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 어 베러 월드’의 한 장면
영화 ‘인 어 베러 월드’의 한 장면

생각보다, 세상엔 혹독한 일이 참 많다. 학교 폭력에 노출된 아이만 해도 그렇다. 부모는 아이가 그저 별 탈 없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믿는다. 유치원 때야 엄마에게 이르면 그만이지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엄마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 부모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영화 ‘인 어 베러 월드(In a Better World)’는 말 그대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진료 시간이 끝나가지만 줄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때 한 응급환자가 진료소로 이송된다. 얼핏 봐서 어느 정도 상처인지 쉽게 알 수는 없지만, 온몸을 뒤덮은 피는 뭔가 심각한 사건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노력해 보지만 환자는 세상을 떠난다. 통역사는 의사에게 말해준다. “이런 일이 왜 생기는 줄 알고 있어요. 빅맨이라는 악당이 있죠. 그는 뱃속의 아이 성별에 내기를 걸고 바로 배를 갈라 확인해요. 전에도 이런 환자를 본 적이 있어요”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인 어 베러 월드’는 악당 빅맨과 싸우는 서구 유럽 출신 의사의 영웅담일까? 짐작이 추리로 이어지기 전에 화면은 장례식장으로 이동한다. 진료소 현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곳은, 정결하고 한편으로 정숙하다. 아이는 엄마의 관 앞에서 냉정하고도 담담하게 고별사를 읽는다. 주변 사람들은 아이를 위로하려 하지만 아이는 아무 감정도 없는 듯 외면한다. 그리고 아이는 출장을 자주 다니는 아버지 대신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있는 할머니 댁으로 거처를 옮긴다.

다음 장면, 아이는 첫 등굣길에 덩치 큰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한 소년을 목격하게 된다. 아이들은 일부러 스크럼을 짜서 소년이 지나갈 수 없도록 훼방놓는다. 쥐이빨이라 놀리는가 하면 더러운 스웨덴인이라며 공격한다. 속수무책, 소년은 당하고 있을 뿐이다. 놀림받던 소년과 짝이 된 아이는 그를 도와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엔 패거리들이 아이를 공격한다. 불시에 농구공으로 얼굴을 가격하고, 아이는 피투성이가 된다.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은 엘리어스, 엄마를 잃고 전학 온 아이는 크리스티앙이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중인 남자는 엘리어스의 아버지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난민들을 도와주지만 정작 따돌림당하고 괴롭힘당하는 아들에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내와의 관계도 엉망이다. 진료소에 가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 이 부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별거 중이다.

엘리어스에게 크리스티앙은 거의 최초의 친구가 되어준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티앙이 엘리어스를 도와주는 방식이 바로 ‘사적 복수’라는 사실이다. 크리스티앙은 자신을 때린 아이를 자전거 펌프로 내려치고 칼로 위협한다. 다시 한번 엘리어스나 자신에게 손을 대면 죽일지도 모른다는 엄포도 놓는다. 엘리어스는 겁에 질려 크리스티앙에게 묻는다.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때 크리스티앙은 대답한다. 만일, 여기서 네가 맞고만 있다면 평생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법이나 규칙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인 어 베러 월드’는 세상에 만연한 폭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 묻고 있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아무리 교사나 부모에게 호소한다 해도 아이를 괴롭히는 집단은 멈추지 않는다. 여자들의 배를 가르는 악당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어스도, 아버지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엔 너무나도 나약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크리스티앙이 폭력을 폭력으로 응수하자 이내 괴롭힘이 멈춘다. 도덕이나 윤리는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도 내놓으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면 바보만 될 뿐이다. 이는 비단 아이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아이들과 놀이터에 간 엘리어스의 아버지도 괜한 시비를 거는 남자에게 얻어맞는다. 아이들은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라 여겼던 아버지가 아무 잘못도 없이 맞는 장면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왜 경찰을 부르거나 따지거나 때리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똑같이 나빠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해가 안된다. 크리스티앙은 복수를 다짐한다.

수전 비에르 감독은 폭력이 팽배한 사회에서의 사적 복수의 개념을 여러 가지 시각과 입장에서 다룬다. 그런데 이 시각에는 어떤 점에서 답이 전제되어 있다. 소년의 복수심이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대한 착각이라는 시선도 그렇다. 감독은 관객에게 크리스티앙의 복수심은 사실 어머니를 빼앗아간 신에 대한 복수심이었다고 확장시킨다. 어머니의 죽음엔 무척 대담하게 굴었지만 그 담담함이 연기였을 뿐 진심은 아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고통과 아픔을 사적인 복수에 쏟으려 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사회적 폭력의 위험성을 희석시킨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세상은 너무도 폭력적이며 법이나 윤리는 때로 너무 허약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복수심을 성장기의 갈등으로 무마하는 대신 감독은 아버지를 통해 일종의 복수를 허용한다. 다리를 다쳐 캠프에 입원하게 된 빅맨을 두고 엘리어스의 아버지는 고민한다. 의사로서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살려야만 한다. 주변의 피해자들은 저런 인간은 치료해줘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다. 하지만 그에겐 이런 판단 자체가 의사의 윤리에 위배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그저, 치료를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대략 완치가 되어가던 빅맨은 자신이 배를 갈랐던 여자가 결국 세상을 떠나자 낄낄거리며 즐거워한다. 심지어 “내 부하는 죽은 여자를 좋아하지”라며 시체를 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이에 아버지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병실 바깥으로 내쫓는다. 그게 무슨 복수냐고? 병실 바깥엔 온통 빅맨의 원수 투성이다. 비무장 상태인 빅맨은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아 숨진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그가 그렇게 되도록 방관한 셈이다.

크리스티앙이 폭력을 통해 복수를 포기했다면 아버지는 공공선의 입장에서 관객이 원하는 윤리를 실현한다. 중요한 것은 복수의 윤리가 허용되는 곳이 바로 아프리카 오지라는 사실이다. 보면서 통쾌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 통쾌함이 우리 삶의 폭력성을 근본적으로 해소해 줄 수는 없다.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모두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2005년 조선·경향·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고려대 국어국문과 박사 졸업,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고려대에서 강의 중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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