구이기도 하다.

두 작품의 작가는 모두 30대의 젊은 세대들이다. 아마도 소설에 등장하는 ‘나’는 그들의 아버지이거나 아버지 세대들일 테다. 이들의 작품을 읽다보면 아버지 세대에 빚진 자식들의 안타까움을 짐작하게 된다. 그들의 현재는 한편 아직은 조금 멀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니 말이다. 소설 속에 그려진 노인들은 정신이 있는 한 아직껏 자식들에게 무엇인가를 더 나눠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그렇지 않다면 어느새 다른 세상, 정신과 이성의 영역 너머에 가 있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는 책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부패와 악취에 대한 혐오와 닮아 있다고 말했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순간 우리를 침범하는 것은 가리지 못하는 배설과 통제할 수 없는 체액의 범람이다. 내 몸의 통제권을 잃는 순간 죽음의 공포는 먼저 그 육체를 외롭게 한다.

주체 혹은 자아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둔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자면 지금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는 노년층은 암암리에 주체의 부재를 요구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국가의 재건을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부모의 공양을 위해 그리고 자식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 계속 스스로의 욕구를 덮어왔던 셈이다.

베이비붐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느라 막상 자신의 노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세대들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식들도 IMF 여파로 캥거루족이 되기 일쑤였다. 노인문제는 어느새 경로우대라는 막연한 선전문구나 효(孝)라는 개인적 윤리의 차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노인, 그들을 어떻게 부르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지도, 준비하지도 못한 듯싶다.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2005년 조선·경향·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고려대 국어국문과 박사 졸업,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고려대에서 강의 중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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