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외곽 래퍼핸녹카운티에 있는 ‘리틀 워싱턴’ 외관. ⓒphoto ‘리틀 워싱턴’ 홈페이지
워싱턴 외곽 래퍼핸녹카운티에 있는 ‘리틀 워싱턴’ 외관. ⓒphoto ‘리틀 워싱턴’ 홈페이지

워싱턴DC 근교에 있는 레스토랑 ‘더 인 앳 리틀 워싱턴(The Inn at Little Washington)’은 미국의 수도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한 레스토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신문·방송을 통해 명성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필자는 아직 ‘리틀 워싱턴’을 맛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만큼 고가의 레스토랑이란 말이다. 무리를 해서 한 번 다녀온 사람들은 찬미 일색이었다.

“지적(知的) 변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듯하다. 얽힌 정신을 확 풀어줄 레스토랑이 워싱턴에 있을까?”

20여년 전 일본에 머물 때 신세를 졌던 80대 일본인 대학교수로부터 최근 연락을 받았다. 워싱턴에 들렀는데 레스토랑을 추천해달라는 말이었다. 그가 언급한 ‘지적 변비’란 말이 흥미로웠다. 머릿속에 생각은 많은데 발표나 출간할 여력이 없다는 의미였다. 고령으로 몸이 말을 잘 안 듣기 때문에 집에서 공부만 하다 생긴 일종의 지식인 병이라고 했다. 연락을 받는 순간 노교수의 마지막 외국 방문일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고혈압 때문에 외출 자체가 위험하다고 들었다. 반가움과 함께 황혼길 외출을 아주 특별한 날로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생겼다. ‘리틀 워싱턴’은 즉석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비싼 곳이기는 하지만 기억에 남는 장소로는 적격인 듯합니다.”

‘리틀 워싱턴’은 워싱턴 도심에서 서쪽으로 100㎞ 이상 떨어진 버지니아주 래퍼핸녹카운티(Rapphannock County)에 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시대 때 조성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미국 유행가를 통해 한번쯤은 들어봤을 셰넌도어계곡(Shenandoah Valley)이 바로 근처다. 백악관을 기점으로 할 때, 빨리 가도 자동차로 1시간 이상 걸린다.

저녁 식사시간에 맞춰 정확히 6시에 도착했다. 레스토랑 건물은 마구간을 개조한 것이다. 이미 서너 명의 직원들이 밖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8세기 미국 독립운동 당시의 옷차림을 한 직원도 있었다. 250여년 전 타고 다니던 말(馬) 대신 이제는 자동차 주차를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주차장에는 노교수의 이름이 적힌 작은 현판이 이미 세워져 있었다. 손님을 맞는 정성이 느껴졌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매니저가 나와서 인사를 한다. 레스토랑을 한 번이라도 찾은 손님은 전부 기억해두겠다는 자세가 느껴진다. 노교수의 나이를 의식한 듯, 매니저는 “최근 94세 부인의 생일파티를 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레스토랑 입구를 지나면 넓은 로비가 펼쳐진다. 고급 카펫으로 뒤덮인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케 하는 품격의 공간이다. 벽에 걸린 유화부터 장식물, 탁자, 의자, 샹들리에 모두 최고급 골동품으로 느껴진다.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등의 촉수가 낮다. 주변이 다소 어두울수록 미각이 한층 더 예민해지고 음식을 천천히 즐길 수 있다. 맥도날드 햄버거집이 밝은 불빛으로 장식된 것은 빨리 위장을 채우고 나가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메인 셰프 패트릭 코넬. ⓒphoto ‘리틀 워싱턴’ 홈페이지
메인 셰프 패트릭 코넬. ⓒphoto ‘리틀 워싱턴’ 홈페이지

