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4일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개봉일에 기자가 소장하고 있는 아이언맨 마스크, 타노스 건틀릿을 착용하고 서울 용산CGV에 갔다. 관객들이 줄지어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4월 24일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개봉일에 기자가 소장하고 있는 아이언맨 마스크, 타노스 건틀릿을 착용하고 서울 용산CGV에 갔다. 관객들이 줄지어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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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the end of a universe as we know it.’ 번역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끝이다.’

지난 4월 24일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두고 미국의 온라인 매체 ‘살롱(Salon)’이 붙인 제목이다. 개봉 전부터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둘러싸고 높아진 전 세계의 기대감을 생각해보면 결코 과장된 문구가 아니다. 어벤져스를 만들어낸 마블(Marvel) 세계관은 지난 11년간 말 그대로 ‘우리의 세계’였다.

지난 4월 18일에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국내 예매가 일부 시작되던 날이었다. 영화 팬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용산CGV 아이맥스관 예매가 오후 6시 전후로 시작됐는데 순식간에 CGV 서버가 마비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렸다. 열렬히 영화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역대 최고 수준의 예매 경쟁이 이뤄졌다. 개봉 당일인 24일 자정을 기준으로 사전 예매 관객이 231만명을 넘었고 예매율은 97.1%에 달했다. 개봉 당일에는 4시간30분 만에 100만관객을 돌파해 신기록을 세웠다. 급기야는 암표까지 나돌았다. 용산CGV 아이맥스관의 한 좌석이 22만원에 매물로 나오기도 했다.

한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개봉 전날 미국 로스앤젤레스 TCL 차이니즈 극장에서 열리는 전야(前夜) 상영 예매권이 500달러(약 57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미국의 신화라 일컬어지는 ‘스타워즈’가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깨어난 포스’의 사전 판매량도 뛰어넘었다. 미국에서의 인기 이유를 짐작하자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마블의 수퍼히어로들은 원래부터 미국 코믹스 팬들에게 인기 있었던 캐릭터다. 수퍼히어로 장르에 익숙한 미국 팬들이 마블 히어로에 열광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 마블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를 고민해보면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1년 전 주간조선 2504호 ‘한국이 유독 마블에 빠진 이유’를 통해서 마블의 세계관이 양방향적인 것이라 팬들이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기 쉽다고 설명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왜 굳이 예매전쟁까지 치러가며 목이 빠지게 새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를 풀어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설명이기도 하다. 답은 관객인 ‘나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마블 인피니티 사가’의 의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라는 문구를 굳이 앞에서 인용한 이유가 있다. 지난 11년 동안 마블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 세계는 영화관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하는 살아 있는 사가(saga)였다. ‘사가’란 원래 문학의 한 형태로 중세문학에서 주로 쓰이던 산문글을 말한다. 주된 장르는 영웅담이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영웅시’라고 하겠지만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한 세계가 있고 세계 안에서 희로애락을 겪는 영웅의 일대기를 다룬 것을 ‘사가’라고 부른다. 사가의 뜻을 이해하면 마블의 수퍼히어로 세계관을 이해하기도 한층 쉬워진다. ‘어벤져스: 엔드게임’까지 포함해 22편을 이어온 마블스튜디오의 영화를 한데 묶으면 ‘마블 사가’라고 할 수 있다. 아예 마블스튜디오 측에서는 23편의 영화를 묶어 ‘마블 인피니티 사가’라고 공식적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블 인피니티 사가’는 한국 밀레니얼 세대가 공유하는 일종의 신화 같은 존재다. 여기서 신화는 신(神)이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같은 이야기가 담긴 신화를 말한다.

왜 한국에서 마블이 신화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스타워즈가 신화가 되지 못한 이유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개봉을 앞두고 실린 주간조선 2387호 기사 ‘스타워즈 38년: 전쟁 영화 그 이상, 문화를 넘어 神話로’를 인용해보자면 “스타워즈는 미국의 건국신화”다. 스타워즈 영화는 시작할 때마다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아주 먼 옛날 은하계 저편에)’라는 자막을 띄우는데 마치 할머니가 옛 설화를 들려주는 모양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첫 작품인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은 1979년 개봉했다. 이어서 5편 ‘제국의 역습’이 1980년, 6편 ‘제다이의 귀환’이 1983년 개봉했으니 198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미국인이라면 스타워즈 세대라고 부를 만할 것이다. 스타워즈 세대는 2000년대에도 이어졌는데 앞서 개봉한 영화의 이전 이야기를 다룬 1~3편 스타워즈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차례로 개봉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스타워즈를 보고 자란 부모 세대가 2000년 청소년인 자녀와 함께 스타워즈를 즐기는 모습을 미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스타워즈가 좀처럼 인기를 얻지 못한 이유는 그 뿌리가 1980년대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1980년대부터 미국 드라마나 영화가 수입돼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제한적인 수용만 가능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스타워즈는 1980년대 한국에 제대로 수입되지 못했다. 2000년대 완전히 개방된 한국 관객의 눈으로 보자면 1980년대 철 지난 영웅담이 매력적일 리 없다.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을 밟은 것이 1969년의 일이니 1979년 개봉한 스타워즈는 ‘우주전쟁’의 그늘 아래 있었다고도 해석된다. 무엇 하나 한국과는 별 연관 없는 이야기다.

