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 오늘은 신작 영화가 아닌 이미 개봉됐던 영화를 다루고자 합니다. 이 코너의 ‘문패’가 ‘배종옥, 영화와 놀다’에서 ‘배종옥의 숨은 영화 찾기’로 바뀐 이유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배종옥 | 관객들에게 진작 소개됐던 영화 가운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거나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 가능한 ‘수준급’ 영화를 다뤄 보고자 하는 거지요.

신용관 | 그 첫 번째 대상으로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감독 데이비드 린치·2001)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난해 10월 재개봉되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배종옥 | 신 위원님이 굳이 이 영화를 고른 이유가 있을 텐데요.

신용관 |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2016년에 발표한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편’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배종옥 | ‘21세기 영화’라 함은 2000년 이후 개봉한 영화를 지칭한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무슨 기준으로 100편을 추린 건가요?

신용관 |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BBC는 36개국 영화평론가 177명의 투표로 선정을 했습니다. 뚜껑을 열어 보니, 두 여배우의 대조적인 인생을 현실과 환상을 교차시키며 그려낸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영광의 1위를 차지한 겁니다.

배종옥 | 콧대 높은 영국 기관이 미국 영화를 1위로 꼽은 것만 봐도 그 객관성이 인정될 만하네요.

신용관 | 궁금해할 독자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2위는 량차오웨이(梁朝偉)에게 칸영화제 최우수 남우상을 안긴 왕자웨이(王家卫) 감독의 ‘화양연화’(花樣年華·2000)가 뽑혔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2007),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2001),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Boyhood·2014)가 그 뒤를 이었고요. 장만위(張曼玉) 팬인 저로선 아주 반가운 리스트입니다.(웃음)

배종옥 | 2~5위는 수긍이 가는데, 1위는 의문이군요. 줄거리조차 파악하기 힘든 영화가 전 세계에서 17년 동안 만들어진 수천, 수만 편의 영화 중 최고라니.

신용관 | 우리가 짚어야 할 핵심이 바로 그겁니다. 어떤 점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21세기 최고의 영화가 될 만하냐는 거지요.

배종옥 | 저는 일단 스토리부터가 이해가 안 돼요. 십수년 전 처음 볼 때도 그랬고, 이번에 이 코너를 위해 다시 봐도 마찬가지예요. 신 위원님은 이해가 되세요?

신용관 | 사실 저도 자료 몇 가지를 읽고서야 기본적 스토리라인이 잡히더군요. 영화 전반부는 베티의 환상, 후반부가 현실이었던 겁니다.

배종옥 | 거봐요. 주제니 영화적 기법이니 이전에 플롯 전개조차 모호한 영화가 어떻게 걸작이라는 건지요?

신용관 | 자, 진정하시고요.(웃음) 우선 줄거리를 요약하는 무모함(?)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LA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도로에서 차 한 대가 달려가고, 뒷좌석에는 미모의 여인 리타(로라 해링)가 앉아 있지요. 갑자기 차가 멈추고 앞좌석 남자들이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는 순간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폭주족 차량이 정면으로 들이받습니다.

배종옥 | 리타는 살아나지만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요. 다른 한편, 할리우드 스타의 꿈을 안고 LA에 도착한 베티(나오미 와츠)는 이모 집을 방문하고 그곳에 숨어있던 리타를 발견합니다. 베티는 그녀를 돕기 위해 리타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의 단서 ‘다이안’이라는 인물을 함께 찾아 나서지요.

신용관 | 문제는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의 줄거리가 전혀 다르고 등장인물의 아이덴티티도 바뀐다는 점이지요. 전반부의 리타가 뒤에선 베티로 바뀌고, 베티는 다이안이 되고….

배종옥 | 두 여주인공과 전혀 상관이 없는 스토리도 등장합니다. 대낮의 ‘윙키스’ 식당에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이 꾼 악몽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꿈에서 본 일들이 바로 그 식당에서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거지요. 급기야 꿈에 등장했던 남자와 맞닥뜨리게 되고, 남자는 공포심에 즉사합니다.

신용관 | 그 에피소드가 바로 이 영화를 푸는 열쇠입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과 혼돈을 말하고픈 겁니다.

배종옥 | 동의하기 어렵네요. 자꾸 전·후반부를 나누는데 대체 어떤 장면을 기준으로 그렇다는 건가요?

신용관 | 그건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후반부’임을 알리는 첫 장면은 빨간 침대에서 빨간 베개를 벤 채 자고 있던 다이안이 노크 소리에 잠을 깨는 신입니다.

배종옥 |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나요?

신용관 | 유심히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스윙댄스로 시작하는 영화 도입부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나오미 와츠가 남녀 노인 사이에서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가 침대를 비추다가 서서히 초점이 맞으며 빨간 침대 시트 위의 빨간 베개로 카메라가 파묻히는 신이지요. 이는 잠자리에 드는 누군가의 ‘시점 숏’인 거지요.

배종옥 | 듣고 보니 설득력 있네요.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긴 합니다.

신용관 | 더구나 ‘블루 벨벳’(1986)에서 잘 드러나듯, 데이비드 린치 감독 영화에서 붉은 배경은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을 상징하니까요. 주인공이 빨간 침대에서 잠들잖아요.

배종옥 | 하지만 여전히 모호해요. 후반부에서 주인공 리타는 뜬금없이 한밤 극장으로 향하지요. 그곳에서 검은 양복의 사회자가 말합니다. “밴드는 없다. 오케스트라도 없다. 녹음된 음악이 흘러나올 뿐이다.” 그러고는 기묘한 신시사이저 음악을 깔고서 음산한 노래를 부른 여인이 “실렌시오!”(slencio·스페인어로 ‘침묵’이라는 뜻)라고 외치고 쓰러집니다. 이건 또 뭔가요?

신용관 | 영화를 주의 깊게 따라온 관객이라면 감 잡게 되듯 감독은 “이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허구 자체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요.

배종옥 | 저로서는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떠오르는데요.(웃음) 그 별 얘기 아닌 걸 전달하려 그렇게 복잡다단하게 영화를 만든다? 물론 이것저것 떠나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정밀한 편집, 정교한 화면 구성과 강렬한 색채 등에서 감독의 ‘힘’을 느낄 수 있긴 합니다. 당시 무명배우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나오미 와츠의 연기가 쉽게 잊기 힘든 어떤 ‘필링(feeling)’을 담아낸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신용관 | 고백하지만, 저는 ‘블루 벨벳’ 이후 이 감독 영화 안 봤습니다.(웃음) 보고 나면 골치가 지끈지끈하니까요.(웃음)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나마 친절한(?) 영화 같아요.

배종옥 | 어쨌든 제 별점은 달랑 ★. 한 줄 정리는 “무의식의 세계, 정말 따라가기 힘들군”.

신용관 | 저는 ★★★★. “할리우드의 허상에 대한 가장 비(非)할리우드적인 접근.”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배종옥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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