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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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포기(Thomas Pogge·61) 미국 예일대 교수(철학)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의론’ 사상가인 존 롤스(John Ralws·1921~2002)의 수제자로 꼽힌다. 하버드대학 박사학위 논문 지도를 롤스로부터 받았다. 서울에 온 포기 교수를 지난 5월 7일 서울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만났다. 서울대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이날 숙명여대에서 ‘여성과 글로벌 정의’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포기 교수는 독일 출신으로 현재 예일대 글로벌저스티스프로그램의 디렉터이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마인드인네이처센터의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양극화가 가져오는 진짜 문제는, 국경을 초월한 개인 간 기회의 양극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지역에 상관없이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빈자는 더 가난해졌다. 부자에 집중되는 부를 사회적·경제적 약자에게 분배하기 위한 글로벌 정의(global justice)가 확립돼야 한다.”

그는 글로벌 정의 확립을 위한 “첫 번째 열쇠가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빈곤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국내적 정치 개혁이나 혁명에 의존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오늘날 인도, 한국 등 개별 국가의 개인들의 운명은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국제적 흐름 속에 상당히 종속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불평등은 더 이상 국경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에도, 인도에도 최상위 부유층이 있으며 미국이나 영국에도 최하위 소득층이 있다. 전 지구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한 국가의 정책뿐만 아니라 글로벌한 수준에서의 정의가 필요하다.”

포기 교수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발달한 통신기기를 기반으로 한 공공교육에서 찾는다. 컴퓨터 및 인터넷의 발달로 온라인을 통한 공공교육이 가능해졌고, 이는 교육의 불균형으로 오는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세계 유수의 대학들은 온라인 공개 강좌를 열고 있다. 극빈층이 이를 접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을 중산층 수준까지만 올려도 부의 양극화 문제는 상당히 개선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문제는 ‘기회’조차도 돈, 인맥의 자원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국경을 넘어 공공선을 위해 활동하는 거대한 재단 혹은 기관이 이 문제 해결을 도울 수 있다. 이를테면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었던 빌 게이츠 부부가 운영하는 자선단체인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이 기능이 단순하고 값싼 노트북을 대량 구매하는 펀드를 조성하면 된다. 빈곤층에 노트북을 무상으로 보급하는 한편, 해당 기업에는 적정한 값을 지불할 수 있다.”

그는 지구적 불평등 해소에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을 적극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포기 박사가 그의 학문적 스승 존 롤스의 평등적 자유주의의 기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평등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 평등 선택을 존중하며 기회균등에 따르는 결과의 차이를 반영하지만,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차별을 한다는 점에서 순수 자유주의와는 다르다.

포기 교수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기업의 속성을 인정하고 이를 이용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대안을 모색한다. “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기업에 마냥 도덕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기업이 돈을 번다고 욕하기보다는 기업에 걸맞은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공공선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가 말하는 글로벌 정의는 이런 메커니즘 속에 구현된다. 최근 그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헬스임팩트펀드(Health Impact Fund·HIF)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일반적으로 제약회사들의 신약은 특허 출원이 돼 있어 사용자가 해당 의약품을 구입하기 위해선 비싼 로열티를 지급해야 한다. 경제력이 부족한 국가 혹은 환자의 경우 비싼 의약품 가격으로 인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헬스임팩트펀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됐다. 제약회사는 신약을 펀드에 등록한 뒤 의약품이 필요한 곳에 저렴한 생산가로 보급한다. 제약회사는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만큼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대신 펀드에 등록된 약의 효과에 상응하는 만큼의 대가를 펀드 자금으로 보전받는다.

포기 교수는 “말라리아, 콜레라 등은 오늘날 의약품으로 예방 및 치료가 가능하지만 아프리카 소말리아 등의 빈곤층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다.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으로 매년 많은 인구가 사망하기 때문에 제약회사는 보전금을 상당히 많이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헬스임팩트펀드는 제약회사에 명분과 이윤을 안겨주는 동시에 전 지구적으로 질병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에 기반한 문제해결 방식과 펀드의 실현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는 이 같은 문제제기에 대해 “이윤만으로도 동기가 부여된다고 본다”며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활동이 그러하듯 반드시 파괴적 방법이 아니고라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고 기업을 안심시키는 것은 빈곤, 환경오염, 여성문제 등 전 지구적 이슈를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치철학자인 그는 최근 다양한 연구를 통해 적절한 인센티브 책정을 위한 평가 지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5월 7일 서울 강연에서 그는 “빈곤 문제는 단순히 경제력 만이 아닌 예상수명, 교육수준, 소득수준을 종합한 휴먼디벨롭먼트인덱스(the human development index)로 파악할 수 있다”며 “단 개인에게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예상수명과 소득수준이 어떻게 분배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선진국과 부유층의 세금세탁에 놓여 있다. 그는 “선진국들이 자원은 풍부하나 경제력이 약한 빈국들에 합당한 세금을 지불하지 않고 자원만 이용하고 있다”며 “이런 식으로 증발하는 세금의 양이 어마어마한데, 이런 반칙적 행태가 자연스러운 자본의 흐름을 방해해 결국 부유한 주머니는 더욱 두껍게, 가난한 주머니는 더욱 얇게 만들고 있는 있는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보여지는 사회지도층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감은 오늘날 더 이상 국내적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적정한 부의 분배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부정적 기대감에서부터 오는 측면이 많다. 따라서 시장의 원칙과 분배 정의를 모두 고려한 글로벌 정의의 개념에 입각해 합리적인 룰을 세워야 한다. 경제행위자들이 룰을 어길 경우 국제형사재판소 등 초국적인 제재를 동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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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전 주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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