스타워즈가 미국, 미국과 동기화되던 일본 등에서 대중문화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을 때 한국은 딱히 그런 것을 찾지 못한 채 자생적인 이야기들을 키워왔다. 딱히 한 세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이 도리어 K팝과 아이돌그룹이 그 자리를 채우기도 했다. 마블은 그런 빈 공간을 채워줬다.

‘마블 인피니티 사가’는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며 같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문화세대’의 신화다. 딱히 젊지 않아도 된다. 극장에서 개봉 작품을 보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VOD든 블루레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마블스튜디오의 세계관을 ‘이야기’로 받아들인 세대라면 인피니티 사가와 함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블 인피니티 사가’는 그저 영화 몇 편으로만 완성된 것이 아니다. 사실 인피니티 사가가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게 된 것은 첫 영화인 2008년 개봉된 영화 ‘아이언맨’이 아니라 2012년 영화 ‘어벤져스’였다. 그전까지 ‘마블 인피니티 사가’는 그저 그런 몇 개의 수퍼히어로 영화를 묶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벤져스’ 이후로 마블은 하나의 세계관이 됐다.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 단독 영화들이 어벤져스 영화 하나에 모두 합쳐졌다가 다시 다른 단독 영화로 흩어진다. 어벤져스는 마블 수퍼히어로의 팀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고 ‘마블 인피니티 사가’의 분기점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한 셈이다.

예를 들어 두 번째 어벤져스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마블 인피니티 사가’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헐크는 아예 지구를 떠나 토르와 함께 우주 공간에서 ‘토르: 라그나로크’를 찍었고 ‘에이지 오브 울트론’으로 촉발된 갈등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영화를 만들어냈다. ‘시빌 워’ 때문에 앤트맨은 갇혀 있다가 ‘앤트맨 앤 와스프’를 찍었고 시빌 워에서 처음 만난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은 유사 부자(父子) 관계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며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찍었다.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

모든 영화가 하나의 정점,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향해 달려가는 이런 제작 과정은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시스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할리우드에서 말하는 ‘프리 프로덕션’, 즉 사전제작 단계의 중요성이 커졌다. 주요 제작사마다 다크 유니버스니 몬스터 유니버스 같은 ‘유니버스’, 다시 말해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영화를 한 편만 만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죽 이어지는 세계관을 성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영화 제작사의 주된 목표가 된 것이다. ‘마블 인피니티 사가’가 만들어낸 마블 세계의 힘이 그만큼 커 보이기 때문이다.

마블 인피니티 사가는 그저 수퍼히어로와 악당 간의 대결만 그리지 않았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크게 보면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 수퍼히어로와 수퍼히어로 간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블랙 팬서’에서는 흑인 수퍼히어로가 나온다. 지금껏 흑인이란 백인 캐릭터의 보조 역할이나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블랙 팬서’에서는 그렇지 않다. 캐릭터들은 유려한 미국식 영어가 아니라 억양이 강하고 노래하는 듯한 아프리카식 영어를 쓴다.

미국에서 ‘블랙 팬서’ 영화는 공전의 흥행을 거뒀다. 수퍼히어로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부문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한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한국에서 인종 문제는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마블 인피니티 사가’는, 현실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인종차별 이슈가 두드러지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블랙 팬서’가 평범한 ‘마블 인피니티 사가’ 중 하나로 간주되고 대신 여성 수퍼히어로를 내세운 ‘캡틴 마블’이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관객들은 ‘마블 인피니티 사가’를 하나의 살아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여성 캐릭터 세 명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는 액션 장면을 보면서 여성 관객들이 두 손을 부둥켜 잡고 소리를 지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블의 여성 캐릭터는 007 시리즈의 ‘본드 걸’ 같은 존재가 아니다. 블랙 위도 역의 스칼렛 요한슨이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의 불평등한 출연료 문제에 앞장서 목소리를 높이고, 스칼렛 위치 역의 엘리자베스 올슨이 의상의 선정성을 직접 지적하는 발언을 하는 이유가 있다. ‘마블 인피니티 사가’는 스크린 속의 수퍼히어로 세계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의 살아 숨 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11년간 풀어놓은, 그래서 일상생활 속에서 틈틈이 따라잡아 가던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마블 인피니티 사가’의 팬이라면 벅찬 마음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마치 자신의 11년 시간이 마무리되듯이, 11년간 따라가던 이야기가 매듭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상영시간 180분, 앞선 21개의 작품을 숙지해야 하는 썩 좋지 않은 흥행 조건 속에서도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상당한 흥행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몇만 명의 관객 숫자보다 아마 더 뜨거운 열기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팬들에게 ‘엔드게임’은 180분 영화 한 편이 아니라 11년의 시간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블 11년의 역사, 22개의 영웅담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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