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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호] 20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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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논쟁] 세종은 정말 노비 폭증의 원흉인가?

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정부 공인 세종대왕 어진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추측과 논박’(2002)에서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수에 대한 두 종류의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진리로 간주되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담한 추측에 대한 사회의 관용과, 그 추측이 다른 사람들의 논박을 넘어서지 못했을 때 스스로의 오류(실수)를 인정하는 개인의 솔직함이 그것이다. 만약 그 추측이 엄격한 비판(논박)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 이론이 다른 경쟁 이론보다 우리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논증될 때” 비로소 ‘과학’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를 읽으면서 칼 포퍼의 책을 다시 꺼내든 것은 ‘지식의 성장 조건’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다. 칼 포퍼는 지식의 성장을 위한 세 가지 조건으로 ①단순성 ②새로움 ③경험적 성공을 들었다. 이에 비춰볼 때 이 교수의 주장은 ①과 ②의 조건을 충족한다. 흔히 세종을 성군이라 하는데, 그는 양반 사대부들의 성군일 뿐 일반 백성들에게는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②의 조건에 맞는다. 그 이유로 그가 드는 세종시대 노비의 삶의 질 악화와 세종 사후 ‘노비인구 대확장설’은 ①의 조건에 부합된다.
   
   문제는 ③의 경험적 성공, 즉 그러한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느냐이다. 실록이든 호적(戶籍)이든 그의 대담한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세종시대의 노비와 관련된 여러 논저를 검토해보니 이 교수의 주장은 ③의 조건에서 결정적 흠결이 있었다. 바로 그 점을 이 글에서 밝히려 한다.
   
   세종은 백성들의 성군이 아니었다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세종이 노비의 인권과 삶의 질을 크게 악화시키는 법을 만들었고, 2)그 법으로 인해 세종시대 노비의 처지가 크게 악화되었으며, 3)세종 사후 노비 인구가 대확장되었다.
   
   과연 그게 사실일까? 1)과 관련된 첫 번째 법은 ‘주인고소금지법’, 즉 종이 주인을 고발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즉시 목을 베도록 한다는 법이다. 이 법에 대해 이 교수는 1420년(세종2년) 9월 13일에 세종이 동의해 통과되었다고 하는데(위의 책 53쪽), 사실이 아니다. 이날 예조판서 허조는 당태종의 말을 근거로 주인고소금지법을 거론했다. 하지만 정작 세종이 받아들인 것은 부민(속관·아전·백성)이 수령(품관·수령·감사)의 죄를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수령고소금지법)뿐이었다.
   
   주인고소금지법은 그로부터, 즉 수령고소금지법이 통과된 지 2년 후인 1422년 2월 3일에야 제정되었다. 입법자는 역시 허조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날의 실록 기록인데, 처음 입법이 제안되었을 때(1420년 9월)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다(議之). 이 자리에서 정승인·유정현·박은 등은 그 법을 “심히 그르게 여겼다”. 그렇게 하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반대 이유였다.
   
   그러자 허조는 당시 태상왕이던 태종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윤허하지 않으시면 죽어도 눈을 못 감는다”면서 울먹이는 허조에게 태종이 감동되어 ‘즉시 통과시켰다(卽從之)’는 게 실록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교수는 “그를 둘러싼 어떠한 찬반논쟁도 없었”고, “세종은 신하들의 과격한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위의 책 54쪽).
   
   다시 말해서, 양반 지배층이 자기들의 이익 내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노비 관련 법안을 일치단결해 제정한 게 아니었다. 또한 허조의 입법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세종이 아닌 태종이라는 게 실록 기록이다. 따라서 이 법의 책임을 묻자면 결정권을 쥐고 입법을 허락했던 태종, 즉 이영훈 교수가 ‘개혁적인 군주로서, 노비의 권리를 지키고자 노력했다’던 태종에게 지워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주인고소금지법은 태종의 결정
   
   이 교수는 또한 이 법이 제정된 이후 “조선의 노비는 주인의 어떠한 불법 행위나 악행에 대해 저항할 법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했다(위의 책 56쪽). 1422년 이후 노비는 “살아 있지만 실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의 상태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상당 부분 사실일 것이다. 노비는 그 당시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어떤 경우는 이 집 저 집으로 자식들을 분산시켜야만 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교수는 세종시대의 노비 상황의 열악함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왕조는 노비를 죽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위의 책 37쪽)고 주장한다. 틀린 말이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형하게 했고, 그 사실을 고발하지 않은 이웃이 있으면 수령을 벌주게 했다(1440년 6월).
   
