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81호]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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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人] 정두섭 양구백자박물관장

“600년 조선백자의 비밀 품은 양구 백토를 지켜라!”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1391년 4월,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방산사기장 심룡(沈龍)은 극비리에 백자 네 점을 빚었다. 방산에서 나는 백토로 만든 사발 모양의 백자들이었다. 심룡은 백자에 특별한 염원을 담은 발원문을 새겼다. ‘대명 홍무 24년 신미 4월 일에 소원을 빕니다’로 시작하는 발원문이었다. 만일 그 내용이 알려지는 날에는 삼족을 멸할 일이었다.
   
   조선 건국 1년4개월 전의 일이다. 사발 두 개에 173자와, 83자로 음각한 발원문은 이성계와 그의 추종자 1만명이 ‘새로운 미륵세상’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심룡은 한 개의 그릇 바닥굽에 ‘신미년4월일방산사기장심룡동발원비구신관(辛未年四月日方山砂器匠沈龍同發願比丘信寬)’이라고 새겨 제작시기와 자신의 실명을 밝혔다.
   
   새로운 미륵세상은 곧 새로운 나라였다. 쿠데타를 예고하는 이 백자는 금강산 월출봉에 묻혔다.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500년이 훌쩍 넘어서였다. 1932년 6월의 일이다. 당시 강원도청 직원들이 산불 저지선 작업을 위해 땅을 파다 석함(돌로 만든 함)을 발견한다. 석함에는 금은 도금 사리기와 사리외함으로 사용된 백자 4점 등 총 7점이 들어있었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로 불리는 유물 세트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이 유물 세트는 2017년 1월 보물 1925호로 지정됐다. 도자 장인 심룡은 조선 개국공신 이름이 기록된 ‘이원길개국원종공신록권’(국보 제 250호)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심룡이 목숨 걸고 만든 이 백자는 도자기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조선백자의 기원에 대해 두가지 설이 있었다. ‘고려백자를 계승했다’와 ‘세종 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다. 고려백자 계승설을 입증해준 것이 바로 ‘이성계 발원 사리함’이다. 양구는 조선백자 생산의 요지인 동시에 백자의 주원료인 백토의 주 공급처였다. 2006년 그런 배경에서 양구백자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양구백자박물관 개관 때부터 양구 백토를 알리고 백토 유출을 막기 위해 10여년을 하루같이 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정두섭(46) 관장이다. 지난 10월 31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에 있는 박물관을 찾았다. 오지 중 오지였던 양구는 터널이 뻥뻥 뚫리면서 서울 광화문에서 2시간 거리로 가까워졌다. 방산면은 양구에서 15분여 더 들어가야 한다. 평일인데도 단체관람을 온 학생들이 양구 백토로 도예 체험을 하고 있었다.
   
   “조선의 백자를 재현하려면 조선의 흙으로 만들어야죠. 수입된 원료로 빚은 백자를 조선백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정작 원재료인 우리 땅, 우리 흙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양구 백토가 가장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성을 살리자는 겁니다. 양구는 조선 초기부터 자기를 제작해 중앙에 공납했습니다. 15세기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생긴 이후 가장 많은 양의 백토를 가장 오랫동안 공급한 곳이 양구입니다.”
   
   정 관장의 말이 빨라졌다. 양구가 조선백자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료는 많다고 했다. 조선시대 외국 손님을 접대하는 예빈실, 순승부(세자부), 궁궐 물품을 관리하는 장흥고에서도 양구 그릇을 사용했고 세종대왕 태를 담아두는 그릇(장태)도 양구산이라고 했다. 방산면을 중심으로 양구 일대에 분포돼 있는 양구 백토는 화강편마암이 그 자리에서 풍화되면서 만들어진 흙이다. 그만큼 불순물이 적다. 철분 함량이 0.5~1%로 백색 순도가 높고 점성이 강해 성형력이 좋다. 양구에서 분원에 공납했던 백토의 양은 매년 500~550석(石) 규모였다. 정 관장은 ‘1석=16㎏’이라는 것을 밝힌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동안 백토를 세는 단위인 ‘석(石)’에 대해 정립된 내용이 없었다.
   
   정 관장은 조선백자의 역사를 품고 있는 백토를 지키기 위해 양구 밖으로의 반출을 막고 있다. 자신은 물론 박물관 직원들부터 개인적으로 작품을 만들 때 양구 백토를 쓰지 않고 흙을 사서 쓰고 있지만 사실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마구 흙을 퍼 나르는 사람들을 막을 방도는 사실상 없다.
   
   “반출을 막고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한다는 둥 지역이기주의라는 둥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곳저곳에서 압력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우리 흙에 대한 가치를 연구하고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체계적인 장치가 절실합니다.”
   
   
   한·중·일 白土 삼국지
   
   백토 지키기는 백토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오는 11월 10일 박물관은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중국 최대의 도요지인 경덕진, 일본 백자의 발원지인 아리타현, 양구 백토를 비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재료로 접근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한·중·일 3개국의 흙을 비교하는 ‘백토 삼국지’인 셈이다. 정 관장은 백토 연구를 위해 중국 경덕진의 황요도자예술박물관과 MOU를 맺고 일본 사가현 규슈도자문화관과도 MOU 체결을 추진 중이다.
   
   11년 전, 박물관 직원은 정 관장 혼자였다. 그가 출근하는 시간이 개관이고, 퇴근하면 휴관이었다. 9급 공무원 월급을 받고 관장으로, 도예강사로, 예초기 들고 마당 풀 깎고 도끼질 하는 인부로 1인 다역을 맡았다. 도예를 전공하고 개인 작업을 하던 시기라 그저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직원이 들어온 것은 6개월 후였다. 그동안 박물관은 내외형적으로 수직 성장했다. 지난해 관람객은 1만8000명, 도예 체험도 연8000명에 이른다. 연구소, 체험관동, 공동작업실 등 건물도 계속 확장 중이다. 내년에는 전시실 확장 공사를 계획하고 있다. 작가 레지던시도 운영하고 있다. 10만㎡(약 3만평) 규모의 백토마을도 조성 중이다. 백토마을은 작가들에게 분양해 예술인 마을로 조성할 계획이다.
   
   작업할 욕심으로 박물관에 발을 들인 정 관장은 백토 사랑에 빠져 양구 백토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백토 연구를 하고부터 그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이 있다.
   
   “기록에 보면 양구 군민이 모두 백토 채굴과 운반에 동원될 정도로 당시 흙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양구에서 광주 분원까지 흙을 운반한 경로는 주로 수로운송이었습니다. 박물관 앞을 흐르는 수입천을 따라가면 북한강 상류인 상무룡리 서호포가 나옵니다. 거기서 출발해 화천 모일강~춘천~청평~가평~양평~광주 분원까지 4일 정도 소요된 것으로 보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양구 백토 운송로를 재현해 보고 싶습니다.”
   
   백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양구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백토는 전국 각지에서 공납됐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양구와 함께 경남 진주·곤양, 충북 청송 등이다. 정 관장은 양구뿐만 아니라 각 주요 산지의 원료들이 보호되고 각각의 역사성이 보존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국 백토 생산지의 원석을 모두 사와 박물관에 보존해 놓고 체계적인 연구를 하고 싶다. 그는 양구에서 나고 자랐다. 자신의 뿌리인 양구의 흙을 딛고 서서 백자와 백토의 뿌리를 찾는 그는 아주 단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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