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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2174호] 201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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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 말을 걸다] 현장 법사와 누란의 미녀

작가 미상 현장삼장

조정육  미술사가 

▲ 작가 미상 ‘현장삼장상’ 일본 가마쿠라시대 전기, 비단에 색, 135.1×59.5㎝,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우루무치까지 역사 유적지를 다녀오는 코스였다. 맥적산 석굴을 비롯하여 병령사 석굴, 유림 석굴, 돈황 막고굴, 베제크릭의 천불동 등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되는 불교미술의 발자취를 확인해 보는 여정. 중간 중간에 만리장성의 끝자락인 가욕관에서 설산을 보았고, 사막에서 낙타를 탔으며, 서유기의 무대인 화염산을 구경했다. 사막의 지하 수로인 카레즈를 보면서 척박한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무서운 적응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때는 번성했지만 이제는 폐허로 남은 고창 고성과 아스타나 고분군을 둘러보면서 제행무상을 실감하기도 했다.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은 톈산산맥은 장쾌함과 신령스러움이 느껴졌다.
   
   여행을 다 마치고 돌아온 지금,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사막이다. 가욕관에서부터 시작된 사막은 밤새 기차를 타고 가서 다음 날 다시 하루 종일 버스로 달려도 끝나지 않았다. 가도 가도 회색뿐인 돌투성이 사막 위에는 군데군데 낙타풀이 자라고 있을 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사막은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불임의 땅이었다. 그 사막 위에서 나는 앞서 간 두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현장 법사와 누란의 미녀였다.
   
   
   현장 법사, 18년 동안 1만6000㎞를 돌아다니다
   
   한 행각승(行脚僧)이 걸어가고 있다. 등에는 덮개가 있는 대나무 책 상자를 메고, 양손에는 불자(拂子)와 두루마리 경전을 들고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목에는 해골을 꿴 목걸이를 두르고 귀에는 금귀걸이를 차고 있다. 해골은 주인공이 삶의 무상함을 잊지 않는 수행승임을, 금귀걸이는 보살이나 나한처럼 고귀한 존재임을 상징하는 표식이다. 일본 가마쿠라(鎌倉時代·1192~1333)시대 작품인 이 초상화의 제목은 ‘현장삼장(玄奘三藏)’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고승 현장(玄奘·602~664) 법사를 그린 작품이다. 현장 법사는 삼장(三藏) 법사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삼장(三藏)에 능했기 때문이다. 초상화의 형식은 현장 법사의 사리탑이 세워진 중국 시안의 흥교사 비석의 탑본을 모본으로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당나라와 백제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건설하려던 나라시대(柰良時代·710~794)부터 현장 법사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에는 현장 법사의 초상화가 유입되었는데 한 세기 뒤쯤 그려진 이 작품도 그런 인기를 반영하고 있다. 법상종의 종조(宗祖)로서 현장 법사의 탄생에서 열반까지의 일생을 12권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도회한 ‘현장삼장회(玄奘三藏繪)’가 일본 국보로 전해지고 있다.
   
   현장 법사가 일본에서만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을 떠나 천축(인도)을 다녀오기까지 현장 법사의 드라마틱한 여행 이야기는 중국에서도 수백 년 동안 인기검색어 1위였다. 평범한 인간이 성취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극적이고 풍요로운 현장 법사의 생애는 여러 사람에 의해 각기 다른 버전으로 구전되어 내려왔다. 명나라 때의 오승은(嗚承恩)은 당시까지 구전되어 오던 현장의 이야기를 채집하여 ‘서유기’라는 소설로 집대성하였다.
   
