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타히티’의 화가 폴 고갱은 원래 증권맨이었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본업은 의사.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고고학을 좋아하는 상인이었다. 최초로 증기선을 만든 로버트 풀턴은 본래 화가다. 취미활동으로 일가를 이룬 그들은, 때론 역사의 흐름을 바꾸며 자신들만 새길 수 있는 독특한 무늬로 인류사를 수놓았다.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본업과 취미를 병행하며 대가(大家)의 반열에 올랐거나 오르고 있는 네 명을 만났다.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결국 관건은 ‘하루’. 매일 아침 출근길 풍경을 사진에 담은 호텔리어, 퇴근 후면 문향(聞香)에 심취해 30년을 보낸 은행원, 천체망원경 장인이 된 국사 선생님, 예술하는 직장인으로 사는 법을 전파하는 방송사 직원. 충실하게 보낸 ‘오늘 하루’가 그들을 만든 동력원이었다.

여의도 빌딩숲을 헤치고 금융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지난 10월 16일, 박철상(50)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금속테 안경에 감색 수트 차림으로 나타난 박씨는 손꼽히는 추사(秋史) 연구자다. 추사는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호다. 박씨의 본업은 은행원. 광주은행 자금시장부에서 일한다.

학계에 그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2002년. 그해 겨울, 논문 한 편이 발표됐다. ‘문헌과 해석’이란 계간 학술지에 실렸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그해 출판한 ‘완당평전’에 오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완당평전’은 제목 그대로 추사 김정희의 일대기를 그린 책이다. 지적한 오류는 200개 이상이었다. 단순히 한문을 잘못 해석한 수준이 아니었다. ‘완당’이란 호의 유래까지 버젓이 틀리게 써놨다고 논문은 지적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유 교수는 책에 ‘완당의 스승인 완원이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줬다. 30대 이후부터 완당이라는 호가 널리 알려졌다’고 썼다.

사실일까. 반론은 이렇다. ‘추사는 말년까지도 ‘추사’라는 호가 들어간 인장을 즐겨 사용했다. 완원이 호를 내려줬다는 근거도 없다.’ 유 교수는 별다른 반박을 안 했다. 논문을 쓴 이는 당시 서른다섯이었던 은행원 박철상씨였다. 그의 말이다.

“논문을 발표하고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직접 쓴 게 맞는지 묻더라. 대리 발표한 게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인터뷰를 싣지 않더라.”

이후 추사와 그 주변인물에 대한 박씨의 주장은 정설로 인정받았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추사 150주기 특별전을 열 때는 자문위원을 하며 도왔다. ‘세한도’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 ‘서재에 살다’ 등 책도 냈다. 일관된 연구주제는 ‘추사’다. 왜 하필 추사인지 물었다.

“정확히는 추사를 중심으로 이뤄진 19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교류를 연구한다. 한때 추사가 사대주의자가 아니냐는 오해가 있었다. 중국을 무조건 따라가는 인물 아니냐는 얘기다. 그런데 아니다. 추사는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지식인이 되려 한 인물이다. 당시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던 옹방강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의 수준을 높이려 했다. 단지 조선이 아닌 ‘글로벌 스탠더드’를 넘어서려 했단 얘기다. 추사의 글과 글씨는 중국에서 인정받았다. 다른 거개 조선 지식인의 작품은 중국에서 안 통했다.”

추사가 동아시아 수준의 지식인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박씨는 ‘문경(門俓)’을 들었다. “어떤 집의 주인을 만나려면 정해진 문, 즉 문경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성인의 도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문인 훈고학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당시 관행은 달랐다. “글씨를 배운다고 하면, 왕희지의 글씨부터 베꼈다. 추사는 달랐다. 당대 최고 수준의 글씨부터 시작해 철저히 탐구하며 거슬러 올라갔다. 원류까지 파고들어갔다는 얘기다. 그 결과가 추사체다. 다른 사람의 글씨는 잘 써야 왕희지, 동기창의 아류였다. 추사체는 한·중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글씨다. 김정희의 힘이다.”

