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이와나미서점 본사 1층 도서전시실 ⓒphoto 차학봉
일본 도쿄 이와나미서점 본사 1층 도서전시실 ⓒphoto 차학봉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 ‘이와나미(岩波)서점’이 올해 100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이와나미 외에도 분게이슌주샤(文藝春秋社)·고단샤(講談社)·신쵸샤(新潮社)·쇼가쿠칸(小學館) 등 많은 유명 출판사가 있지만 이와나미는 학문적인 출판물이 많아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높다. 일본을 대표하는 수준 높은 진보 출판사로 한국 지식인에게도 영향력이 컸다. 이 이와나미와 한국의 깊은 인연에 대해 소개해 보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지금 김지하 시인의 ‘변신’이 큰 화제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김 시인은 1970년대의 반정부민주화 활동으로 옥중 생활을 경험했고, 반박정희 진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구원 운동이 전개된 일도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에 관해 ‘3K 이미지’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김대중·KCIA(중앙정보부)·기생이다. 한국을 이야기하는 대표적 존재라는 의미다. 때로는 그 ‘3K’에 김지하가 들어갈 정도로 지명도가 높았다. 1980년 12월이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옥중에서 석방되었을 때 필자도 그에 대한 기사를 서울발로 크게 썼다.

그래서 나와 같은 외국인 올드 코리아 와처(Old Korea Watcher)에게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상당히 친숙한 인물이다. 그 때문에 그가 박근혜 지지를 표명했을 때도 재빨리 큰 기사를 썼다. 그러나 세대적 차이가 있는 다른 일본 특파원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반박정희 투사였던 김지하의 박근혜 지지’는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기사 타이틀로 말하면 ‘역사의 한을 넘어서!’다. ‘이것이 뉴스가 아니라면 무엇이 뉴스인가.’ 나는 일기가성(一氣呵成)으로 기사를 썼다.

김지하와 리영희의 논쟁

그런데 나는 전부터 그의 ‘변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1980년대 이후에 쓴 ‘밥’이나 ‘생명’에 관한 책도 읽었고 노태우 시대였던가, 세상을 흔들었던 학생들의 분신자살 투쟁에 관련한 강한 비판 기사도 썼다.

1980년대 이후의 사상적 편력 속에서 그는 생태학적 방향으로 전환했고, 소위 공동체적 인간, 공동체적 삶을 재평가하는 일종의 복고주의로 가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우익 사상가’가 된 것이다. 좌익이 공동체주의, 자연주의에 회귀하는 것은 일본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김지하는 박근혜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언론에는 인터뷰 기사도 나왔다. 그 인터뷰(동아일보 1월 9일자) 중에서 그가 돌아가신 리영희 교수를 비판한 것이 재미있었다. 리영희 교수는 ‘우상과 이성’ 등의 저서로 ‘우상’이 된 소위 친북·좌파 지식인의 대표격이다. 그에 대해서 김지하씨는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다. 생전에 리 교수와 술자리에서 “어느 쪽이 거지인가”를 둘러싸고 말다툼을 했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근데 리영희가 나한테 술 취해서 ‘김지하는 거지’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이야말로 거지다’ 했지. ‘내가 밥 얻어먹으려고 손 벌리는 게 뭐가 나빠. 당신이야말로 더러운 거지야. 사상(思想) 거지, 당신 글 다 읽어봤는데 당신 창작물이 어디에 있어. 아사히신문, 뉴욕타임스, 인민일보 인용한 것 외에 더 있나?’ 그랬더니 후배들이 낄낄 웃고.”

사실 이 김지하씨의 이야기 중에서 빠져있는 것이 있다. 아사히(朝日)신문 외에 일본의 월간잡지 ‘세카이(世界)’가 그러하다. 외신기자 출신인 리 교수는 영어가 능숙했지만 영어보다 일본어 쪽이 뛰어났다. 그의 뉴스원, 정보 소스의 중심은 일본 신문과 잡지로 그중에서도 이와나미(岩波)서점이 발행하는 월간잡지 ‘세카이’가 최대의 정보 소스였다.

세카이는 친북·반한적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수입 금지였다. 나도 당시 한국 친구의 부탁을 받아서 일본에서 은밀히 가져온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그만큼 귀중한 잡지로, 한국 좌파지식인 사이에서는 ‘바이블’과 같은 존재였다. 리 교수는 언제나 세카이에서 얻은 국제정세 등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 분석을 소재로 했다. 나도 같은 언론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원고를 읽고 바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T·K생’ 사건

‘세카이’ 2013년 2월호 표지
‘세카이’ 2013년 2월호 표지

일본에서는 좌파·진보 계열의 아사히신문이나 잡지 세카이 등 이와나미 출판물을 좋아하고,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지식인들을 ‘아사히·이와나미 문화인’이라고 한다. 리영희 교수는 바로 한국에 있는 대표적이면서 전형적인 ‘아사히·이와나미 문화인’이었다.(아직 그분 외에도 몇 사람이 현존하지만.)

