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피렌체 두오모성당 앞을 거니는 사람들. ⓒphoto 이승원
비오는 날 피렌체 두오모성당 앞을 거니는 사람들. ⓒphoto 이승원

나의 ‘피렌체 앓이’가 언제쯤 시작되었나 하고 뒤돌아보니, 1995년 샌드라 블록 주연의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봤을 때부터였다. 그 영화 속에는 피렌체의 실제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 루시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기차역 역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가족도 없이 쓸쓸하게 혼자 살아가는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아직 한 번도 스탬프가 찍히지 않은 여권이었다. 항상 ‘피렌체로 여행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한 번도 여권에 도장을 찍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루시에게 잭은 피렌체의 두오모성당을 앙증맞은 미니어처로 넣어 만든 아름다운 스노볼을 선물한다.

외롭게 살아온 루시와 멋진 형의 기세에 눌려 자기표현을 하지 못했던 잭이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오랜 시간 꿈만 꾸어오던 바로 그 도시 피렌체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기차표를 팔며 비좁은 안내부스에 갇혀 살아온 루시가 마침내 피렌체로 떠나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내 마음속 피렌체 앓이가 시작되었다. 나도 그때까지는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한 적이 없었고, ‘대학 가면 배낭여행을 가야지’ 하고 막연히 꿈만 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이제 여행 중독자가 되어버린 나에게 만약 유럽여행 초보자가 ‘딱 한 도시만 골라 여행할 수 있다면, 어떤 도시를 추천해주시겠어요?’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탈리아 피렌체를 권하고 싶다. 걷는 속도로 여행을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쳐 준 도시, 몇 번이나 샅샅이 구석구석을 돌았건만 ‘그래도 그때 놓친 것이 있구나!’ 싶어 또 가고 싶어진 도시가 바로 피렌체였기 때문이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고 오직 걷기만으로도 도시 곳곳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는 피렌체는 골목마다 색다른 풍경을 펼쳐놓아 지루할 틈이 없다.

<b></div>01</b> 아르노강 위를 가로지르는 베키오다리.<br><b>02</b> 피렌체의 중심 시뇨리아광장.<br><b>03</b> 피렌체 거리에서 베르메르의 그림을 파스텔로 모사하는 화가.<br><b>04</b> 보티첼리의 그림 ‘프리마베라’<br><b>05</b> 산타크로체 성당 ⓒphoto 이승원
01 아르노강 위를 가로지르는 베키오다리.
02 피렌체의 중심 시뇨리아광장.
03 피렌체 거리에서 베르메르의 그림을 파스텔로 모사하는 화가.
04 보티첼리의 그림 ‘프리마베라’
05 산타크로체 성당 ⓒphoto 이승원

걷기 여행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

피렌체는 소도시의 매력과 대도시의 매력을 동시에 갖춘 희귀한 도시다. 크기로 치면 소도시이지만 사통팔달한 교통과 휘황찬란한 볼거리, 다양한 문화적 체험, 여행자의 지적 욕구와 예술적 취향을 동시에 만족시켜준다는 점에서는 그 어떤 대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대도시의 교통체증이나 대기오염도 없으니, 소도시 특유의 아늑하고 정감 있는 매력 또한 함께 갖춘 피렌체는 그야말로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한 도시다.

나는 피렌체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을 향해 강렬한 질투심을 느꼈다. 인류의 빛나는 문화유산이 발길에 차이다시피 하는 곳에서 매일 굳이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거리 곳곳, 광장 도처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그들이 정말 부러웠다.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를 예찬하는 옛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싶어 냉정하게 거리를 두게 되는데, 피렌체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피렌체 찬가’(책세상·2015)를 쓴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표현을 따르면, 피렌체와 비교되는 다른 도시들에 오히려 미안함을 느낄 정도로 피렌체는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아무리 유서 깊고 웅장한 건축물을 가진 도시라도, 아무리 아름답고 축복받은 자연경관을 지닌 도시라도, 피렌체 옆에만 서면 뭔가 한 가지쯤은 모자라 보이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저는 피렌체와 비교되는 다른 도시들에 미안함을 느낍니다. 우리의 도시에는 웅대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건축물이 자리 잡지 않은 어떤 거리도, 또 어떤 지역도 없습니다.” 그는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온갖 결점과 지저분함으로 가득한 다른 도시와 달리, 피렌체는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똑같이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껏 추어올린다.

“멀리서 보았을 때 느끼는 피렌체의 아름다움은, 당신이 피렌체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서 결코 초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 몸의 피가 전신에 걸쳐 흐르고 있듯이, 피렌체에는 훌륭한 건축물과 장식물이 전 도시에 두루 펼쳐져 있습니다.”