   현장 법사는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먼저 출가한 형을 따라 낙양(洛陽)의 정토사에 들어갔다. 어린 사미는 ‘현장’이라는 법명을 받은 후 불경(佛經)을 연구했다. 당시 중국에서 번역된 불경은 오역이 많아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현장은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에 직접 가서 제대로 된 불경을 구해야겠다는 뜻을 세웠다. 당시 당나라는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워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뜻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장은 627년 26세의 나이로 몰래 국경을 빠져나가 인도로 향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그는 사막을 넘고 강을 건너 56개 나라를 지난 다음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10년 남짓 체류하는 동안 날란다대학과 주요 사원을 순례하며 스승을 만나고 불경을 공부했다. 현장이 귀국길에 올라 불경 640질을 가지고 장안에 도착하기까지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왕복기간에 현장이 들른 나라는 모두 110개국이었고 여행거리는 5만리(약 1만6000㎞)였다. 귀국 후 현장은 당태종으로부터 ‘나라의 보배’라는 칭송을 받으며 불경 번역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인도 여행길에 들렀던 서역 여러 나라에 대한 내용을 담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책을 저술했다. 현장 법사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던 힘. 그것은 ‘멀리로는 석가여래의 뜻을 이어 나가고, 가까이로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빛내고자’ 했던 구법(求法)에의 의지였다. 현장 법사가 걸으면서 보고 기록한 실크로드는 현재도 수많은 여행가들이 따라 걷고 싶은 최고의 여행코스가 되었다.
   
   
   수수께끼 속의 누란 미녀
   
   우루무치에 있는 신장성 박물관에는 여러 구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다. 대략 3000년 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은 사막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수분이 증발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라가 되었다. 이곳의 미라는 톈산산맥과 쿤룬산맥에 둘러싸인 타클라마칸사막 부근의 작은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성인 남자에서 여인 그리고 어린아이의 미라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미라가 한 구 있었다. 누란에서 발견된 여인의 미라였다.
   
    ‘누란(樓蘭)의 미녀’로 알려진 그녀는 머리에 두건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깃털 달린 띠로 둘러져 있다. 몸은 마로 덮여 있고 속에는 두 장의 비단천 옷이 입혀져 있었다. 하반신 역시 여러 겹의 비단과 마로 된 치마를 겹쳐 입었고 발에는 비단으로 만든 실내화가 신겨져 있었다. 1927년 스웨덴 탐험가 스웬 헤딘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녀는 수천 년의 세월을 자신의 몸속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막의 모래 속에 누워 있었다. 큰 코에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그녀는 얼핏 보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미라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그녀의 얼굴이 컴퓨터로 복원되었다. 눈이 크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그녀는 우루무치 거리를 걷다 보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 동네 여인이었다.
   
   그렇다한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건조된 육신에 비단옷을 걸친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주었는데도 나는 그녀의 삶을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이곳에 묻혔는지 모른다. 일본의 역사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 靖·1907~1991)는 ‘누란’이라는 소설 속에서 그녀를 누란 왕국의 왕비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누란은 사막 속에 폐허로 남은 나라다. 흉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한나라의 이주정책으로 누란의 소금호수인 로프노르 곁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선선(鄯善)으로 떠난 후 모래 속에 잠긴 나라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미라의 주인공이 선선으로 떠나기 전 선왕(先王)의 왕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곳에 묻혔을 거라고 가정(假定)했다. 그러나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의 육신을 들이대며 이 사막에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외쳐도 그녀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살았으되 산 흔적이 잡히지 않는다. 그녀는 환영인가?
   
   
   신기루가 가르쳐 준 삶의 진실
   
   돈황에서 투루판으로 가기 위해 사막 한가운데를 달리는데 저 멀리 지평선 끝에 바다가 보였다. 바다 위에는 다도해처럼 작은 섬들이 여러 개 떠 있었고 바닷속으로 섬 그림자까지 비쳐 보였다. 자글자글 끓고 있는 사막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갈증을 해소시켜 줄 만큼 시원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지금 바닷가 부근으로 달리고 있나요? 가이더한테 물었더니 바다가 아니라 신기루란다. 분명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없는 것. 그것이 신기루다. 내게는 타클라마칸사막을 누비고 다녔던 현장 법사와 누란의 미녀가 신기루처럼 보였다. 누란의 미녀는 자신의 존재가 신기루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미라로 증거물을 남겼다. 현장 법사는 그마저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적을 남긴 사람의 자취는 확인할 수가 없고,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사람의 자취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금까지도 두 사람은 이름과 시신으로 남아 타클라마칸사막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가르치고 있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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