리영희 교수가 한국에 준 영향은 지극히 컸다. 특히 386세대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저서들은 정치 정세를 좌우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잡지 세카이, 즉 출판사 이와나미가 현대 한국 사회, 한국 정치에 준 영향은 상당히 컸다고 볼 수 있다.

이와나미서점의 상징이었던 잡지 세카이와 한국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T·K생’ 사건이다. 1970년대에 세카이에 거의 10년 동안 익명으로 연재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필자 펜네임이 ‘T·K생’이었는데, 그 기사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큰 영향을 줬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 전한 시대는 1972년 11월부터 1980년 7월까지다. 유신시대의 시작부터 그 종언까지를 배경으로 한국 정치·사회 정세를 반체제·민주화·야당 진영의 입장에서 상세하게 전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유신체제하에서 언론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반체제 세력의 주장이나 그 동향에 관한 정보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그것을 많은 유인물이나 소문 등을 통해 상세하게 전하고 있었기에 중앙정보부 등 정부 당국은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특히 정보기관은 ‘T·K생’이 누구인지 필사적으로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므로 ‘T·K생’ 사건이 된 것이다. ‘T·K생’은 한국이 민주화된 후 스스로 정체를 폭로했다. 지명관 교수가 “나였다”고 공개한 것이다. (지 교수는 김대중 정부 때 KBS 이사장을 지냈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취임사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던 그는 망명에 가까운 형태로 도쿄에 거주하며 명문 도쿄여자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서울에서 인편을 포함해 여러 루트로 입수한 “한국에 관한 비밀정보”를 모아서 세카이 편집부의 협력을 받아 게재했던 것이다.

그 협력자가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당시 세카이 편집장으로 ‘T·K생’은 지명관씨와 야스에씨의 공동 작품이 된 것이다. 1998년 세상을 뜬 야스에씨는 후에 이와나미의 사장이 되는데 그는 김일성과 두 번이나 만나 인터뷰했다.

따라서 잡지 세카이는 일본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북한을 소개하는 친북 잡지로도 유명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에는 북한에 대한 비판적 내용은 일절 등장하지 않았다. 지식인을 포함한 일본 사회는 세카이를 통해 ‘어둡고 침체된 암흑의 독재국가, 한국’과 ‘밝게 발전하는 사회주의국가, 북한’이라고 하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비판정신의 실종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이와나미에서 ‘이와나미신쇼(岩波新書)’로 정리되어 총 4권이 출판되었다. 그것은 반체제 측에서 본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 귀중하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연구하는 데 하나의 자료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1980년 여름으로 끝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한 진압 결과로 ‘중앙정보부, CIA의 오피스 게시판에는 600명 사망, 3000명 부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라고 기술했다. 그리고 어떤 목사의 이야기로 ‘사망자는 2000명에게 달한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소문, 유언비어가 무수히 수록되어 있는 채로는 역사 자료가 될 수 없다. 몇 년 후 중앙일보의 최철주 도쿄특파원이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을 인터뷰했는데 야스에씨 자신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신빙성에 대해서 ‘60~70%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소문이든 거짓말이든 그것이 준 영향은 이제 와서 수정할 수 없는 것이다.

세카이도 이와나미도 다른 많은 출판사와 같이 일본 군국주의시대가 쓰라린 교훈이 되어 1945년 패전 후 재출발했다. 그때 이와나미가 강조한 것은 ‘비판적 정신’ ‘비판적 교양’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대한 신뢰’ 등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문고판(文庫版)과 신서판(新書版)의 표지 이면에 적혀 있다.

그러나 1960년에 대학에 들어가서 세카이를 비롯한 이와나미 애독자가 된 나의 ‘이와나미 체험담’으로 말하자면, 그 비판 정신은 군국주의시대와 같이 이번에도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실종되어 버렸다. 이와나미는 시대적 이상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을 주장하고 지지했다. 세카이를 비롯해 이와나미의 출판물에는 그러한 내용이 많았다.

전후 국제사회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민주주의나 평화를 내걸고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북한을 비롯해 공산주의 국가의 국가명이나 당 이름에 ‘민주’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반대를 외치는 반전평화운동이 공산주의 세력의 위장수단이었던 것은 이미 역사가 설명하고 있다.