나는 로마에서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가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와 시뇨리아광장을 보는 순간 이미 피렌체에 흠뻑 빠져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다비드상과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조각상을 보니 ‘그토록 꿈꾸던 피렌체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기차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관광지가 있는 대부분의 도시와 달리 피렌체는 기차역에서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순간에 이미 ‘아, 여기가 피렌체구나’ 싶은 건축물들이 구석구석 보이기 시작한다. 상점들조차도 옛 건물들의 고풍스러움을 훼손하지 않은 채로 간판과 인테리어만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피렌체 곳곳을 걷는 것만으로 이미 르네상스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피렌체에는 무려 세 개의 거대한 다비드상이 있는데, 시뇨리아광장의 가장 유명한 다비드상은 모조품이고, 아카데미아미술관에 있는 작품이 원본이며, 또 하나의 다비드상은 피렌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켈란젤로광장에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흐린 날이나 햇살이 쨍쨍한 날이나, 변함없이 인파로 북적이는 시뇨리아광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다비드상. 이 조각상은 아직 나이 어린 목동에 불과했던 시절 모두가 두려워하던 거인 골리앗을 물리쳐 나라의 영웅이 된 다비드의 용기를 기리며 여전히 피렌체의 상징으로 빛나고 있다.

시뇨리아광장의 조각상들. 피렌체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 같다. ⓒphoto 이승원
시뇨리아광장의 조각상들. 피렌체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 같다. ⓒphoto 이승원

우피치미술관에서 보낸 완벽한 하루

시뇨리아광장에 이어 피렌체의 또 다른 문화적 중심은 우피치미술관이다. 성수기에는 워낙 기다리는 줄이 길어 평균 4시간 정도는 밖에서 줄을 서야 한다는 우피치미술관 앞에서, 나는 정말로 딱 4시간 동안 꼼짝없이 서 있었다. 입구에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을 정도였다. 인터넷으로 입장권을 미리 구입하면 이렇게 긴 줄을 서지 않아도 되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어 그런 준비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기다림이 워낙 간절했던 때문인지 우피치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벌써부터 뭔가를 해낸 듯한 뿌듯한 성취감이 밀려왔다. 드디어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으로 입성했다는 기쁨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무척 아쉽긴 하지만, 대신 여기저기서 들리는 ‘찰칵찰칵’ 셔터 소리 없이 조용하게 미술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우선 가장 궁금했던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보는 순간 숨을 멎게 하는 그림들은 ‘뭔가를 설명하고 싶은 욕구’조차 멈춰버리게 만든다. ‘프리마베라’가 놀라운 첫 번째 이유는 제목처럼 ‘봄’을 상징하는 이 그림의 전체적인 바탕색이 숨 막히는 ‘검은색’이라는 사실이었다. 흔히 ‘봄’ 하면 연둣빛 새순의 빛깔, 벚꽃의 화사한 연분홍빛이 떠오르지만, 이 그림은 그렇게 봄기운이 만연한 시간이 아니라 봄이 막 시작되려는 듯한 찰나의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듯하다. 겨울 숲의 검고 어두운 기운이 아직 화면 전체를 감돌고 있는 가운데 ‘봄’을 상징하는 수많은 신화적 인물들이 마치 각자가 한 떨기의 꽃처럼 땅속에서 피어오른 듯 싱그러운 봄의 기운을 온몸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땅을 딛고 맨발로 서 있지만 마치 중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듯, 너무도 가볍고 산뜻한 발걸음으로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빛 하나하나, 손짓발짓 하나하나에 담아 전하고 있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뿐 아니라 ‘비너스의 탄생’, 라파엘로의 ‘방울새와 성물’ 등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우피치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첼로의 ‘산 로마노 전투’, 필리포 리피의 ‘성모와 두 천사’도 책이나 인터넷으로 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4시간은 입장을 기다리느라 또 다른 4시간은 넋을 잃은 채 그림을 감상하며 걸어다니느라 하루가 다 가버려 발바닥이 타들어가듯 아팠지만, 우피치미술관과 함께한 날은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벅찬 감흥에 젖어 박물관 서점에서 르네상스 미술에 관련된 책을 잔뜩 사서 배낭에 집어넣었다가 며칠 뒤 귀국할 때 공항 검색대에서 수하물 무게제한에 걸릴 정도였다. 그 책들은 지금도 피렌체가 그리울 때마다 변함없이 내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우피치미술관에서 나와 피렌체의 또 다른 상징 베키오다리 주변을 산책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베키오다리는 언뜻 보기에는 그저 낡고 고색창연한 중세의 다리처럼 보이지만, 천천히 걸어가며 자세히 뜯어볼수록 그 매력이 돋보이는 곳이다. 베키오다리 안의 수많은 상점들도 알찬 구경거리다. 도시의 젖줄인 아르노강을 품어 안고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르네상스의 중심으로 성장해온 피렌체의 심장 같은 곳이 바로 베키오다리다. 가혹한 나치의 폭격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뜻깊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1938년 나치 정부와 파시스트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함께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였다. 미술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히틀러는 바사리의 복도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고 피렌체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문화의 아름다운 것들’을 부숴버리거나 태워버림으로써 파괴적 쾌락을 느꼈던 히틀러에게 피렌체는 또 다른 정복의 야망을 부추기는 아름다움의 결정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은 연합군을 피해 철수하면서 아르노강에 있는 다리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지만 다행히 베키오다리는 살아남았다. 다행히도 독일군 사령관이었던 게르하르트 볼프는 ‘베키오다리만은 폭파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 정부는 그에게 명예 피렌체 시민권을 헌정했다고 한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베키오다리는 지금 시민들의 안식처이자 피렌체의 뜨거운 상징으로 살아남았다.