최근 중국에선 추사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얼마 전 난징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갔다. 학술대회 논문집의 표지가 추사의 글씨더라. 지역 방송사는 추사와 교류했던 완원과 추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이 추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중국인을 스승 삼아 공부한 외국인이 그만의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봤기 때문이 아닐까. 옹방강의 제자인 주학년이 그린 그림에 김정희가 제영을 쓴 작품이 중국에서 수억원에 팔렸다.”

박철상씨의 저서.
박철상씨의 저서.

사실 박씨의 ‘이중생활’은 어릴 때 시작됐다. 한학자인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그의 말이다. “한학을 계속하려면 학자나 교수가 되어야 하는데 그건 싫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이유다. 은행에 입사하고는 퇴근 후나 주말에 혼자 공부를 계속했다.”

2014년엔 뒤늦게 박사학위도 받았다.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가 논문 주제였다. “학위를 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박사학위를 받으면 좋겠다는 권고를 들었다. 어떤 일을 앞으로 할 때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다. 운전면허를 딴 셈이다.”

딴지를 걸어봤다. 은행원이 아니라 학자의 삶을 살았다면 더 많은 연구업적을 내지 않았을까. 즉답이 돌아왔다. “만약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학교에서 교수가 됐다면 지금 같은 성과는 못 냈다. 도서관에 있는 죽은 문헌만 들여다봤을 거다. 저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자료는 자료대로 보고 외부에 있는 자료는 구입해서 봤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생각을 했다. 학교에 있으면 생각과 고민을 스승이 대신 해줬을 거다. 여기선 내가 직접 한다. 학교에 있었으면 ‘완당평전’을 비판할 수 있었을까?”

재야 사학자 생활의 단점은 없었을까. “물론 있다. 교류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 처음엔 그저 혼자 책이나 자료만 읽고 정년퇴임하면 본격적으로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IMF 사태를 맞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은행도 망할 수 있구나.’ 이후 ‘문헌과 해석’이란 연구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외부 출신이라는 게 결국 장점이 되더라. 학문을 하는 사람은 새로운 시각을 갖춰야 한다. 학교에 갇히는 순간 틀을 깨기 어려워지더라. 돌아보면 평일엔 일하고 주말엔 연구하는 삶이 쉬웠던 건 아니다. 30년을 이렇게 살 줄 처음부터 알았다면 못 했을 것 같다.”

얘기가 나온 김에 박씨는 사학계에 대한 우려를 털어놨다.

“역사학도들이 한문을 모른다. 기본적인 원전은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승정원일기를 볼 때 꼭 원전을 본다. 국문으로 옮기는 작업에 오류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문제가 있다. 연구 주도권을 중국과 일본에 빼앗기고 있다. 연행록이 그 예다. 중국에 간 사신 행렬에 관한 기록이다. 중국에서 가져가 먼저 연구한다. 나중엔 우리 걸 연구하러 중국으로 가야 한다.”

박씨는 역사 연구를 하려면 일찍부터 한자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학 때부터 공부해선 늦다. 역사 연구를 할 사람들은 영어보단 중국어를 배우면 좋다. 한문을 우리말로 옮길 때 수월해진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중국에서 책을 낸다. 우리나라 고서나 역사를 중국에 직접 소개한 자료가 많지 않다. 지금도 일본을 경유해 중국으로 들어간다. 추사의 기록도 애초에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집대성했다. 연구주제는 기본적으론 19세기 연구다. 추사가 핵심이다. 당시 지식인의 인장 문화를 계속 연구하려 한다.”

그의 휴대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추사의 시간에서 은행원의 시간으로 돌아갈 때. 30년간 두 시간대를 성공적으로 오고간 비결을 물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직업으로 승부를 볼 게 아니라면, 정년퇴임 후 뭘 할 건지 미리 고민해야 한다. 그걸 위해 적어도 10년은 들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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