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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운동권 가요의 숨은 거물 박치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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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8호] 201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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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운동권 가요의 숨은 거물 박치음 교수

투쟁 대신 열정! “싸움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황은순  기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1981년 4월 5일, 경기도 고양시 원당의 한 산속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식목일 행사로 위장한 마당극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마당극은 스스로를 ‘딴따라’라 불렀던 문화운동가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산중턱에서 세상의 눈을 피해 열린 마당극은 김지하 원작의 ‘밤하늘의 별처럼’이었다. 별처럼 모두가 고르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안무는 당시 탈춤운동의 대부였던 채희완(전 부산대 교수), 연출은 김명곤(전 문체부 장관)이 맡았다. 출연진은 대부분 대학 탈춤 동아리 학생들과 연극영화과 졸업생들이었다. 관객은 30여명. 노동운동가, 해직기자 등 운동권 인사들이었다. 그중 절반은 수배 중이었다. 마당극은 이날 처음 공개된 노래로 끝을 맺었다. 노래는 짧고 강렬했다.
   
   ‘낮은 어둡고 밤은 길고
   허위와 기만에 지친 형제들
   가자가자 이 어둠을 뚫고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서너 달 만에 서울에서 제주까지 닿았다. 8마디, 1절로 끝났던 노래는 가는 동안 32절로 불었다. 시위 현장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가자가자’(일명 전진가)의 탄생 비화이다. 전진가는 민중 가요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대 운동권 가요를 이끌어간 비장한 단조 행진곡의 시초였다. 그날 이후 마당극, 거리극의 끝은 항상 행진곡풍의 운동가로 끝났다. 그 흐름은 1982년 광주에서 마당극 형식으로 열린 ‘윤상원-박기순 영혼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한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이어졌다.
   
   그날 전진가를 작사·작곡하고 노래를 부른 이는 서울대 공대 77학번 박치음(60)이다. 그는 서울대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창단 멤버다. ‘메아리’는 시대에 저항한 음악운동 시대를 열어젖히고 이후 노래패 ‘새벽’ ‘노찾사’로 연결됐다. 당시 그는 운동권 가요를 100여곡 가까이 생산해냈지만 기록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신분을 노출해서도 악보를 남겨서도 안 되던 시대였다. 이런저런 가명으로 활동을 했고 ‘박치음’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노래들은 ‘반전반핵가’ ‘내 사랑 한반도’ ‘투사의 유언’ 등이다.
   
   그동안 그는 전남 순천으로 내려가 순천대 공대 교수로 줄곧 살고 있다. 6개월짜리 장교로 군복무를 끝내고, 서울대에서 내리 석사, 박사를 마치자마자 학교로 교수 추천 의뢰가 들어왔다. 그 길로 서울을 떴다. 27세 때였으니 초고속 임용이었다. 교수를 하면서도 그는 음악을 놓은 적은 없다. 1999년 박치음이란 이름으로 1집 앨범 ‘혁누망운’(혁명 누명 망명 운명의 줄임말)을 발표한 후 ‘미안해요 베트남’(2001), ‘소쩍새’(2006), ‘말자’(2015)를 내놓고 간간이 소식을 알렸다. 그가 최근 5집 싱글 음반 ‘열정’을 발표했다. 지나간 세월만큼 세상도 그도 변했다. 그가 하는 음악도 180도 달라졌다. 1990년대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그를 지탱하던 세계가 무너져내렸다. ‘노래로 세상을 바꾸겠다’며 투쟁을 외치던 청년은 사라지고 그는 영성음악가가 됐다. 어느 순간 세상을 바꾸려면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다. 2006년부터는 지리산 자락 구례 화엄사에서 국제영성음악제 총감독을 맡아오다 2년 전 원일 한예종 교수에게 바통을 넘겼다. 돌고 돌아 나이 60에 끄집어낸 ‘열정’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특별해 보였다. 서울 나들이를 한 그를 지난 7월 20일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음악인으로 하는 인터뷰이니 본명은 밝히지 않기를 원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열정’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 2007년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열린 국제영성음악제. 맨 오른쪽이 총감독을 맡은 박치음 교수.

   투쟁가에서 영성음악으로
   
   “그땐 적이 무너지면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요. 싸우다가 괴물이 됐어요. 싸움을 통해서는 절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이젠 열정의 시대가 왔습니다. 열정이 없으면 기쁨도 없고 우리 사회도 진전이 없습니다.”
   
   “욕망이 부딪쳤을 때 계약이 이뤄지죠. 기쁨이 만날 땐 열정이 만들어져요.”
   