피렌체의 조감도를 한눈에 그려 보기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미켈란젤로광장이다. 피렌체의 풍요로움은 미술관이나 건축물에서뿐 아니라 ‘광장’에서 잉태되는데, 그중에서도 미켈란젤로광장은 두오모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피렌체의 조감도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에 더욱 뜻깊은 장소다. 두오모의 첨탑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지만, 그곳에서는 두오모가 직접 보이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전체적인 피렌체의 풍광을 느껴 보고 싶다면 미켈란젤로광장에 가는 것이 좋다.

시뇨리아광장, 미켈란젤로광장과 함께 피렌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광장은 산타크로체광장이다. 산타크로체성당 앞에는 단테의 거대한 석상이 서 있는데, 마치 우리나라 옛마을 골목 어귀에 든든하게 서 있는 커다란 장승처럼 단테의 늠름한 모습은 산타크로체광장을 지키고 있었다. 산타크로체광장 주변에는 가죽 제품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가득한데,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메이드 인 이탈리아’가 아니라 ‘메이드 인 피렌체’임을 자랑하는 제품들이 그득하다.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오직 피렌체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는 그들만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피렌체의 한 레스토랑에서 라비올리를 손으로 직접 빚는 요리사. ⓒphoto 이승원
피렌체의 한 레스토랑에서 라비올리를 손으로 직접 빚는 요리사. ⓒphoto 이승원

은발의 가죽장인

여기서 잊을 수 없는 가죽공방을 하나 발견했는데, 바로 스쿠올라 델 쿠오이오, 플로렌스가죽학교(‘Scuola del Cuoio_Leather School of Florence’)라는 곳이었다. 산타크로체성당을 끼고 돌아 뒤편으로 걸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고아들의 자립을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가죽장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공방이다. 그곳에서 나는 머리 위에 하얗게 눈이 내린 것처럼 아름다운 은발을 드리운 가죽장인을 만났다.

그는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수많은 도제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마치 이 세상에 가죽 하나와 손에 든 공구밖에 없는 것처럼, 그는 완전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가죽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그렇게 미리 구멍을 뚫는 목타작업을 거친 뒤 그 구멍에 바늘을 끼워 넣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는 것이다. 그런 지난한 작업을 직접 눈앞에서 살펴보니 아까 상점에서 본 가죽 제품을 ‘비싸다’고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이 부끄러워졌다. 디자인과 무두질, 재단과 본뜨기, 가죽에 구멍 뚫기, 손바느질하기, 에지코트(마감재) 칠하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공정 하나 엄청난 집중력과 섬세한 솜씨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수백 년간 장인에서 장인으로 이어져 내려온 바로 그 방식으로 묵묵히 일하고 있는 가죽장인을 바라보며 우리 삶도 저렇게 정성스럽고, 배려가 넘치며,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에 휘둘리지 않기를 빌었다. 저물어가는 피렌체의 밤, 나는 두오모성당 주변을 하염없이 걸으며 골목길의 두오모,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사이로 번져가는 두오모, 멀리서 바라본 두오모를 이리저리 사진으로 찍어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피렌체를 지금까지 지켜온 힘은 단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저 은발의 가죽장인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말 없이 소중한 것들을 꿋꿋하게 보살펴온 사람들의 소리 없는 열정임을 느끼며.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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