   실제로 집현전 관리 권채나 이색의 손자 이맹균 같은 명문가 출신의 관리들이 계집종을 학대하거나 살인한 아내를 대신해 파직당하거나 유배가기도 했다(1427년 9월, 1440년 6월). 자신의 여종을 임의로 죽인 안주인이 처벌받은 일(1438년 5월)도 있다. 그런데도 이 교수는 “세종에 의해 노비의 법적 권리가 박탈된 이후 노비에 대한 주인의 침탈이 맘대로 되었다. 노비를 죽여도 범죄가 되지 않았다. 노비가 노예적 상태로 떨어진 게 세종 때다”라고 말한다. 도대체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 교수의 사실 왜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세종이 1426년에 주인의 ‘노비구살(歐殺·때려죽임)금지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변계량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고 말했다. 호랑이 같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세종이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426년 윤7월 24일에 세종이 형조에 내린 왕명(傳旨)을 보면 그와 정반대다.
   
   이 왕명에서 세종은 “임금 된 자라도 (노비의 생명에 대해서) 함부로 하지 못한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인이나 하늘이 낸 백성(天民)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역설했다. 노비도 하늘 백성이라는 세종의 백성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나아가 세종은 “지금부터는 (노비가) 죄가 있건 없건 간에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노비를 구타 살해한 자는 일체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호랑이 같은 신하들의 반대에 ‘주저앉거나’ ‘좌절하지’ 않고 노비구살금지법을 관철시킨 것이다.
   
   이 교수도 1998년에 쓴 글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에서 이 왕명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는 “그다지 구속력이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구속력이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전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종이 노비를 정상의 인류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정상이 아닌 인류, 즉 ‘이류(異類)인 노비의 소생을 노비로 만드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것이다(위의 책 63쪽). 이런 해석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세종이 노비제를 개악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이 교수가 내세우는 두 번째 법은 노비종모법이다. 양인 아버지와 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신분을 종래와 달리 어머니 쪽을 따르게 하는 법을 세종이 앞장서 입법했다는 것이다. 노비 관련 두 개의 악법, 즉 주인고소금지법과 노비종모법 중에서 이 교수가 중시하는 것은 후자(종모법)이다. 주인고소금지법은 노비의 권리에 관련된 것이지만, 그 자체로 ‘노비 폭증’의 원인은 아니다.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이른바 ‘노비 대폭발’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법은 후자인 종모법과 (근거 없는) 세종의 양천교혼 허용이다.
   
▲ 이영훈 교수의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photo 뉴시스
실제로 세종은 1432년 3월 15일에 부왕 태종 때 제정된 종부법 개정을 제안했다. “여자 노비가 자주 남편을 바꾸어 양민과 천민을 뒤섞기(混淆·혼효) 때문에 그 자식이 태어났을 때 어느 남편의 소생인지 애매(曖昧)하여 구분하기 힘들고(難明·난명) 자기 아비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패륜”까지 발생한다는 게 세종의 상황 인식이었다. 세종은 이날 태종이 만든 종부법을 위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륜의 바른 길(人倫之正道)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각기 충분히 의논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들은 맹사성 등은 논의 끝에 종부법의 폐지를 주장했다. 낳은 자식의 신분을 남편 쪽에 따르게 하는 법(종부법) 때문에 여자 노비가 천인의 자식을 잉태했을 때 다시 양인 남자와 관계하여 자식을 양인으로 바꾸려 하는 폐단이 있으니, 종모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관계되는 바가 중하니 다시 깊이 헤아려보겠다고 대답했다.
   