레스토랑 안에는 필자 일행보다 미리 온 손님들도 많다. 예약률이 100%라고 한다. ‘리틀 워싱턴’은 레스토랑 바로 옆에 붙은 빅토리아풍 호텔로도 유명하다. 시골이지만 5성(星)급 호텔이다. 레스토랑 입구에는 ‘레라이스 샤토(Relais & Chateaux)’ 문양이 새겨져 있다. 프랑스에 본부를 둔, 글로벌 고급 호텔 체인점 표시다. ‘리틀 워싱턴’ 호텔의 경우 하루 숙박비가 700달러 선에서 최고 3200달러 선까지다. 방은 고작 20여개뿐이지만 거의 만원이라고 한다. 레스토랑 손님들 중 상당수가 호텔 투숙객이다. 입구의 빅토리아풍 로비는 호텔 투숙객을 위한 아침식사용 공간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고급 레스토랑을 낀 호텔 비즈니스는 유럽 스타일이다. 대부분의 미국 호텔 레스토랑은 끼니를 때우는 ‘밥집’에 불과하다.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고급 호텔일수록 미쉐린 스타급 레스토랑이 따라붙는다. 사실 카우보이 나라는 맛의 세계에 무심하다.

‘리틀 워싱턴’ 호텔 손님들의 경우 평범한 중산층 가족 단위가 대부분으로 보였다. 일생에 단 한 번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가족들과 방문한 듯했다. 결혼기념 50주년, 손자의 대학 입학 축하 기념에 맞춰 가족 모두가 와서 머무는 식이다. 18세기 말의 풍경도 즐기고 셰넌도어계곡에서 시간을 보낸 뒤 저녁에 ‘리틀 워싱턴’에서 만찬을 즐긴다. 대충 계산해봤지만, 최하 가격의 방이라 해도 4인 가족이 머물 경우 식사비를 포함해 1박에 3000달러 선에 육박할 듯하다. 세금과 팁을 포함하면 4000달러 선까지 가격이 오른다. 돈의 액수가 추억의 정도와 정비례하지는 않지만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식사 주문은 전부 4개로 이뤄진 코스 요리로만 받는다. 3종류의 코스 요리가 있지만 샐러드를 포함한 전채 2종류와 육류와 해산물 요리가 이어지는 식이다. 가격은 218달러로 똑같다. 소믈리에가 추천하는 4종류의 와인을 추가할 경우 343달러다. 샴페인 한 잔과 화이트와인, 레드와인을 별도로 한 병씩 시키면 1인당 500달러에서 출발한다.

검은 송로버섯을 갈아서 팝콘에 뿌린 ‘리틀 워싱턴’의 아뮤즈 부슈. ⓒphoto 유민호
검은 송로버섯을 갈아서 팝콘에 뿌린 ‘리틀 워싱턴’의 아뮤즈 부슈. ⓒphoto 유민호

음식은 ‘아뮤즈 부슈(amuse-bouche)’로 시작됐다. 본격적인 식사 전에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한, 위장과 무관한 음식이다. 한입에 들어갈 정도의 적은 양이지만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아뮤즈 부슈의 종류가 많다. ‘리틀 워싱턴’의 첫 번째 아뮤즈 부슈는 상상을 뛰어넘는 ‘돌출’ 그 자체다. 막 구운 팝콘 위에다 검은 송로버섯을 갈아서 선보였기 때문이다. 산삼을 고추장에 머무려 먹는 식이라고나 할까? 흰 버섯이 아니라 검은 버섯이라 다행이지만 유럽인이 본다면 ‘요리 모독’ 행위로 규탄할 듯하다. 유럽산 송로버섯을 생으로 깨물어 먹는 중국인보다도 더 ‘야만적’으로 비쳐질 듯하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송로버섯 팝콘은 ‘리틀 워싱턴’을 미쉐린 투스타에 머물게 한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노교수는 연신 웃으면서 “미국인이기에 가능한 요리”라고 했다.