지식인의 몰락

야스에 료스케 이와나미서점 전 사장(왼쪽). 그는 김일성 주석(오른쪽)과 두 번 인터뷰했다.
야스에 료스케 이와나미서점 전 사장(왼쪽). 그는 김일성 주석(오른쪽)과 두 번 인터뷰했다.

세카이나 이와나미는 시종 민주주의나 평화라는 이름하에 국제 정세를 말하고 미국이나 일본이나 한국 정부를 비판했지만 공산주의의 실정에는 눈을 감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반미, 반일, 반한이며 소련이나 중국, 북한에 대한 지지, 공감이 되었다.

예를 들면 비문명적이었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나중에 중국에서조차 비판·부정되었고 권력투쟁에 불과했다고 알려졌지만 세카이나 이와나미는 중국 혁명이 새로운 발전이며 인류사의 전진이라고 소개하고 주장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지나친 기대, 오해, 망상은 리영희 교수의 책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리 교수는 세카이·이와나미적 관점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를 긍정, 지지해 온 것에 대해서 끝까지 자기 비판을 회피했다.

전후 일본 사회에는 과거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이 널리 퍼졌다. 잡지 세카이는 그러한 좌파 전성시대 전후 일본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일본이 친미 노선으로 경제적 부흥을 이루고 고도 경제성장 시대에 들어간 1960년대 후반부터 그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나는 그 시기에 대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변화를 직접 경험했다. 그때부터 일본 사회는 경제 지향이 되어 ‘지식인의 몰락’이 거론되었다. 이와나미를 무대로 하는 이념적 엘리트는 후퇴하고 경제 주도 사회에 필요한 실무형 엘리트가 환영받게 되었다.

그 당시 세카이는 1970년대에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으로 상징되는 한국 비판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세카이가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 칭찬은 역사적 심판의 대상이다. 세카이는 한국 비판과 북한 지지로 ‘생계’를 유지한 것이다. 잡지 세카이의 몰락은 1990년대 이후 소련 붕괴가 결정타였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는 밥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대신 장사의 대상이 된 것은 예를 들면 ‘환경문제’다. 대표적 테마가 원전 반대였다. 세카이는 작년 대지진 재해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이와나미의 탈이념 경향

좌파·진보 지향의 이와나미는 전후 일본에 있어서 일관되게 보수정치를 비판했고 자민당 장기 정권을 규탄해 왔다. 비무장 중립론을 이상으로 평화헌법 고수 등 좌파 보수주의의 아성이었다. 그렇게 염원했던 정권교체는 얼마 전 드디어 이루어졌지만 최근 다시 자민당 부활로 수포로 돌아갔다. 우파 아베(安倍) 정권의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좌파 보수주의로 아베정권에 대한 비판에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상은 잡지 세카이를 통해서 되돌아본 ‘이와나미와 한국’의 역사지만 이와나미 문화를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이와나미가 일본에서 담당해온 문화적·지적 역할은 엄청나다. 그 최대의 공은 ‘지적인 교양의 대중화’다.

이와나미의 역사는 100년이 되는데, 이른바 페이퍼백(paper back)에 해당하는 간편하고 값이 싼 ‘문고본(文庫本)’을 ‘이와나미문고(文庫)’의 이름으로 1927년부터 발행하고 있다. 80년 이상이나 전이지만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는 그 목적을 “지금이야말로 지식과 아름다움(예술)을 특권 계급의 독점으로부터 되찾는 것이 진취적인 민중의 간절한 요구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문학·철학·사회과학·자연과학 등 여러 분야를 막론하고 동서고금의 값진 고전적 서적을 문고본으로 발행하고 널리 보급했다.

이로써 독자는 누구나 언제든지 어디서나 가치 있는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식과 교양의 대중화이며, 일본 국민의 지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킨 것이다. 문고본보다 조금 크고 내용도 고전보다는 새로운 ‘신서판(新書版)’은 1938년에 창간되었다. 문고본도 신서판도 이와나미가 시작한 것이다. 이와나미는 출판계의 위대한 개척자였다. 지금 일본의 큰 출판사는 모두 문고본과 신서판을 앞다퉈 발행하고 있다.

이와나미의 출판물에는 최근 탈이념의 경향이 보인다. 지금이야말로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이념만이 지식이 아니고 교양도 아닌 시대다. 그만큼 세계는 넓어졌고 복잡해진 것이다. 신서판에는 ‘희망의 시대에 대한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라는 이와나미의 의지가 적혀 있다. 이와나미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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