   이날의 종모법 논의와 관련해 이 교수는 “이 법은 원래 발의자 세종이 토로한 대로 비(婢·여종)는 성적으로 문란한 금수(禽獸)와 같아서 그 소생의 부계(父系)를 인정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위의 책 63쪽). 그러나 세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 교수는 세종이 하지도 않은 말을 애매(曖昧)하게 갖다 붙이고 실록 속의 발언자를 뒤섞어(混淆·혼효)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難明).(‘금수’라는 표현은 세종이 아닌 맹사성의 말 속에 나온다.) 이 교수는 자기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이 ‘자진하여’ 이 법을 냈고, 신하들에게 “그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이 제안이 나오기 8년 전부터 신하들과 여러 차례 종부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허조를 비롯해 맹사성, 김효손 등이 종부법의 인륜파괴 문제를 제기하며 개정을 줄기차게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세종이 종모법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사건들도 있었다. 그 하나는 각 고을의 창기가 양민과 천민을 번갈아 바꿔 상대하여 자식을 양민으로 만들려 하는 문제점이었다. 또 다른 예는 종모법 논의 2년 전인 1430년 10월에 있었던 ‘고미사건’이다. 여종 이고미는 천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등 패륜 행위를 했다. 한마디로 부모 자식 사이를, 부부 간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법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이 교수는 ‘노비라는 재산을 증식시키려는 양반들의 강한 요구’에 이끌려 세종이 이 법을 통과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교수의 결정적인 사실 왜곡은 그 다음, 바로 양천교혼 관련 주장에 있다. 세종이 양반들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해 종모법을 입법했고,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 사이의 혼인을 허용 내지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세종시대에 들어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허락하는 양천교혼법(良賤交婚法)이 통과되었고, 이로써 ‘양천교혼이 무한정 용인되었으며, 노비인구의 대확장’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록 어디에도 세종이 양천교혼을 허용한 대목이나 법률이 없다. 반대로 종모법을 제정하면서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자 종과 양민의 결혼을 엄하게 금지하는 조처와 지시를 자주 내리고 있다(1432년 3월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어떤 근거 제시도 없이 “세종이 제정한 종모법에 의해 양천금혼의 빗장이 풀렸다”고 주장하고 있다(위의 책 64쪽).
   
▲ 지난 5월 15일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 영릉에서 열린 세종대왕 탄신 621돌 숭모제전.

   노비인구 대폭발도 가설일 뿐
   
   이 교수는 왜 이처럼 양천교혼 허용 내지 권장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종모법과 양천교혼이 결합될 때 비로소 ‘15세기 노비인구 대확장’의 원인이 세종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천교혼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세종시대에 제정된 종모법이라는 원인(cause)과 세종 사후 노비인구의 대확장이라는 결과(effect) 사이를 매개할 결정적 요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세종이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노비인구 대폭발은 사실인가? 보다 정심(精審)한 연구를 해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필자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이 주장 역시 빈곤한 몇몇 데이터를 토대로, 검증할 수 없는 추론과 가정의 조합으로 이뤄진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을 자제하려 한다. 해당 분야 전문가의 ‘사실에 의거한 바른 서술(擧事直書)’을 기다린다.
   
   “모든 논박은 위대한 성취로 간주되어야 한다.” 칼 포퍼는 추측이 없었으면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인류 지식의 도약은 없었을 것이고, 엄밀한 논박이 없으면 근거 없는 주장과 거짓 이론을 판명할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성한 추측과 고집스러운 편견을, 사실의 연단(鍊鍛)을 거쳐 바른 지식으로 자리매김해주는 것이야말로 학자의 고결한 의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영훈 교수나 또 다른 분들의 재논박을 기다린다. 필자 나름대로 실록을 토대로 논박을 해보았으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를 계기로 생산적 논쟁의 불모지인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고대사 문제나 식민지근대화 문제 등 여러 사안에 대해서 서로 다른 사료와 해석을 가지고 자기주장만 할 뿐 논박과 검증을 하면서 지식이 성장하는 과정이 없는 게 역사학계의 현주소다.
   
   “서로 논박하면서 각기 마음속에 쌓인 바를 풀어 놓으라”는 세종의 말대로, 연구자들이 한곳에 모여 충분한 시간을 갖고 토론하면 학계에 대한 불신도 해소되고, 우리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는 바른 지식이 쌓여갈 것이라 믿는다.
   
   ※이 글은 박현모 교수가 최근 문화일보에 게재한 3개의 칼럼(5월 16·23·30일자)을 수정 보완하여 보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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