두 번째 아뮤즈 부슈는 초콜릿으로 감싼 작은 과자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볼 수 있는 카놀리(Cannoli)와 비슷하지만 결코 달지 않다. 전채로는 구운 빵과 캐비어가 나왔다. 말로만 듣던 프랑스 페트로시안(Petrossian) 캐비어다. 30g 크기의 깡통에 든 캐비어로, 바닥에는 거위 간인 푸아그라가 깔려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격이 안 맞는다. 페트로시안 캐비어는 최저가도 100달러 선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200달러대 코스 요리 속에 포함될 수 있을까?

패트릭 코넬(Patrick O’Connell)은 ‘리틀 워싱턴’의 메인 셰프이자 주인이다. 현재 71세로, 39년 전 이 레스토랑을 열었다. 코넬은 미국식 요리, 즉 아메리칸 컨템퍼러리(American Contemporary) 장르의 대부(代父)로 불린다. 1978년 외딴 시골에 4.95달러짜리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을 열었다. 미국 요리계의 이단아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아는 한 미국 요리라는 이름을 단 코스 음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이전의 미국 요리는 애플파이나 햄버거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이민 대국 미국은 자체 요리가 없다. 전부 외국에서 들여온 수입 요리다. ‘리틀 워싱턴’의 미국 코스 요리는 열악한 상황에서 꽃피운 아메리칸 컨템퍼러리다.

‘리틀 워싱턴’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덕분이다. 10년 전인 2007년 5월, 엘리자베스 여왕의 워싱턴 국빈 방문 당시 코넬이 요리사로 불려갔기 때문이다. 버지니아주 주지사 집에서 벌어진 환영 리셉션이었다. 유럽 요리계에서 영국 여왕의 위상은 크게 높지 않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정치가라면 이해가 되지만, 여왕을 포함해 영국인이 인정하는 요리라 해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발전은 하고 있지만 영국 역시 기본적으로 미식과는 무관한 나라다. 하지만 미국 요리계에서는 다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위상이 각별하다. 아마 앵글로색슨족끼리의 DNA, 혹은 유대감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겠다. 영국 여왕이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리틀 워싱턴’은 대박이 터졌다.

고풍스럽게 치장된 ‘리틀 워싱턴’ 실내. ⓒphoto ‘리틀 워싱턴’ 홈페이지
고풍스럽게 치장된 ‘리틀 워싱턴’ 실내. ⓒphoto ‘리틀 워싱턴’ 홈페이지

메인 요리는 두 가지 육류로 주문했다. 괜찮은 레스토랑의 특징이지만, 말만 잘하면 없는 메뉴도 만들어준다. 원래 해산물 요리를 즐기지만 자체 농장에서 길러진 재료라고 해서 관심이 갔다. 목장에서 사육한 유기농 오리고기와 양고기를 시켰다. 소스가 진한 프랑스식이지만, 비교적 달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는 점에서 미국풍으로 비쳐진다. 미국인의 비만은 엄청난 음식의 양과 더불어 설탕에서 비롯된다. 와인조차 설탕으로 범벅을 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메인 요리가 끝나자 디저트로 ‘치즈 마차’가 등장했다. 프랑스에서나 보는 광경이지만 전부 미국산 치즈다. 최고로 통하는 위스콘신 치즈를 비롯해 20여종류의 치즈가 나왔다.

디저트 와인을 주문하던 중, 인터넷에서 얼굴을 봤던 셰프 코넬이 등장했다. 그는 노교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부엌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셰프가 부엌을 보여준다는 것은 사춘기 소녀가 자기 방을 공개한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리틀 워싱턴’은 부엌에서 일하는 보조 요리사만도 40명에 달한다. 레스토랑 안과 호텔 쪽 직원들을 포함할 경우 전부 100명 정도가 일한다고 한다.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다. 래퍼핸녹의 인구가 7000명이란 점을 감안하면 마을 전체를 먹여살리는 산업이 ‘리틀 워싱턴’이라 할 수 있다.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노교수는 독백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자주 왔을 텐데. 언젠가 다시 한 번 들르고 싶네!” 만찬은 전부 3시간30분에 걸쳐 끝났다. 스스로 즐겼고, 멀리서 찾아온 노교수도 추억의 한 장면으로 새길 만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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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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