   “기쁨은 주관적이고 열정은 객관적이에요. 대한항공을 보세요. 스트레스받고 돈을 벌었지만 아무도 기쁜 사람이 없잖아요. 그럼 열정을 낼 수 없어요. 한 대학교 앞 식당 아줌마는 학생들 입에 밥 넣어주는 것이 기쁨이었어요. 그렇게 모은 수억원을 학생들한테 기부했어요. 그게 그 사회를 바꾸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열정이에요.”
   
   “기쁘지 않게 돈 버는 것, 기쁘지 않은 일은 하면 안 돼요.”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를 썼을 때 수천 년 후 자기가 산 곳에서 1만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마찬가지로 지금 나의 노래를 수천 년 후 누군가가 이 시대의 열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죠. 이런 것이 인류를 풍성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열정학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그에게 ‘열정’은 삶을 관통해온 단어였는지 모른다. 그의 설명을 듣다 보니 열정에 대해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됐다.
   
   ‘세월은 양보할 줄 몰라 하자는 대로 해야지
   흘러간 그 모든 것들 중에 내 것이 있던가
   그러나 한 번 더 내 가슴에 열정이 춤추며 노래할 거야’.
   
   이번에 발표한 ‘열정’ 노래의 일부이다. 그는 “1980년대 지하에 숨어 만들었던 절규의 노래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침잠에 빠져 만든 노래들, 그리고 영성 노래들, 그 모든 것들을 흘려보내며 만든 노래다”라고 말했다. 이번 앨범은 그의 음악활동 40년을 기념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 ‘암살’ ‘곡성’의 음악감독 장영규를 비롯해 이병훈(건반), 곽경묵(기타), 이철희(드럼) 등 오랜 음악친구들의 부추김 덕분에 용기를 냈다. 음악계에서 쟁쟁한 이들이 모두 그의 음반에 기꺼이 힘을 보탰다.
   
   
   음악활동 40년
   
   40년은 그가 가수로 데뷔한 1977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는 “중학교 음악시간에 문득 음악의 기본을 알아버렸다”고 말했다. 음대를 가고 싶었지만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혼자 깨우친 음악 실력으로 작곡을 시작했고 대학에 들어가서 만든 노래가 ‘악어사냥’이었다. 집회 현장에서 잡혀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만든 노래였다. 어쩌다 TBC FM ‘밤의 다이얼’이란 프로그램에 한 번 나갔다가 대박이 났다. 1978년 당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록그룹 산울림의 첫 번째 콘서트에 초대손님으로 나가면서 얼떨결에 가수로 데뷔했다.
   
   수상한 시절이었으니 당시 숨은 비화들이 많다. 프로그램 출연을 계기로 알게 된 TBC PD에게 부탁을 해 스튜디오에서 비밀리에 노래 테이프를 녹음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이었다. 대학가에서 시위 때 부른 노래를 녹음해 광주에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테이프를 전달받기로 한 사람들이 모두 연락두절이 돼버렸다. 직접 광주로 가기 위해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갔지만 호남행 버스는 이미 운행이 중단된 뒤였다. 다음날부터 계엄령이 확대되고 상황이 악화됐다. 녹음한 테이프를 어딘가에 감췄는데 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농민가’ ‘사노라면’ ‘아침이슬’ 등을 녹음한 테이프였는데 결국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5월 광주에서 ‘진짜 사나이’ ‘고향의 봄’ 같은 노래들이 불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은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부를 수 있는 간결하고 쉬운 노래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그해 겨울 ‘가자가자!’ 전진가를 만든 것입니다.”
   
   순천대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교수 재임용이 안 될 위기에 처했다. 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학교에 소문이 파다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6월 항쟁이 일어났다. 세상이 바뀐 덕분에 현재까지 순천을 지키고 있다. 그의 본적지는 서울 도심 한복판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청사 사이에 있었다. 그는 “생가 복원을 못 하니 유명해져도 안 된다”고 말하며 웃었다. 600년 도성을 지킨 집안의 장손이었다. 음악은 그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긴 머리에 기타 메고 명동을 휩쓸고 다니는 대신 부모님께 선물로 박사학위 안겨드리고 자유롭게 살 생각이었다. 그 학위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다.
   
   1집 ‘혁누망운’부터 이번 5집 ‘열정’까지 그의 음반은 미국 의회 도서관에도 기록으로 올라가 있다. 그의 모든 노래가 그랬듯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미 의회 도서관에서 일하는 한국계 미국인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의 열정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전해질지 모를 일 아니겠느냐”고 그가 말했다. ‘열정’의 노랫말처럼 ‘세월은 양보가 없고, 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이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은행잔고는 ‘0’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 애쓸 뿐이다. 그리고 새롭게 올 열정을 기다리며 노래한다.
   
   ‘열정이 도둑처럼 찾아오면
   춤추며 노래할 거야
   춤추며 노래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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