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으로 가는 길 자체가 한 편의 오롯한 이야기가 되는 장소가 있다. 나에겐 덴마크 코펜하겐이 그랬다. 유레일 패스를 끊어 기차를 타는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기차시간표만 검색하여 함부르크에서 코펜하겐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무거운 짐을 기차에 내려놓자 금세 잠이 쏟아졌다. 뮌헨, 베를린, 드레스덴 등 독일의 5개 도시를 쉬지 않고 돌아다닌 뒤라 피로가 몰려왔다. 한참 졸고 있는데 희미하게 독일어와 영어 안내방송이 차례로 들려왔다. 앞부분은 자느라 못 듣고, 뒷부분만 들렸다. “우리 열차는 곧 페리 안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승객들은 짐을 모두 객실에 놓아두시고, 페리에 승선하시기 바랍니다.”
잠이 덜 깬 나는 기차가 어떻게 페리로 들어가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승용차나 버스가 배 안으로 들어가는 건 본 적이 있지만, 기차가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함부르크와 코펜하겐 사이에는 ‘바다’가 있었구나. 유레일패스를 끊으면 유럽의 26개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만 들떠 ‘이거 하나면 만사형통이구나’ 생각했던 나의 무지와 게으름이 탄로나는 순간이었다.
해외여행 시 ‘소매치기를 주의하라’는 경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나는 ‘객실에 짐을 그대로 두고 가라’는 권고사항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짐을 두고 갔다가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그 무거운 캐리어와 배낭을 끙끙거리며 페리에 올라탔다. 10량짜리 거대한 유레일 열차가 무려 다섯 대나 이미 거대한 페리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마치 고래 뱃속으로 들어간 요나가 된 느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끙끙대며 짐을 들고 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꽉 차 있어 그 무거운 짐을 끌고 3층 위의 갑판으로 걸어 올라가려니, 땀이 뻘뻘 흘렀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캐리어를 낑낑대며 들고 올라가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정말 부끄러웠지만 ‘이 낯선 곳에서 짐이 없어지면 어떡하나’라는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이때의 부끄러움을 학습한 나는 두 번째, 세 번째로 코펜하겐으로 갈 때는 당당하게 짐을 열차 안에 두고 내렸다. 지갑이나 카메라, 귀중품이 든 작은 가방만 들고 나가면 짐이 없어질 염려는 거의 없다. 승객들이 내리자마자 열차 승무원이 문을 철저히 잠가두기 때문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갑판 위로 올라가니, 비로소 짙푸른 바다가 보였다. 바다 위로 놀랍게도 쌍무지개가 화려한 위용을 드러냈다. 건물이 빽빽이 들어찬 곳에서는 좀처럼 제대로 전체적인 윤곽을 볼 수 없는, 수평선 위에서 바로 떠오른 쌍무지개는 마치 천국으로 가는 계단처럼 아름답고 완벽했다. 수평선 너머로는 여기저기 거대한 풍력발전소가 보이고, 독일과 덴마크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다 위에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이후로는 코펜하겐에 갈 일만 있으면 무조건 ‘페리를 타겠다’며 법석을 떨곤 했다. 물론 비행기로 가면 훨씬 빠르지만 유럽여행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무지와 게으름이 또 하나의 추억이 되어 낭만적인 정취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왕립도서관의 위용
여행을 떠날 때 꼭 빼놓지 않고 들르고 싶은 명소 중의 하나는 바로 그 지역의 도서관이다. 도서관이 아름답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도시는 모두 내 마음속에서 멋진 도시로 각인되었다. 버밍엄의 시립도서관, 런던의 대영도서관, 리버풀의 시립도서관, 빈의 프룽크잘 등이 특히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온갖 시립도서관, 국립도서관, 왕립도서관들은 기본적으로 무료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여행자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내 마음속에서 한 도시의 개방성과 포용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그 도시의 공원, 광장과 도서관이다. 누구나 무료로 그 도시의 문화적 상징을 즐길 수 있는 광장과 도서관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도시는 다른 장소들도 그 품격에 걸맞게 멋지고 깔끔했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고 서비스도 친절한 도서관 카페테리아에서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꽤 괜찮은 점심식사가 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코펜하겐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키르케고르의 동상이 있는 덴마크 왕립도서관이었다.
왕립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코펜하겐 시내는 아침부터 교통체증이 심하고 부산스러웠다.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거북이 행보로 움직이며 교통체증에 붙들린 반면, 자전거들은 마치 진기묘기의 주인공들처럼 자유자재로 매끄럽고 날쌔게 질주했다. 출근길의 승자는 승용차나 버스가 아니라 단연 자전거였다. 출근길의 혼잡은 서울 못지않았지만 일단 왕립도서관에 들어가자 마치 고요한 산사(山寺)처럼 그윽한 정적이 감돌았다. 도심 한복판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코펜하겐 왕립도서관은 기대 이상으로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기품 있는 절제미가 느껴지는 정원의 조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왕립’이라는 간판에 주눅들 필요는 없었다. 간판을 못 본 채로 우연인 듯 산책길에 불쑥 찾는다면 오히려 좋을 것 같았다. 그저 나무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정성 들여 가꾼 아름다원 정원의 느낌, 그 안에 뜻밖에도 멋진 도서관이 있어 더욱 반가운 그런 느낌이 좋았다.
코펜하겐의 도심 곳곳을 둘러보기 좋은 세 가지 이동수단은 자전거, 유람선, 그리고 도보다. 걷기 여행 예찬자인 나는 어떤 도시든 도보여행을 최고로 치지만, 특히 코펜하겐은 런던이나 뉴욕처럼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편하게 걷기여행을 즐길 수 있다. 도시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동네 카페와 서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가게와 코펜하겐의 명물인 도자기들을 구경하는 소소한 즐거움도 좋았다. 운하의 도시 코펜하겐에서는 오랜만에 유람선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