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린 시절 장면 중 하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입니다. 누군가의 생일잔치에 가서 한창 떠들썩하게 노는데 거실 TV 앞에서 “꺅”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TV 앞으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TV에서는 한창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배우 손지창씨의 과자 광고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과자를 입에 넣을 때마다 조그만 TV 앞에 둘러앉은 여자아이들 입에서 꺅 비명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친구들을 냉담하게 바라봤던 저도 일 년 뒤에 그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연세대 농구팀 팬이 되어 친구와 함께 잡지란 잡지는 다 사모아 사진을 오려내느라고 한 무더기 쓰레기를 만들곤 했습니다. 조금 지나서는 아이돌그룹 H.O.T.의 팬이 되어 음악 방송 보겠다고 하루 종일 리모컨을 붙잡고 TV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 10~20대는 팬질을 빼놓고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교우 관계도, 취미 생활도, 심지어 진로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H.O.T. 대신 젝스키스를 좋아하는 친구들과는 소원해졌습니다. 일본 음악시장에 진출한 동방신기 따라 일본을 들락날락하다가 여행이 취미가 됐습니다. 그때 만난 일본인 언니들과는 아직도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팬 경험이 서브컬처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기자가 돼 팬덤과 서브컬처에 대한 기사도 여럿 썼으니 확실히 그렇네요.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여성들의 삶에는 누군가의 팬이었던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억은 기억으로만 그치지 않고 취향으로, 생활 습관으로 계속 되살아납니다. 팬덤과는 무관한 영역에서도 팬 경험은 불쑥불쑥 등장합니다. 정치인 문재인을 스타 좋아하듯이 사진을 저장하고 팬아트를 그려내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기업이 좋다고 흑자를 올려서 기쁘다고 화분을 보내고 축하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동안, 사실은 지금도 팬이란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인 열광자(熱狂者)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빠순이’라고 폄하하는 단어도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 면면을 보면 그 빠순이들이 트렌드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하며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열광할 만한 대상이 나타나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하고 행동에 나섭니다. TV 오디션 프로그램 중 하나인 ‘프로듀스 101’ 콘서트가 있던 현장을 지나가던 행인이 툭 내뱉은 말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이 사람들이 다 나왔대?”

숨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팬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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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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